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서점 이주의 책] 한자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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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서점 이주의 책] 한자줍기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3.04.2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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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줍기

최다정 산문집, 아침달, 2023-01-31

[목포시민신문] 多情多感 다정다감:

마음이 섬세하고 느끼는 것이 풍부하다.”

유행일까. 최근 책방에 입고하고 있는 책의 제목들이 유난히 다정하다. 백수린의 <다정한 매일매일>이나 김혼비의 <다정 소감> 등은 이미 다정함의 고전이고, <다정한 것이 살아 남는다><무엇이 우리를 다정하게 만드는가> 등의 인간 심리를 연구한 뇌과학책도 있다. 시집, 소설, 동화 등에도 다정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다정함은 우리를 서로 연결해 주는 유대의 끈을 인식하고, 상대와의 유사성 및 동질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 세상이 살아 움직이고 있고,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협력하고, 상호 의존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합니다.”

이런 진술을 하고 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올가 토카르추크의 산문집 제목도 <다정한 서술자>이다. 다정에 이끌려 대부분의 책들을 유의미하게 읽었다. 다정에 대한 과학적 고찰도 흥미로웠다.

그런 와중에 한자어를 다룬 다정한 책이 등장했다. <한자줍기>는 다정을 내세운 제목이 아니지만 多情多感 다정다감의 뜻을 풀이해 표지에 넣음으로써 책의 정체성을 다정하게 드러냈다. 게다가 저자의 이름까지! 고전번역을 공부하고 있는 젊은 학자가 건네는 다정하고 다감한 한자의 세계(부제)’도 다정을 거든다. 이조년의 싯구절 다정도 병인 양하여가 떠올라 피식 웃으며 책장을 펼쳤다. 아니나 다를까. 같은 제목의 산문이 있었다. 저자의 이름처럼 다정해서 생기는 피로감이랄까 버거움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하여 이렇게 끝맺는다.

그런데 아주 가끔은, 다정에 다정이 약이 될 때도 있다. 받은 편지를 불빛에 비춰보다가 볼펜으로 쓴 글자 아래 연필 자국과 지우개 가루를 발견할 때, 공원을 산책하다 눈이 마주친 어린아이가 자기 손에 있던 따뜻한 사탕을 내 손에 쥐여주고 갈 때, 감각의 촉이 여럿인 사람의 아름다운 글을 만나 공감할 때, 다정을 미워하며 심술부리던 마음은 단숨에 무색해진다. 나의 다정도 누군가에게 약이 되었을지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결국은 다정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한자줍기>는 저자가 한문을 공부하며 모르는 한자나 특별한 의미를 포착한 한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적어두는 수첩의 제목이었다고 한다. 수시로 하나씩 주워 모은 한자들을 꺼내어 한 편 한 편 글로 써내려갔고 마침내 한 권의 산문집이 되었다. 놀랍다. 한자가 이토록 다정한 언어였다니. 어려운 한자를 써가며 어려운 고전의 세계를 말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저자는 나무 이라는 글자가 지닌 생의 언어 속으로 꾸역꾸역 들어가 삶을 끌어 안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일기 같기도 하고, 때로는 한자 풀이 같기도 하고, 고전 문학의 해설 같기도 한 다정한 책. 다정도 병인 양하여 책 못 덮어 하노라.

-동네산책 책방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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