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단상-이철호 칼럼니스트] 미완의 개혁군주 정조 아날로지적으로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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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이철호 칼럼니스트] 미완의 개혁군주 정조 아날로지적으로 바라보기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2.09.2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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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민신문] 나에게 투영되는 역사와 정치는 과거인 듯 현재의 모습이어서인지 유독 흥미롭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이 분야에 대한 관심과 독서는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 흔한 역사는 반복된다는 의미를 깊이 깨닫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낸 것 같다. 아둔함의 다른 표현이다. 역사의 명장면은 반복하고 대신 오욕의 역사는 피해야만 한다. 그런 것을 분별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라고 알고 있다. 역사의 결정적인 장면에 대한 유추의 힘을 지니지 못하였음은 공부가 서툴렀다는 뜻이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제대로 파악하고 받든다는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쉬운 일은 결코 아닌 것 같다.

인간의 지성을 믿는 표현들은 많다. 다른 포유류와 차별화된 사고 능력을 우선 고려했을 것이다. 인간 지성을 지칭하는 백미는 호모사피엔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이 생각만큼 지성적이거나 지혜롭지는 않았다. 아름답지 못한 역사가 늘 반복되는 것을 보면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비슷한 사물을 연관하여 사고하는 방식을 아날로지(Analogy)라고 한다. 일본 작가 사토 마사루는 이렇게 바라보는 역사관을 아날로지적 시각이라고 하였다. 그는 구태여 영어 발음 그대로 적고 있다. 지금은 비록 생소해 보이지만 과거 경험했던 상황과 유사하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냉정한 분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는 것이 아날로지적 사고력이라고 그는 기술했다. 역사의 장면을 포착하고 분별해내는 능력이 역사를 발전시킨다는 가르침을 주고 싶은 의도일 것이다.

정조대왕은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과 더불어 애민의 정신으로 시대를 선도한 조선의 위대한 군주 중 한 분이셨다. 자유분방한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그 피를 속일 순 없었다. 그러나, 어려서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한 이산이 할아버지 영조의 맘에 들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열 한 살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가 죽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밤낮 독서만으로 와신상담 감시의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리던 왕조의 모델 요순시대는 그런 와중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할아버지 영조의 치세를 이어 군왕의 자리에 오른다. 주변에는 대비 정순왕후를 위시한 온갖 적대세력이 호시탐탐 정조를 노리고 있었다. 아버지 태종이 선정의 토대를 닦아준 세종과는 정치상황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 불리한 조건을 딛고 조선의 성군으로 남게 된 것은 군왕 개인의 역량이 대단하였음을 말해준다. 정조는 영조대의 탕평책을 지속해야 했고 이를 발판으로 자신의 치세를 열어야 했다.

조선 오백년 역사에서 영정조대를 조선 르네상스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만한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영조가 준비한 것은 나름 많았다. 하지만 개혁다운 결과물은 꼽기 어렵다. 호포법, 균역법 등 몇몇 개혁프로그램들은 당시 기득권 노론 벽파에 의해 좌절되고 그나마 탕평책 정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탕평마저 제대로 시행되었다면 정조가 아버지 대신 왕위에 올랐겠는가? 정조가 왕위에 올라 뱉은 첫 일성이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말한 대목은 기득권에 대한 사실상의 선전포고와 다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덕사가 사도세자의 복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자 그를 능지처참으로 다스릴 정도로 용의주도하였다(그의 동생 이덕리는 형 때문에 20년 가까이 필자의 고향 진도에 유배되어 동다기, 상두지 등을 저술한 비운의 실학자이다). 시대가 좀 더 자유롭고 미래지향적이었다면 국운이 무한팽창하였을 것이다. 고리타분한 성리학으로 중무장한 노론 벽파라는 기득권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평민들의 삶과는 무관한 유학을 이들보다 더 깊이 공부해야만 했던 정조였다. 그런 에너지를 다산을 위시한 실학자들과 오롯이 함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개혁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는 문체반정으로 연암을 비롯한 신예들을 꾸짖는 것으로도 짐작해볼 수 있다.(그 장면에 대해서는 조금은 형식적이지 않았나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새로운 문물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대단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쉬운 것은 100년 전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처럼은 아니어도 연암의 열하일기나 동화 이해응의 계산기정(김미경 박사가 저자를 밝혀낸 이 여행기는 순조시절에 쓰여졌다) 등을 열독하며 세상의 변화를 체화했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던 것이 짧게는 한 시대의 아픔이었고 길게는 민족의 통곡이었다.

정조의 역사적 위치를 개혁적 보수로 보는 시각이 있다. 아마도 그가 추구했던 왕조의 모델 요순시대에서 답을 찾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자유분방한 유전자를 동시대가 허락할 만큼 여유로웠더라면 과거에 갇혀있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성리학 등 과거보다는 실학파와의 끈끈한 합 말이다. 조선 르네상스 영정조대는 76년이었다.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정조 사후 펼쳐진 반동의 시대는 순식간에 선대의 모든 업적을 뒤엎어 놓았다. 개인과 당파의 이익에만 눈이 먼 못난 것들에 의해서였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펼쳐본다. 자연스럽게 정조대왕 후대가 오버랩 된다. 낡은 기득권 세력들과 개혁을 펼쳐보려는 세력들 간의 쟁패가 해방 이후 80여 년간(정조대와 거의 비슷한 시간이다) 이어지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판을 엎는 일, 특히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판을 뒤집는 작업이 쉬울 리 없다. 정조시대를 바라보는 아날로지적 시각이 필요하다. 설마 위정자들이 그런 것도 모르는 동네 멍텅구리 바보형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듣고 보고 생각하는 선택적 인지와 확증편향이 시민들의 삶과 국가의 운명을 초라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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