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양세영 교수] 야마구찌 등 3곳 출신 재목포 일본인 다수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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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양세영 교수] 야마구찌 등 3곳 출신 재목포 일본인 다수 차지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3.04.20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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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영 세한대 교수(목포-일본 희망포럼 공동대표)
일제강점기 목포에 산 일본인의 삶 고찰

1897년 개항한 근대도시 목포는 아직도 그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만호동과 유달동 등을 중심으로 일본식 근대 건축물이 산재해 있다. 문화재청이 이곳에 근대역사문화공간 조성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면서 식민시대 일본인들이 살았던 가옥과 건축물이 주목을 받으면서 이곳에 살았던 일본인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가고 있다. 본지는 지난해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아 일제강점기 상흔왜곡된 삶 조선-일본인주제로 기획 보도를 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신문 기자와 하이쿠 시인으로 활동했던 일본인 무라카미 교시를 통해 당시 일본인들의 삶을 엿보았다. 세한대 양세영 교수가 최근 목포문화에 기고한 후 보완한 재목 일본인(在木 日本人)들에 대한 연구(硏究)와 교류재개(交流再開)의 필요성주제의 글을 본지에 3회에 거쳐 보도한다. <편집자주>

개항장서 이주해온 상인 목포 일본인 사회 형성

[목포시민신문] 재목포 일본인의 지역적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 이들의 정체성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개항 초기 목포 이주 일본인의 출신 지역은 1900년 기준, 나가사키(長崎) 223, 야마구찌(山口) 197, 사가(佐賀) 66, 오이타(大分) 43, 도쿄(東京) 35, 후쿠오까(福岡) 35, 오사카(大阪) 31명 등으로 분포한다. 부별(府別) 본적지에 대한 통계가 마지막으로 집계된 1909년 자료에 따르면 야마구찌(山口) 973, 나가사키(長崎) 820, 후쿠오까(福岡) 498, 구마모토(熊本) 398, 히로시마(廣島) 390, 오이타(大分) 324, 오카야마(岡山) 311명 등으로 나타난다. 나카사키, 후쿠오카 등 큐슈 출신자들이 여전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개항초기에 비해 히로시마, 오카야마 등 혼슈 남부지역 출신자들의 진출이 두드러지게 늘어났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도 야마구찌(山口), 나가사키(長崎), 후쿠오카(福岡) 출신이 재목포 일본인 구성에 있어 다수를 차지하는 추세가 지속되고 있는데 이는 전국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지리적인 근접성에서 찾을 수 있다. 동 지역들은 한국과 가까운 큐슈(九州)지역과 일본 서남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야마구찌현(山口縣)의 경우 기무라 겐지(木村健二, 1989)재조선 일본인(在朝日本人) 사회사(社会史)”에 따르면 에도막부의 해체 후 연공미 운송에 종사하던 자들이 생업을 잃고 다수가 조선으로 도항함에 따라 이주자의 규모가 컸다. 또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데라우치 마사다케 (寺內正毅) 등 식민지배 관련 인사들의 고향으로서 특유의 정한론(征韓論) 풍토가 영향을 미쳐 목포 뿐만 아니라 한국 각 지역으로 건너온 자들이 많았다. 특히, 죠슈목수(長州大工)라 불릴 정도로 다른 지역에 출장가서 집을 짓고 수입을 얻는 자들이 많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조선 개항에 따른 특수를 노리고 이주하였다.

나가사키(長崎縣)는 한국과 가까운데다 조선시대의 교류 창구였던 쓰시마번(對馬藩)이 속해 있다는 점도 역사적 배경으로 작용한다. 부산이 개항된 1876년에는 부산 거류 일본인의 대부분이 쓰시마 사람들이었다는 점도 참고할 만 하다.

재목포 일본인들은 직접 또는 제3국을 거쳐 이주해온 자들도 있지만, 상당수 이미 개항되었던 부산이나 인천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목포로 온 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일본이나 제3국에서 이주해 온 일본인들과 달리 다른 거류지에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목포 일본인 사회를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예컨대 재목포 일본인 거류민 5인방이라 할 수 있는 후쿠다 유조우(福田有造), 야마노 타기조(山野瀧三), 타카네 노부히로(高根信禮), 무라까미 나오스께(村上直助)는 모두 부산에서 이주해 온 자들이며, 기무라 다케오(木村健夫)는 인천에서 왔다. 특히 부산 거류 일본상인들이 초기 목포 상계를 주도해 나갔다. 이들은 당초 목포개항을 부산에서의 기존상권이 축소될 것으로 여겨 크게 반대하였으나, 개항이 결정되자 재빠르게 새로운 기회를 찾아 목포로 이주해 온 것이다.

후쿠다 유조우(福田有造)는 구마모토 현(熊本縣)출신으로 쓰시마(對馬島)를 기반으로 하는 후쿠다 가문(福田家)의 양자로 들어가 양부 후쿠다 마스베(福田増兵衛)로 부터 무역부문을 이어 받아 부산에서 활동하다 목포로 왔다. 목포 전등회사, 목포항운(木浦航運) 등 많은 사업에 참여하였고 목포상업회의소의 회두, 목포거류민회 의장 등을 역임한 자로서 그와 관련된 근대 건축물들이 지금도 유달초등학교 주변에 남아있다.

야마노 타기조(山野瀧三)는 야마구찌현(山口縣) 사람으로 1895년 부산에 건너와 거주하다 1897년 목포개항과 함께 이주, 목포해운()(木浦海運()) 사장을 비롯하여 조선면화, 조선제유 등 다양한 사업에 관여하였으며 그가 운영하던 회사건물이 아직도 남아있다(현재의 동아약국터)

타카네 노부히로(高根信禮)는 이바라기(茨城)현 출신으로 1897년 부산에서 목포로 건너와 오랫동안 목포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을 역임하며 사실상 목포 일본인 사회를 이끌었던 자로, 총독부 토지조사위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조선면화, 목포식산 등 사업에 참여하였다.

기무라 다케오(木村健夫)는 오사카(大阪) 출신으로 1889년 인천에 건너와 거주하다가, 1898년 목포로 이주하여 목포상업회의소 설립을 주도하여 1900년 창립이래 1921년까지 3차에 걸쳐 회두를 지낸 자다.

무라까미 나오스께(村上直助)야마구찌현(山口縣) 출신으로 1898년 부산에서 건너와 수입잡화점을 경영했다. 상공회의소 회두와 목포부회 의원을 지냈다. 목포근대역사관 아래 목포부립병원 관사(현재 카페로 이용중)로 알려진 건물의 소유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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