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양세영 세한대 교수] 재목 일본인 연구로 목포‧일본 교류 새 지평 개척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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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양세영 세한대 교수] 재목 일본인 연구로 목포‧일본 교류 새 지평 개척 필요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3.04.2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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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지주, 관공서와 교사, 문화‧지역 활동 인사 등 분류
일제강점기 목포에 산 일본인의 삶 고찰

1897년 개항한 근대도시 목포는 아직도 그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만호동과 유달동 등을 중심으로 일본식 근대 건축물이 산재해 있다. 문화재청이 이곳에 근대역사문화공간 조성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면서 식민시대 일본인들이 살았던 가옥과 건축물이 주목을 받으면서 이곳에 살았던 일본인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가고 있다. 본지는 지난해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아 일제강점기 상흔왜곡된 삶 조선-일본인주제로 기획 보도를 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신문 기자와 하이쿠 시인으로 활동했던 일본인 무라카미 교시를 통해 당시 일본인들의 삶을 엿보았다. 세한대 양세영 교수가 최근 목포문화에 기고한 후 보완한 재목 일본인(在木 日本人)들에 대한 연구(硏究)와 교류재개(交流再開)의 필요성주제의 글을 본지에 3회에 거쳐 보도한다. <편집자주>

[목포시민신문] 재목포 일본인 사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주요 인물들은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영사관(이후 부청) 및 세관에 종사한 관리, 은행 및 동척(東拓)과 같은 통치 보조기구 종사자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 계층으로 근무지 이동에 따라 목포에 거주한 기간이 짧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본격적인 식민 지배의 전면에 서서 활동했다는 근본적 특성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은 영사를 지낸 히사미즈 사부로(久水三郎), 와까마쓰 도사부로(若松兎三郎) 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와까마쓰 도사부로는 육지면을 처음으로 고하도에 가져와 재배함으로서 면화의 목포가 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김충식 가천대 부총장이 2015년 저술한 목화꽃과 그 일본인에 따르면 와까마쓰 도사부로(若松兎三郎)는 오이타현 출신으로 면화 외에 천일염 제조 등에서도 목포지역과 관련이 깊다고 한다. 또한, 기독교인으로서 귀국 후 교토에서 거주하며 재일 한국인들의 권익보호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그러나, 식민 지배에 앞장섰다는 기본 특성은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상인 및 지주 계층으로서 이들은 개항과 식민통치를 기회로 활용하여 부를 축적한 자들로서 일제 지배층과 상호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사익을 추구했던 성격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들은 앞에 나왔던 5인방 외에도 우찌다니 만뻬이(內谷萬平)와 나까미치 세이타로(中道淸太郞) 등을 들 수 있다. 우찌다니 만뻬이는 효고현(兵庫) 출신으로 한때 남한지역 제 1의 거부로도 알려진 대지주였고 현재의 이훈동 정원을 소유했던 자이며, 나까미치 세이타로는 가고시마현(鹿兒島縣) 출신으로 목포세관 근무를 위해 왔다가 지주로 변신하여 1930년대 목포에서 전남지역의 땅을 가장 많이 보유했던 자로 알려져 있다.

셋째, 문화 및 지역사회 인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은 매우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으며 직접적인 식민 통치와는 거리가 있으나 간접적으로 관여하거나, 식민지배를 당연히 여긴 것은 공통점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일제의 군국주의나 통치방식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교육이나 문화활동의 영역에서 이를 표출하거나 지역사회 활동 등을 통해 조선인 목포 주민들의 입장에 서기도 한 극소수의 인물들이 존재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기자이자 하이쿠(俳句) 시인이었던 무라까미 교시(村上杏史)와 공생원을 운영했던 다우찌 치츠코(田內千鶴子, 尹鶴子), 일본기독교회 초대목사였던 다께우찌 토라야(竹內虎也), 목포상업 교사로서 김대중 대통령의 담임선생을 했고 전후(戰後) () 우루과이 대사를 지낸 무쿠모토 이사부로(椋本伊三) 등을 들 수 있다.

최근에 알려지게 된 무라까미 교시(村上杏史)는 에히메현(愛媛) 출신으로 가족과 함께 목포로 이주하였고 목포 신보 기자로 근무하면서 국내 하이쿠 시인으로 명성이 높던 목포 출신 박노식의 영향으로 하이쿠에 입문하여 활동하였다. 일본 귀국 후에 전국 목포회에서 활동하면서 하이쿠 작품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목포에서의 추억을 소재로 한 작품을 쓰기도 하였으며 1982년에는 박노식 작품집을 발간하여 국내에 알리는 역할을 하는 등 목포 지역사회와 감성적인 유대의식이 큰 문화 인물이다.

재목 일본인 2세대들의 경우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 현 유달초등학교), 목포고녀(木浦高女, 현 목포여중), 목포상업학교(현 목상고등학교)를 통해 성장하였으며, 이들 학교를 중심으로 나중에 핵심적인 관계망을 형성하게 된다.

특히 목포상업은 경성중(京城中)이나 광주중, 경성사범과 같은 상급학교나 교사 양성기관에 진학하지 않은 일인들에게는 사회로 나가기 위한 최종 수학기관으로 졸업 후에는 국내는 물론 일본내에서도 금융기관 진출자들이 많았다. -일수교 이후 목포상업 동문이나 교장단이 일본에 방문할 경우 일본내 목상 네트워크가 가는 곳마다 긴밀하게 움직여 동행했던 타학교 출신자들이 감탄할 정도로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1963-1968년 목포상고 교장을 역임했던 양회종의 회고록). 이들 학교 출신자들은 한일수교 이후 지속적으로 방문하여 자신들이 수업했던 학교 건물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추억을 회상했다고 한다. 당시 목포 주민들과 해당 학교 관계자들은 이들과의 교류를 이어가려는 체계적인 접근을 고려하기보다는 대부분 그저 기이한 일로 여기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이제 그러한 발검음마저 멈추어졌다.

이러한 재목포 일본인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분적이고 일천한 수준이다. 보다 철저한 기초사료 확보와 데이터 베이스화 작업이 시급하다. 이를 바탕으로 목포 관련 일본인들에 대한 콘텐츠를 확보하고, 비록 늦었지만 목포-일본간의 건설적인 교류확대를 위해 그 후손 및 관계자, 관련 지역인사들과의 네트워크를 재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단순히 연고관계의 복원에서 끝나서는 안되고 이를 통해 전체 일본과 일본인 속으로 목포가 연결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교류사업으로 윤학자 여사와 다께우찌 목사의 고향이 고치현(高知縣)이고, 무라까미 교시의 고향이 그 바로 옆인 에히메현(愛媛縣), 와까마쓰 도사부로의 고향이 오이타현(大分縣)이라는 점을 착안하여 이들 지역과 목포간 문화-관광교류 프로그램 개발한다면 좋을 것 같다. 단순한 아이디어 수준이 아니라, 이미 무라까미 교시를 기리는 에히메현 하이구 동호인들이 목포방문 의사를 전달해 왔고, 목포-일본 희망포럼이 이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또한, 공생원의 존재는 향후 목포-일본간 교류를 발전시키는데 있어 매우 소중한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과 일본의 민간교류가 나아갈 방향에 있어 공생이라는 그 이름이 뜻하듯 상징성이 크고, 실제로 지난 100여년 동안 그러한 사업을 추진해 오며 한-일간의 世紀를 넘는 사랑의 架橋를 가꾸어 왔기 떄문이다. 윤학자여사와 공생원에 대한 지원을 위해 어두운 식민지 시절 한국에서 살았던 일본인들 중 거의 유일하게 전국 목포회라는 지역모임을 조직하다 싶이 했고 이후 꾸준하게 활동해왔던 것을 보면 재목포 일본인들은 목포라는 공통분모를 근거로 공생원후원이라는 의미있는 활동을 통해 과거의 아픈 역사에서 벗어나고자 손을 내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동안 너무도 많이 시간이 흘렀지만 이제 우리가 미래의 희망을 위해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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