[김희영의 희망편지]상자 속에 만들어 놓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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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의 희망편지]상자 속에 만들어 놓은 세상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2.02.1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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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민신문] 양 한 마리 그려달라는 말에 이것저것 그려보다가 제풀에 지쳤습니다. 어린아이의 어리광은 참으로 질기고 성가신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그려도 다 싫다고 하니, 이쯤 펜을 놓으려 했습니다. 그때 번뜩이는 생각 하나로, 아이를 달래며 마지막 그림 한 장을 그렸습니다. 작고 길쭉한 상자 하나입니다.

"이 상자 속에 네가 원하던 양이 있어. 어때? 잘 보여?"

그러자 아이는 손뼉을 치며 좋아합니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양을 얻게 되었다면서,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들고서는 폴짝폴짝 뛰어다녔습니다. 자지러지게 웃으며 아이는, 제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웃음에 나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아이같이 웃어본 때가 언제였던지, 그 마지막 순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던 건지. 내가 나의 행복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아이도 언젠가 자신의 행복을 잊는 날이 올 테죠. 때로 행복은, 자신보다 타인이 더 잘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더 증폭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바라만 보아도 흐뭇한 광경을, 우리 자신의 가슴속에 깊이 새길 수는 없는 걸까요?

아이에게 그려 준 종이 상자 속 양 한 마리처럼, 우리의 가슴에도 작은 상자가 있었으면 합니다. 눈앞에 형용하여 남겨진 글자만이 기록의 전부가 아님을, 우리의 마음속 열리지 않는 그림 같은 상자 속에 변질된 꿈이 있다고 해도, 잃고 싶지 않습니다.

기록은 애석하게도 찬란의 순간을 추억하며 새겨집니다. 그 순간에 내 얼굴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지는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갑니다. 어쩌면 일생을 마무리하는 순간마저, 우리의 삶은 흰 종이에 직접 기록되지 못하겠죠. 그러나 우리는 자각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 아닌, 조금 더 의미 있는 시간들을 채워나가기 위한 것으로 말입니다.

마음에 없던 상자를 다시 그려 넣다 보니, 이제껏 놓쳐왔던 추억의 단상들이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진즉 상자를 그려 넣을 걸. 조금 더 하루, 하루 내 시간들을 의미 있게 기록해볼걸. 설령 지난 시간들이 매우 불행하게 느껴지거나, 매우 행복하게 느껴지는, 세월에 조금씩 닳아진 기억의 단면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후회에 대해서는 애써 묻어두려 합니다. 기억을 이어가며, 조금 틀어진 추억이라도 진짜라고 생각하며 담아두렵니다. 삶은 타인과 함께 더불어가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론 자신만의 세상에서 나의 의식대로 꾸려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지난날의 추억 속에 나 자신이 행복하면 괜찮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상처 받지 않을 삶에 대해 기록해나가는 것입니다.

아이가 말한 상자 속 양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미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에 대해 얼마나 아름다운 양으로 그려 넣느냐, 얼마나 늙고 초라한 양으로 그려 넣느냐에 따라 달라질 테죠. 우리가 만든 상자 속의 지난 시간들과 열정들도 어떻게 빚어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어리숙하고 실수만 많이 한 지난날의 후회를 좋은 경험이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죠. 상자가 그려진 종이를 들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아이처럼. 어쩌면 후회는 우리가 생각하기 나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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