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영의 희망편지] 정답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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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의 희망편지] 정답에 대하여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2.03.1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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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민신문] 모든 사람이 격자무늬 같은 틀 속에 갇혀 살 동안, 나는 조금이라도 더 참신하게 살아보기 위해 무던 애를 썼다. 가령 남이 걷지 않는 길에 대해서 조금 더 골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많은 아이디어가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온 시대에, 그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을 떠올린다는 것은 참으로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펜 뚜껑을 이로 물어뜯으면서 기사들을 찾아보았다. 어쩌면 뻔한 것 속에 새로운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에.

세상이 젊은 청년에게 내놓은 숙제 중 '참신한 것'을 찾으라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 나의 입시는 언제나 '참신한 것'을 찾는 여정이었다. 백일장에서 글을 쓰는 주제 또한 참신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대학에 올라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대학교 입학은 생활기록부와 자기소개서 그리고 면접이었다. 인재 전형 비슷한 것이었는데, 성적으로 입학하는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서 나만의 특이점을 설명해야만 했다. 국어국문학과 입학 면접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도서관에 갇혀 있고 싶다'는 꽤나 작위적인 소감으로 합격하게 되었다. 사회에 나가 이력서를 들이밀 때도 비슷했다. '회사의 부품이 되어', '소속감을 가지고', '열정을 다해'와 같은 뻔해 빠진 말들을 늘어놓았다. 누구나 하는 말들 때문에 어느 회사에도 입사하지 못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나는 다른 회사에 잘 들어갈 수 있었다.

세상은 신선한 것을 원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아주 뻔한 사고에 갇혀 있었다. 나 개인은 격자무늬 속 삶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오히려 세상이 그것을 원했다. 똑같이 찍어내는 사고들과 짜여 맞춰진 듯한 대답, 그리고 그 뻔한 대답을 참신하게 보이게 만들어야 하는 스킬까지.

한 번은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필 강의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어떤 학생이 요즘 입시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이제 입학사정관제와 같은 (학생들의 역량을 파악하는) 제도가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자기소개서와 논술에 힘을 쏟던 시기들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는 것이다. 한 편으로 생각해서는 좋은 일처럼 보였다. 주관적인 평가보다는 시험 점수라는 객관적인 평가로 조금 더 정확하게 불합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했을 때는 조금 씁쓸했다. 공부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재능으로 꿈을 펼쳐 보일 수 있는 학생들에게는 높은 시험 점수가 부담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요즘은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대학이 전부가 아니라고들 말한다. 취업 때문에 일찌감치 전문계고에 진학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러나 내가 학생이었을 때는, 대학교 진학만이 정답인 것처럼 느껴졌다. 대학 진학을 하지 않는다면 마치 인생의 패배자가 된 느낌이 들었다. 어떤 친구가 어떤 대학에 합격했다더라, 하는 소문은 느슨하게 풀려있던 나의 긴장감을 확 조여주었다. 그리고 초조해했다. 대학교에 가지 않으면 내 인생 전체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다른 친구들에게 뒤처져 낙오될 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에. 요즘 학생들이라고 다를까? 내 생각엔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그러나 대학도 졸업해보고, 사회생활도 겪어본 지금 그때의 선택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명확했다면, 학문을 결정하는 데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테다. 그러나 우리는 하고 싶어 하는 것들에 대해 골몰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기본 시험 점수를 높일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해왔다. 그것이 마치 정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답은 꼭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때도 일반적인 길과 지름길, 그리고 멀리 돌아가는 길도 있듯이 말이다.

누군가가 밟기 시작한 루트를 통해서, 모두 한 방향, 한 길로만 나아가고 있다가 나름 삐끗, 탈주를 시도해본 적이 있었다. 그것이 지금의 1인 출판이었고, 등단 없이 글을 쓰는 것이었고, sns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해보는 것이었다. 별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것 마저도 멋있다고 박수를 받았다. 글쎄, 나는 전혀 멋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삐끗, 벗어나기 시작한 길이 여정이 되어버리고, 뚜렷한 목표 없이 이리저리 휩쓸리며 살았다. 이렇게 사는 게 맞은 걸까? 그래서 하루에도 수없이 내게 '인생의 정답'을 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 번 삐끗, 해보니 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격자무늬 속 세상은, 실은 아주 작은 우물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반드시 이 회사, 이 꿈, 이 일만 찾아서 가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생각이었는지를. 그리고 세상은 한 가지 이상으로 여러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때부터는 정답이 꼭 한 방향을 향해서만 나아갈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가령, 내가 작가로서 본업을 하면서도 스위치 한 번의 딸깍으로 아마추어 음악가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퇴근 후 새로운 취미를 통해 다른 세계에 젖어보기도 하고, 다양한 기록물을 남기면서 나만의 아카이브를 형성해볼 수도 있고, 그러다 그 일들이 본업이 될 수도 있었다.

가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 때는, 그 일에 조금 더 명확한 확신을 가졌으면 좋겠다. 어떻게든 하루하루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면, 그것들이 쌓여 내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꼭 네모 모양의 틀이 아니어도 된다. 우리는 동그라미가 될 수도, 세모가 될 수도, 별이 될 수도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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