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목포 유달산에 일본 고승상… 잔재와 흔적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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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목포 유달산에 일본 고승상… 잔재와 흔적 사이
  • 김영준
  • 승인 2023.07.2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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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개항한 목포… 개신교, 日불교 등 포교활동 전개
유달산 정상 홍법대사상 조성… 88영장 시코쿠 순례 재현

[목포시민신문] 유달산 곳곳에 남아 있는 일제 고승상, ‘잔재와 흔적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

유달산 1등바위 아래에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홍법대사(774~835) 마애상이 있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님 중 한 명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유달산. 왼쪽 빨간 동그라미 부분에 부동명상이, 오른쪽 아래 노란 동그라미에 홍법대사상이 있다.

개항 목포와 일본인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필두로 부산, 인천, 원산이 차례로 열렸고 189710월 목포도 개항했다.

고종은 목포 개항을 통해 관세 수입을 늘려 정부 재정을 확충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목포해관(지금의 세관)도 세웠다. 목포 조계지(외국인 거주 지역) 기록에 의하면 미국인, 영국인, 러시아인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일본인이었다. 영사관도 일본의 것만 섰다.

개항 당시 목포 인구는 불과 2800명이었다. 항이 본격적으로 가동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목포의 인구는 1916년에 약 8천명, 1929년에 3만 명, 1932년에 5만 명 등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인구가 늘어난 건 당연히 물동량이 늘었기 때문이다. 1911년 일본으로 실려 간 쌀은 약 10만 석이었으나 식민 지배의 골이 깊어지자 실려 가는 쌀의 양도 늘어났다. 1929년에는 90만 석으로 증가한다. 9배나 늘었다.

목포에는 늘 인구의 10%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개항 당시 목포 인구 28백 명 중 200명 남짓이 일본인이었다. 1920년대 말이 되면 그 숫자는 5,000명 이상으로 불어난다. 전체 인구 중에 약 2할 이상으로 추정된다.

종교의 각축장이 된 목포

일제는 강점기 동안 유달산에 홍법대사상과 함께 부동명왕상을 조성했다. 일본불교는 이곳에 88개의 영장을 만들어 시코쿠 순례길을 재현하려 했다.

항구가 열리고 사람들이 늘자 종교도 같이 들어왔다. 2020년에 불광출판사 편집주간인 이상근 기자는 개항장 목포는 사실상 한반도 내 최초의 종교 각축장이라고 할 만큼 일본 불교, 개신교, 가톨릭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여기에 조선의 불교, 천도교, 시천교 등도 경쟁에 뛰어들었다고 말한다.

호남 최초로 개신교 교회가 들어선 곳도 바로 목포다. 개항 전, 미국인 선교사들은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번화했던 나주에서 씨를 뿌리려 했지만 실패한다. 그러다 목포가 항구를 열고 급성장할 기세를 보이자 1897년 목포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선교에 들어갔다. 1910년에는 석조 예배당인 양동교회를 건축했다. 초기 기독교가 그렇듯 의료와 교육 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목포의 독립운동가목록에 두 명 중 한 명꼴로 기독교인이다. 정명여고의 교사와 학생이 많은데,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다.

전남 최초의 성당도 목포에 들어섰다. 알베르도 드애 신부가 1898년 목포에 정착하면서 가톨릭의 선교가 시작됐다. 개항 2년 후다.

1898년에는 일본 불교의 진종 대곡파 동본원사가 들어온다. 불광출판사 자료에 따르면 1910년대가 되면 정토종, 진종 서본원파, 일련종, 조동종, 진언종제호파 등 당시 일본의 주요 종파는 이미 목포에 자리를 잡았다. 신자가 대략 60~370호 정도 되었다. 목포에 머물던 일본인들의 대개는 앞에 나온 일본의 불교 종파 중 하나에 속해 있었다는 얘기다.

민족 종교인 천도교 그리고 친일의 성향이 강했던 시천교도 목포에 신도가 있었다. 물론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한창 때 신도수가 천도교는 175, 시천교는 270명이라는 조사가 있다. 1927년에 두 종교는 일본에 의해 해산됐다.

유달산 곳곳에 88개의 영장(신성한 터)을 만들고 불상을 안치한 흔적이 남아 있다.

유달산의 홍법대사와 부동명왕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유달산에 일본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님이라는 홍법대사(774~835)상과 그가 몸에 지니며 항상 공양하던 부동명왕이 새겨져 있다.

불광출판사 편집주간 이상근 기자는 일본에서 홍법대사의 인기는 우리나라로 보면 원효대사나 서산대사급이다. 일본 검색사이트에서 불교를 검색하면 공해(空海)라는 단어를 줄줄이 이어진다. 쿠카이라고 발음하는데 이분이 바로 홍법대사다“1984년에 중국과 일본이 공동제작하고 <패왕별희>를 만들었던 첸 카이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가 있는데 바로 <쿠카이(空海)>. 이 영화는 2018년 재제작됐다. 아예 <쿠카이(空海)>라는 뮤지컬은 일본에서 일 년 내내 간판을 달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런 일본의 명승이 유달산에 마애상으로 남아 있다. 마애상을 새긴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항구가 열리고 일본인들이 몰려오고 또 일본불교가 따라 들어오면서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계와 향토사학자들은 단순히 홍법대사와 부동명왕 마애상만 안치한 것이 아니라 더 큰 그림(?)이 있다고 주장한다.

주장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시코쿠 88개 사찰 순례길 1,400km를 걸어서 돌아보는 것을 오헨로라고 한다. 1,200년의 역사를 가진 이 길은 홍법대사가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고 수행하던 역사적인 발자취를 따라가는 순례길이다. 유달산에도 홍법대사와 부동명왕뿐 아니라 88개의 영장(신성한 터)을 만들고 불상을 안치했다. 시코쿠 88개 사찰 순례길을 유달산에 재연한 것이다.

지금도 유달산 곳곳에는 영장에 안치했던 불상을 놓았던 자리가 남아 있다. 하지만 여기에 안치되었던 불상은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하나둘 사라졌다. 몇몇은 박물관 또는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바위에 새겨졌던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은 어쩌지 못했다. 1995년 한 차례 이 마애상들을 해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해는 50주년 광복절을 맞아 경복궁 앞 조선총독부 건물이 폭파 해체된 해였다. 당시 관에서 마애상을 철거하기 위해 인부들을 데리고 유달산 정상까지 올랐다. 하지만 철거를 하면 급살 등 화를 입을 것 같다고 인부들이 손사래를 치자 들고 올라갔던 장비를 들고 그대로 내려왔다고 전해진다.

이후 추가적인 철거 시도를 하지는 않았지만 시비는 끊이지 않았다. ‘잔재라고 주장하는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지속적으로 철거를 주장했고 흔적이라고 이야기하는 문화재 전문가들 그리고 또 한편의 시민단체들은 보존을 주장했다.

불광출판사 편집주간 이상근 기자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목포의 일본 영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개항거리를 걸으며 역사를 회상하는 코스가 활성화된 것처럼 딱 그런 차원에서 봐주면 더 이상의 시비는 불필요할 듯하다식민지 시절의 아픈 과거의 장면을 계속 상상하게 돼 유감이지만 홍법대사가 이곳에 있는 게 그냥 인연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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