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단상-조기호 시인] 이타행(利他行), 그 사전적 의미만을 곱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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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조기호 시인] 이타행(利他行), 그 사전적 의미만을 곱씹다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3.06.0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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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호 컬럼니스트

[목포시민신문] 산책을 다녀오던 아내가 아파트 입구에서 주웠다고 쪼그만 지갑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에고, 그냥 냅두지 뭐하러 주워왔어!” 대뜸 내 입에서 나온 말이 그랬다. 아내는 길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누군가가 주어갈 것 같아서 일단 주워서 연락처를 찾았는데 알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쩌지 못하고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때 언젠가 뉴스에서 보았던 사건이 떠올랐다. 택시 운전사가 손님이 두고 내린 지갑을 파출소에 가져다주었는데 주인이 찾아와 지갑속의 돈이 모자란다고 하여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괜한 일에 끼어들어 아내가 망신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아내가 바보스러웠다.

우리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를 잘 돌보며 살아야하되 이웃과 함께 슬픔과 기쁨을 서로 나누며 돕고 살라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 삶이란 모름지기 利己가 아니라 利他의 선과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한가? 자기의 이익과 편리만을 앞세우고 이해관계로서만 타협하고, 게다가 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불신의 풍조가 팽배하여 사회를 이루는 共同善의 가치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말하자면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이 상실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곧 웃어른이나 스승을 공경하는 위계의 문제, 대립과 불화의 이견을 조율하는 화합과 상호소통의 문제, 그리고 가난과 아픔을 함께하는 나눔과 베품의 문제 등 그 밖의 여러 사회문제들을 마침내 개개인의 욕심만으로 덧씌운 편협하고 몰지각한 利慾의 행태들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난감한 것이 不信의 만연이다. 도무지 그 누구도 믿지를 못하겠다는 세상이다. 어쩌면 사람이 무서워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니 얼마나 서글픈 세상인가. 내가 너를 믿지 못하고 네가 나를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 세상을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울타리가 허술했고 대문이 늘 반쯤은 열려있던 그리고 동네 한가운데 너른 마당이 있어서 앞집 뒷집 친구 동생 형들이 해가 질 무렵까지도 한데 어울리며 얼싸절싸 함께 뛰어놀았던 옛날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가난했지만 즐거웠고 가진 것 없었지만 베풀 수 있는 것이 많았던 그때, 거기에는 우리라는 공동의 이름이 있었고 그것으로 나눌 수 있었던 따뜻한 정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不信은 고립을 자초한다. 따라서 그 누구와도 소통하기를 거부하게 된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비롯하여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는 손해를 본다는 몸보신 형태의 사회적 무관심이 이미 각 가정에 자리 잡은 지가 오래전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선행과 덕행, 좋은 뜻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안 좋은 뜻으로 낙인찍히는 순간, 그것은 아무리 좋은 뜻이었다 할지라도 곧장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안될 뜻밖의 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인 것이다.

언젠가 거리를 지나가다가 할머니 한 분이 양손에 짐꾸러미를 들고 가는 것을 보고 그것을 거들어주려고 했다가 무색하게 퇴짜(?)를 맞은 적이 있었다. 아마 그 할머니는 나에게 불안하게 짐을 맡기고 걷느니 차라리 힘들어도 마음 편하게 혼자 들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기분이(도둑처럼) 미묘했지만 그 분의 마음을 헤아리자 내가 잘못했구나 싶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나는 그런 불편한 장면을 만나면 조용히 피하려고 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을 만나도 예전에는 슬며시 웃고 가벼운 대화도 건넸었지만 그 후 부터는 무심히 용무를 보는 사람처럼 말없이 천정을 바라보며 오르내릴 뿐이다. 웃는 것도 자칫 희롱 죄목이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도 상기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법정스님은 끊임없이 남을 돕고 남의 어려움을 살피며 내 이웃의 행복을 위해 마음을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함부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세상도 못된다.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려면 먼저 상대방의 눈치를 보고 의견을 묻고 허락을 받아만 가능하게 되었으니 세상의 사랑과 선행들이 도리어 의심받고 내팽개쳐지는 오늘의 이 세태란 얼마나 불행하고 슬픈 일인가.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내가 주운 지갑을 들고 인근 파출소로 향하여야 했다. 아내는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연신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따라와 파출소로 들어갔다, 나는 밖에서 기다렸고 한참 후 아내가 웃으며 나왔다. “주인이 끝내 나타나지 않으면 주운 돈 만원을 나한테 돌려준다기에 그냥 안 받는다고 사인하고 나왔어요.” 아내의 목소리가 새장에서 풀려나온 새처럼 가벼웠다. 그날, 나는 돌아오는 차 속에서 씁쓸하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타행(利他行)’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곱씹으며 아내에게 한마디를 당부하였다. “잘했어요, 근데 다음부터는 조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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