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칼럼-김종수 목사] 아직도 라마, 팽목, 이태원에서 들려오는 슬픈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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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칼럼-김종수 목사] 아직도 라마, 팽목, 이태원에서 들려오는 슬픈 소리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3.03.3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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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목사 목포산돌교회

[목포시민신문] 마태복음에 의하면 헤롯대왕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반란으로 여겼다. 미가 예언자가 예언한 다스릴 자’(5:2)를 자기와 같은 힘에 의한 통치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살 아래 사내 아이를 모조리 죽이기에 이른 것이다(2:16). 마태는 이것을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내린 예언의 성취라고 보았다(2:17). 마태에 의해 인용된 예언은 예레미야 3115절이다(2:18).

나 주가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왜 아기 예수의 탄생에 이 예언이 나오는 것일까? 라마의 슬픈 소리, 라헬의 통곡은 그 이름만 들어봐도 다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데, 마태는 왜 이것을 인용한 것일까? 사실 이 예언이 나왔던 예레미야 시대와도 맞지 않는다. 예레미야가 이 예언을 한 것은 남왕국 유다의 멸망을 앞두고서이다.

한때 라마는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를 침공하여 장악한 곳이었고 거기에 성전까지 세웠었는데, 남왕국 유다가 당시 강대국인 시리아에게 엄청난 은과 금을 주고 동맹을 맺어 끝내 북왕국 이스라엘을 물리쳤던 곳이다. 동맹이란 공동의 적을 전제로 하는 계약이다. 마치 우리가 북한을 대적하기 위해 미국과 한미동맹을 맺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게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의 갈등의 중심부에 바로 이 라마가 있었던 것이다. 즉 라마는 전쟁으로 서로가 서로를 죽인 비극의 현장이었다.

그러니 이상한 일이다. 라마에서 들려오는 슬픈 소리는 기원전 721년 앗시리아에 의해 먼저 멸망당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들려왔던 비통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예레미야는 한참 전 사라진 북이스라엘의 패망을 거론하며 하나님의 위로의 신탁을 전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하나님이 허무한 아벨의 죽음처럼 스러진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아픔, 그로 인해 앗시리아로 강제 이주된 민족의 아픔의 소리를 듣고 계심을 말하려는 것이다. 아벨은 그 뜻이 허무.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생명을 허무하게 넘기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아벨을 죽인 가해자 가인에게 책임을 반드시 묻는 분이시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북이스라엘의 패망의 역사가 북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 다른 강대국과 동맹을 맺었던 남왕국 유다의 죄악과 무관하지 않으므로, 결국 남 왕국 유다의 멸망이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이어지는 비극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 북을 멸망시키기 위해 강대국과 동맹을 맺은 남왕국 유다, 아니 우리의 죄의 결과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한미연합훈련으로 북을 위협하고 있다.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잊고 있다. 이 훈련의 이름이 자유의 방패'(FS. Freedom Shield)라고 하는데 어처구니 없는 이름이다.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팍스 아메리카노’, 아메리키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결코 방패가 아니다. 오히려 총알받이로 돌아올 것이다.

라마에서 들려오는 슬픈 소리는 북왕국의 멸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 당시 유다의 멸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바벨론이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예레미야 역시 포로로 끌려가다가 바벨론 당국자들의 호의로 라마에서 풀려난 일이 있다(40:1). 아마도 라마는 유다 포로들을 바벨론으로 끌고가는 중간 집결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라마의 슬픈소리는 바벨론을 향해 포로로 떠나가는 동포들을 바라보면서 예언자 예레미야가 느꼈을 슬픔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김근주, 특강예레미야 참조). 그리고 지난 150년 전 북 이스라엘의 멸망이 바로 남 유다의 멸망을 뜻하는 것임을 알았으리라. 이것이 역사의식이다. 한미동맹이 구한말 조선과 일본의 병탄의 한 수순이라는 것을 예레미야는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 장면에서 어째서 라헬의 슬픔을 떠올렸을까? 라마와 라헬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야곱이 고향을 떠나 도망칠 때 하나님과 약속했던 벧엘로 돌아오는 데는 꽤 시간이 걸린다. 그 후 벧엘을 떠나 에브랏으로 가는 도중 그의 가장 사랑한 아내 라헬이 해산의 고통 속에서 숨지게 된다. 라헬은 고통 중에 낳은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내 슬픔의 아들)로 짓게 되는데, 이 이름은 야곱으로부터 나온 북왕국 이스라엘의 참혹한 멸망을 예견케 한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는 서술은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자식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식을 낳다가 자기 자신을 잃은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북이스라엘의 시조 할머니 라헬의 슬픔을 훗날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의도적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먼 훗날 자기 자손들인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자식을 잃은 것과 같은 슬픈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라헬은 죽어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묻혔다(35:20). 그리고 후에 마태가 예수님 당시 베들레헴에서 벌어진 유아학살에 라마의 통곡을 가져와 썼던 것이다. 벧엘과 베들레헴을 잇는 길에 있는 에브랏 근처에 라마가 있다. 라마의 슬픔과 벧엘과 에브랏의 울부짖음이 이렇게 연결된다.

전쟁은 승리조차도 비극이다. 죽음과 폐허만 남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보았지만 전쟁은 젊은이들의 죽음이다. 총칼을 맨 젊은 자식들의 죽음이다. 그리고 아이들과 여성의 죽음이다. 라마에서 들려오는 슬픈 소리는 젊은 자식들을 떠나보낸 북이스라엘의 통곡이고 지금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겪고 있는 남 유다의 슬픔이다. 그래서 전쟁은 모든 어머니인 라헬의 통곡이 된다. 그 사건들이 각각 개별의 사건들이 아닌 것이다. 역사는 반복이며, 예레미야는 이 비극의 역사들을 자신의 예언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라마의 소리는 앗시리아의 전쟁으로, 죽은 북이스라엘 젊은이들의 어머니들인 라헬들의 슬픈 통곡으로 반복된다. 그리고 마태에 이르러 아기 예수 탄생 때 죽어간 두 살 아래의 아기들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그 소리는 죽은 아기들의 어머니인 라헬의 슬픈 울음소리이다. 라마에서 들려온 슬픈 소리다. 그리고 오늘 그것은 팽목과 이태원에서 들려오는 애통의 소리이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를 듣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함께 견디어야 할 최소한의 애도이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이 애도가 없었다. 그저 책임을 피하려는 것뿐이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판사 출신 주무장관이 애도기간이 시작되자마자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인 건 아니며 경찰이나 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라는 말로 슬픔을 모독했다. 밤늦게까지 집에만 있었고 자정이 넘어서야 보고를 받았던 그의 모호한 동선이 그의 무책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들에게 라헬의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야권의 태도다. 촛불로 권력을 잡은 정당이 세월호 진상규명을 했는가? 가해자에 대한 책임을 물었는가? 제대로 된 처벌은 있었나? 그들은 마치 진상규명을 한 것처럼 마치 가해자를 처벌한 것처럼 목소리를 높인다. 자기 네 정당 대표를 지키기 위해 방탄 국회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것의 백분의 일만 애썼어도 세월호 진상과 함께 책임자 처벌은 벌써 끝났을 것이다. 두 정당은 그렇게 서로 적대적 동지다. 서로 권력을 주고 받기에 사이좋은 그들이다. 그들에게 라마의 슬픈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을 예레미야는 남왕국 유다의 멸망에서 왜 반복하여 말하고 있는가? 나아가 어찌하여 복음서 기자는 헤롯의 유아대량학살에 가져와 통곡하고 있는가? 예레미야는 통곡의 역사를 소환하였다. 마태도 그 뒤를 이었다. 오늘, 이 땅에 다시 라마에서 들려오는 슬픈 소리,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온다. 9년 전 팽목의 바다를 울리던 라헬의 울음소리가 아직 잦아들지 않았는데, 이태원에서 들려오는 비통한 소리에 온 땅이 운다.

위안부로 끌려간 딸들의 울음소리를 소환한다. 100년 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살당한 이들의 억울한 절규를 소환한다. 강제 징용의 고통 소리를 소환한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들의 한 서린 슬픈 소리를 소환한다. 빨갱이로 처형당한 제주, 여순의 넋 나간 아픈 소리를 소환한다. 폭도로 매도되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어간 5월 어머니들인 라헬의 통곡 소리를 소환한다. 망루에서 불타 죽어간 용산참사의 구슬픈 소리를 소환한다. 팽목의 통곡을 소환한다. 그리고 이태원의 슬픈 소리를 소환한다.

대통령은 이 와중에 자비로운(?) 결단으로 2018년 대법원의 전범 기업 배상 판결을 무시하고 강제징용 제 3자 변제 방식이라는 굴욕 외교의 길을 열어 놨다. 한일병탄은 여전히 유효하다. 라마의 슬픈 통곡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로 독립을 위해 애쓴 우리 선조들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래서 구한말 이 나라를 이런 식으로 팔아 넘겼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아주 미묘하고 적대적인 결합이지만 주연 국민의 힘이고 조연 민주당이다. 검찰총장에서 대통령에 이른다.

힘에 의한 평화는 가해자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지구의 멸망의 초침이 오늘을 가리키는데 아직도 힘 자랑으로 평화를 구축하려는 제국주의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의 줄서기를 대통령은 힘에 의한 평화라고 주장한다. 제발 역사의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라마의 슬픈 소리를 듣기 바란다. 제발 라헬의 가슴 아픈 통곡을 듣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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