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목포의 아픈역사 기억하기④]“제대로 된 임금 달라” 물로 배 채운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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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목포의 아픈역사 기억하기④]“제대로 된 임금 달라” 물로 배 채운 노동자들
  • 김영준
  • 승인 2023.06.15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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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1903년 전국 최초로 들고일어난 동맹파업
임금투쟁서 반제국주의로 발전한 부두노동자 투쟁
동학정신은 목포의 부두노동자들에게 이어져 항일
목포의 아픈 역사 기억하기 기획보도

본지는 해방 전후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목포에서 발생했으나 묻혀진 과거사를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관한 숙제를 지역에 던지고자 기획보도한다목포를 흔히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부른다. 일제강점기를 관통한 근대의 역사적 경험과 유산이 지금 목포의 강점이다. 하지만 근대 일제강점기의 건물과 흔적에만 집중돼 있지, 이후 근현대의 아픈 역사나 숨기고 싶은 사건은 조명받지 못한 채 사건의 실체는 심지어 묻혀 있는 것도 있다. 너무 적은 기록 그리고 묻힌 채 사라지는 과거사를 발굴 정리해, 지금 어떻게 기억할지 방법론을 찾는 후속 작업의 토대로 삼는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사라지는 그날의 현장1 : 묻힌 목포 민간학살

사라지는 그날의 현장2 : 살고자 탈옥한다. 목포형무소에 수감된 제주4.3

사라지는 그날의 현장3 : 행방불명된 감화원 목포학원 소년범들

사라지는 그날의 현장4 : 잊혀진, 물로 배 채운 부두노동자파업 흔적 찾기

왜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걸어야 하나? : 목포의 다크투어 필요성과 현주소

또 하나의 다크투어, 9년째 고하도 세월호 지키는 사람들이 말하는 기억하기

아픈 역사 기억하기, 그 방법부터 배우자1- 제주43 평화공원과 평화재단

아픈 역사 기억하기, 그 방법부터 배우자2- 두 번째 홀로코스트 추모비 건립한 비엔나

개항기 부두 노역자들

[목포시민신문] "목포부두노동자동맹파업은 1898년 목포항에서 일어난 노동자의 동맹 파업이다. 동맹파업으로는 전국 최초로 일어난 것이었으며 일본 자본가들을 대상으로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당시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노동에 시달렸음에도 제대로 된 임금을 받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해 항의했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가 2004419일자 한겨레에 기고한 좌파투쟁, 진보운동 양면거울에는 이같이 정의했다.

“1903년까지 일어난 동맹파업은 점심을 물로 채웠던 노동자들이 주민과 함께 항거한 것으로서 초보적 노동자들의 항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역사학 연구소가 발행한 서해문집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82쪽에 기록하고 있다.

1913년에 간행된 목포지는 목포항에서 최초의 동맹파업은 개항 후 5개월 째인 18982월 일본인 등이 매일 사역하는 한국인 인부의 임금에 대해 임금지불 및 청구방법을 통일하려는 일본인 자본가의 협정에 반대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동투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농촌에서 떠나온 노동자들= 목포항은 부산과 원산, 인천에 이어 189710월에 네 번째로 개항했다. 목포는 신의주로 이어지는 1번 국도와 부산으로 이어지는 2호선이 시작되는 곳이며 서울까지 이어지는 호남선이 끝나는 곳이기도 하다.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의도에 따라 식민지적 기형 체제가 들어오면서 면화가 들어오게 된다. 개항한 목포항도 각 개항장의 물동량 증대에 따른 항 자체의 성장이 가속화됐으며 특별히 근대적 노동자의 개념이 없던 시대에 노동자로서의 개념이 등장했다.

개항과 함께 해운업이 확대되면서 짐을 싸고, 배에 싣고 내리고 옮기는 부두노동자도 늘어났다. 농촌에서 떠나온 부두노동자들은 외국인 상업자본가에 고용돼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임금을 받는 임금노동자였다.

부두노동자들은 같은 작업을 하는 고향 사람끼리 '도중(都中)'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노동력을 팔았다. 도중의 책임자는 '십장'이었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하수인인 노동청부업자들을 내세워 십장과 계약을 맺고 부두노동자들을 고용했다.

임금삭감 맞서 일본인거주지 봉쇄= 목포항이 개항한지 5개월도 안되는 18982월과 몇 달 후인 9, 목포 부두노동자들은 투쟁에 나섰다. 일본인 자본가들과 고용 청부업자들은 농한기에 일거리를 찾아 부두로 나온 농민들을 끌어들여 부두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으려 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도중'을 중심으로 싸움에 나섰다. 노동자들은 조선인들이 사는 곳과 일본인 거류지 사이의 교통을 막고, 조선상인들이 일본인 거류지 출입을 막으며 상행위를 금지시켰다. 부두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하여 착취를 막아낸 셈이다.

19011월엔 일본인 상업회의소가 "비싼 노임이 무역 발달을 저해한다"며 부두노동자의 임금을 2030% 깎으려고 했다. 일본인 노동청부업자들은 임금인하에 따른 손해를 조선노동자들에게 떠 넘겼다. 분노한 조선노동자들은 오히려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3월까지 싸워 임금삭감을 막았다.

19038, 목포 부두노동자들은 '반십장 운동'에 나섰다. 십장은 일자리 알선 대가로 임금의 10%를 소개비로 뜯어 왔는데, 그것을 20%로 올리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부두노동자들은 이제 십장이 자신들의 대변자가 아닌 중간착취자임을 깨달았다. 노동자들은 십장 수취율 인상을 반대하고 십장제 폐지 요구까지 나아갔다. 궁지에 몰린 십장들은 일본인 자본가·일본인 순사들과 한 패가 돼 '일본패'를 차도록 강요하며 부두노동자들을 탄압했다. 1116일 조선노동자들은 "우리들은 모두 대한 인민이다. 우리는 감리서가 만든 패를 찰 수 있을 뿐, 일본패는 찰 수 없다"고 외치면서 임금인상 대우개선 일본패 착용 금지를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벌였다. 파업 노동자들은 일본인 거주지에 일본인을 배척하는 격문을 뿌리고, 일본 자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조선인들을 응징했다.

파업을 넘어 항일= 그 해 1121일 일본인 자본가들은 일본인 노동자 1백여 명을 끌어들여 조선정부의 감리서 감리를 위협하고 목포 시민까지 폭행했다. 노동자들뿐 아니라 분노한 목포 주민들까지 싸움에 나서 일본인과 친일 상인들의 집과 가게를 습격·파괴했다.

1214일 급기야 일본군함과 군대가 목포에 들어왔다. 일본군인들은 대포 2문을 앞세우고 목포 시내를 돌며 무력 시위를 벌였다. 기세가 오른 일본인 노동자 수 백 명에게 조선인 노동자들이 폭행을 당해 22명이 다쳤다.

사건이 커지자 조선정부가 개입해 일본과 협상을 벌였다. 협상 결과 십장은 감리서와 일본인 상업회의소에서 추천한 사람들 가운데 노동자들이 직접 뽑도록 했다. 또 임금 중의 상납금은 해관에서 관할키로 했다. 그러나 일본패를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하였던 11명에 대해서는 끝내 체포령이 떨어졌다. 노동자들은 40여일 만에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목포 부두노동자들의 투쟁은 일본의 무력간섭과 봉건정부의 굴욕적인 협상으로 좌절됐다. 그러나 목포 부두노동자들은 투쟁으로 생존권을 수호하고, 일본 자본에 타격을 입혔다. 이들의 투쟁은 또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이윤을 수탈하려는 제국주의 자본과 침략에 반대하는 반제운동의 성격을 띄기도 했다.

부두노동자의 눈물, 그 의미= 1898-1903년까지의 목포 부두노동자들의 투쟁은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동맹파업이었다. 1898년과 1901년에 일어났던 세차례 투쟁은 임금과 관련한 것이었고, 1903년은 제국주의와 친일파에 대한 투쟁이었다. 목포항이 개항한지 5개월만에 18982월과 9월에 투쟁으로 나선 것이다.

부두노동자 수는 1900200여명, 1902300여명, 1903500여명으로 증가했다. 부두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처럼 일을 했다. 부두노동자들의 점심식사는 엿을 먹거나 물로 배를 채우기가 일쑤였다. 하루 10시간씩 일해서 받는 일당이 5전이었다. 쌀 한가마가 1,350전인데 한달 임금은 이것저것 떼고 600전에 불과했다. 한달 죽도록 일을 해야 쌀 한가마도 사지 못하였다. 어떤 인부는 너무 배가 고파서 쌀 몇 컵을 훔쳤다가 일본 사람한테 맞아죽기도 하였을 정도이다. 1903년까지 일어난 동맹파업은 점심을 물로 채웠던 노동자의 임금을 깍어서 이에 항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투쟁은 동학이 끝난 지도 3년정도 밖에 안되어 동학정신으로 농민들이 투쟁에 나선 것이다. 자금수탈과 항일운동이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이처럼 동학의 정신은 목포의 부두노동자들에게 이어져 항일정신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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