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목포의 아픈역사 기억하기②]두 번의 집단 탈옥 그리고 해방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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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목포의 아픈역사 기억하기②]두 번의 집단 탈옥 그리고 해방불명
  • 김영준
  • 승인 2023.05.18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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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9월 14일 400여명 탈옥 후 ‘집단처형’ 추정
1950년 9월 28일 220여명 탈옥… 김대중 구사일생
목포형무소 수형인명부 4.3 관련자 671명으로 수록
6·25전쟁 전후 목포서 ‘제주4·3’ 400여명 행방불명
목포의 아픈 역사 기억하기

본지는 해방 전후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목포에서 발생했으나 묻혀진 과거사를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관한 숙제를 지역에 던지고자 기획보도한다.

목포를 흔히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부른다. 일제강점기를 관통한 근대의 역사적 경험과 유산이 지금 목포의 강점이다. 하지만 근대 일제강점기의 건물과 흔적에만 집중돼 있지, 이후 근현대의 아픈 역사나 숨기고 싶은 사건은 조명받지 못한 채 사건의 실체는 심지어 묻혀 있는 것도 있다. 너무 적은 기록 그리고 묻힌 채 사라지는 과거사를 발굴 정리해, 지금 어떻게 기억할지 방법론을 찾는 후속 작업의 토대로 삼는다. <편집자 주>

<글 게재 순서>

사라지는 그날의 현장1 : 묻힌 목포 민간학살

사라지는 그날의 현장2 : 살고자 탈옥한다. 목포형무소에 수감된 제주4.3

사라지는 그날의 현장3 : 행방불명된 감화원 목포학원 소년범들

사라지는 그날의 현장4 : 잊혀진, 물로 배 채운 부두노동자파업 흔적 찾기

왜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걸어야 하나? : 목포의 다크투어 필요성과 현 주소

아픈 역사 기억하기, 그 방법부터 배우자1- 제주43 평화공원과 평화재단

아픈 역사 기억하기, 그 방법부터 배우자2- 두 번째 홀로코스트 추모비 건립한 비엔나

또 하나의 다크투어, 9년째 고하도 세월호 지키는 사람들이 말하는 기억하기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수가 공개한 1950년 7월 공주 학살 현장.
이 사진은 영국 픽처포스트(Picture Post)지에 실린 것으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공주에서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수백 명이 집단학살됐다.

[목포시민신문] #목포서 파옥소동(광주지국 특전)= 14일 오후 530분경 목포형무소 13백여명에 달하는 죄수들은 돌연 폭동을 일으키어 파옥 탈출을 감행하는 일방 무기창고를 파괴하고 총기와 탄약을 약탈하고 방금 군경부대와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고 있는데 아직 인명피해에 대하여서는 알 수 없다.

#후문을 파괴탈옥사건의 경위(목포발)= 목포형무소 죄수들의 탈옥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4일 하오 510분경 작업을 끝마친 미결수들이 저녁밥을 마치고 감방에 들어 갈려고 할 무렵에 돌연 약 4백여명의 죄수들이 봉기하여 무기창고를 습격한 다음 약간의 무기를 탈취 뒷문을 파괴하고 형무소로부터 약 20키로 가량 떨어진 이로산을 넘어 무안군 일로면 방면으로 도주하였다한다. 이 급보에 접한 경찰당국에서는 삼엄한 경계 아래 이를 추적하여 포위작전을 전개하고 있는데 완전한 진압은 시간문제이라 하며 피해상황은 목하 미상이라 한다. 한편 동형무소에는 1천여명의 죄수가 수감되어 있었다한다.

#팔십명을 사살 체포(광주발)= 목포형무소에서 대규모의 탈옥사건이 발생한 동일 하오 10시 현재 그중 팔십명을 사살 또는 체포하고 그들이 탈거하였던 무기 오정을 탈환하였다한다. 그런데 그들 탈옥수의 대부분은 지난번 제주도 반란사건으로 복역 중에 있던 장기수이라 하며 사건발생과 동시에 광주에서는 경찰응원부대가 급거 현지에 출동하여 협력하고 있는데 목포시내는 평온하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9916일자>

“1949915일 산정동에 위치해 있던 목포형무소를 수형인 약 4백여 명이 탈옥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무안, 함평 방면으로 도주하였는데 경찰과 군은 이들을 추적했으며, 대한청년단과 우익청년, 학생들도 합세했다. 그 결과 85명이 체포되었고 약 300여 명이 사살됐다.”

2017년 발간된 목포시사에 기록된 정기조(89) 옹의 증언이다. 당시 목포중학교 3학년이던 정기조 옹은 우리 집(양동 거주) 옆으로 탈옥죄수를 붙잡아 끌고 가는 모습이라니. 온 얼굴이 박살난 듯 피투성이인 체 잡혀가는데 너무나 처참해서 지금도 생생하네요. 이때는 시국이 매우 불안하던 때입니다. 당국에서는 불온분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 집 대문에다 빨강색 동그라미나 네모 모양을 칠했어요. 그런 사람들 집 앞에다 탈옥수들 데려다 놓고 한밤 중에 총으로 죽이고 가마니로 덮어 놨어. 아침에 학교가면서 보면은 개가 가면서 핥아먹고 그랬어. 목포 탈옥 사건 때 죄수들이 그렇게 죽었어.”

제주 4.3항쟁 관련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던 생존자의 증언도 있다. 김두황(1926년 출생) 씨는 4.3항쟁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제주 사람을 마구 죽이고 잡아가던 시절인 194812월 김씨도 잡혀가 고문을 당했고 목포향무소에 수감됐다.

형무소는 터질 듯 붐볐다. 수백명이 들어가는 목포형무소에는 1400여명이 갇혀 있었다. 견디다 못한 재소자 500여명이 감옥을 부수고 탈주한 날이 1949914. 첫째 원인은 죄수들에게 대우를 잘못한 점이다. 잘 때도 누울 처지가 아니었다. 기왕 죽을 바에는 어떠한 일이든 하자고 해서 이런 일을 한 것 같다. 탈주자 대부분은 사살 당했다. 남아있던 사람 상당수도 훗날 감옥에서 죽임을 당했다.” 탈주에 가담하지 않았고 전쟁 직전에 출소한 김씨는 제주에 돌아왔다. 살아서 당시의 일을 2006년에 증언했다.

헌정 사상 미증유의 탈옥사건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창립 7주년을 맞아 20068월에 연 완전한 4.3해결을 위한 도민토론회- 4.3 1949년 목포형무소 탈옥사건내용이다.

1949년 대한민국 헌정 사상 미증유의 탈옥사건이 발생했다. 목포형무소에서 413명이 한꺼번에 탈옥한 사건이 그것이다. 1949914일 오후 5시경 목포형무소에서 수형중인 재소자들이 무기고에서 소총 19정과 실탄 300발을 탈취해 탈옥했다. 이 사건으로 탈옥 수형인 298명이 사살됐고, 형무관도 6명이 사망했다.

당시 당국은 탈옥사건을 "대부분의 탈옥자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으로 복역중에 있던 정치범"이라거나 "주동자는 제주도 반란사건에 참가했던 장기수"라고 밝혔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당시 4.3연구소의 박찬식 연구실장과 목포시청 김양희 학예연구사는 '목포형무소 집단탈옥사건'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목포형무소 수형인 중 제주출신 400여명의 행방이 확인되지 않아 진상규명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그 토론회에서 박찬식 연구실장은 ‘4.3 관련 목포형무소 재소자의 행방에 대한 조사 결과란 발제에서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목포형무소 탈옥자 명부를 공개했다.

박 실장은 1949년 당시 목포형무소에는 4.3 관련 수형인이 일반재판 120여명, 군법에 의한 수형인 466명 등 총 600여명이 있었다고 밝혔다. 박 실장은 "1949년 탈옥사건 당시 정부는 주동자가 제주도 반란사건에 참여했던 수형인이라고 밝혔었다""하지만 탈옥자 명부에 기재된 4.3 관련 제주출신은 52명에 불과해 과연 이런 인원을 가지고 탈옥자 대부분을 제주출신으로 단정한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박 실장은 더욱 큰 문제점으로 한국전쟁 이후 제주출신 수형인 400여명의 행방이 형행서류상에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행형자료를 통해 행방이 확인된 재소자는 일반재판 수형인 105, 군법회의 수형인 98명 등 203명에 불과하다""400명 가까운 수의 재소자 행방이 행형서류상에도 확인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박 실장은 "더욱 심각한 것은 90명 정도의 출소자를 제외하고는 탈옥사건 피살자나 한국전쟁 직후 피살자의 경우에도 사망 통보도 없었고, 시신처리 등에 대한 정보를 누구도 갖고 있지 않아 어느 누구도 행방을 알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당시 목포시청에 근무하던 김양희 학예사는 '1949년 목포형무소 집단탈옥사건 연구' 발제에서 "목포형무소 수형인명부에 4.3항쟁 관련자가 총 671명으로 수록돼 있다""1948년 수감자가 456, 49년이 215"이라고 밝혔다.

김 학예사는 "법무부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목포형무소를 비롯해 부천.춘천.청주.광주형무소에 수감 중인 대부분의 재소자들을 일시 석방했다고 밝히고 있다""하지만 법무부가 기록하고 있는 '일시 석방'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김 학예사는 "법무부에서 발표한 '일시 석방'은 집단 처형을 의미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광주형무소의 경우 정치범들이 집단 처형된 것은 19507월경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 학예사는 "목포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들은 1949년 집단 탈옥사건 당시 1차적으로 숙청됐다""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한번 집단 처형이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양동윤 제주4.3도민연대 대표는 전국 13곳의 형무소 가운데 행방불명 수형인 가장 많다. 한국전쟁 전후로 수장됐다는 증언도 있고, 소리소문없이 끌려가서 총살당했다는 소문도 있다“4.3 당시 지옥과도 같았던 여러 형무소 실태나 행방불명자들의 비극은 여전히 진상규명 과정에 다뤄지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6.25 전쟁 발발 이후 집단 탈옥

전국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관련, 진실화해위원회 2021년 하반기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목포형무소는 6.25 전쟁 당시 1,000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좌익사범에 대한 처리 기록은 보이지 않는데,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응한 형무소 간수의 증언에 따르면 대한민국 법무부에서 "사상범은 군에 인계하고, 잡범은 석방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 직후 소속 미상의 군인들이 좌익사범들을 트럭에 싣고 가 사라졌는데 아마 이들은 목포 인근 바다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화해위는 피학살자 유족들의 진상규명 건의 중 39건을 확인했다.

1950928일 목포형무소에서 또다시 집단 탈옥사건이 발생했다. 목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김대중 대통령 연보에 따르면 1950625일 당시 경기여고 뒤쪽에 있던 림()여관에서 단기 투숙하고 있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음을 알게 된다. 1950720일 처남 차원식, 한도원 등 지인 67명과 함께 보름여에 걸쳐 목포로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1950810일 목포에 도착한 이후 선장 박동연의 집에 숨어지낸 지 2일 만에 공산군에 발각되어 체포됐다. 1950810일 체포 이후 조사를 받고 8월 말경 목포형무소로 이감되다(죄수번호 202). 1950928일 목포형무소에서 탈옥사건이 발생하여 탈출한 220명 중에서 김대중을 포함한 80여 명이 살아남았다. 1950928일 그 이후 공산군 잔당에 의해 자행되던 학살을 피해 숨어지내다가 103일경 해병대가 목포에 진주한 시점을 계기로 활동을 재개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1940년대 목포형무소 전경.

당시 신문자료를 통해 본 목포형무소 탈옥사건 일지

1949914일 오후 530분경= 작업을 마친 미결수들이 저녁밥을 마치고 감방에 들어갈 무렵 약 4백여명의 수형자들이 봉기하여 무기창고를 습격하고 탈옥한 사건 발생. 오후 10시 현재 탈옥수 80여명을 사살 또는 체포. 광주에서 경찰응원부대 급거 목포에 도착.

1949915일 정오= 함평군 석성리에서 탈옥수 2명 체포되고 오후 2시 무안군 청계면에서 탈옥사건 주범 서기오 체포.

1949915일 오후 2= 군경합동작전사령부 그간의 전과 및 무장죄수 추격작전의 전과 발표.

1949917= 목포시내 비상경계 실시, 오전 2시부터 10시까지 가가호호 검색, 주모자 김두주() 체포.

19499171220= 목포에 온 법무부 윤용섭 형정국장 탈옥사건 원인에 대해 기자회견.

1949919= 육군보도과 전과 발표 : 사살 52, 포로 2, 소총 9, 992정 등 실탄, 436발 카-6, 실탄 36. 아방손해 전사 18, 부상자 8.

1949920일 오전 1130= 광주검찰청 목포지청장 윤무준 기자회견.

1949921= 권승렬 법무부장관, 목포형무소사건 수습상황과 인권옹호 문제 등에 대하여 담화.

1949922일 오후 9= 해군목포경비부 사령관 정경모 특별방송.

1949924= 목포경찰 발표 : 탈옥수 413명 중 체포 85, 사살 298, 자수자 10, 미체포 23, 총기회수 10.

1949117= 목포법원 직원 10명 남로당 활동과 목포형무소 탈옥사건 관련 혐의로 체포.

19491117일 오후 2= 탈옥사건 순직 형무관 6명에 대한 위령제가 목포형무소에서 열림.

동아일보 1949916·20·26일자, 1116일자/ 호남일보 1949920·25일자, 1113일자/ 경향신문 19491028일자/ 한성일보 1949921/ 조선일보 1949922일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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