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버려지는 항‧포구 활용책 찾기-③]뭍-섬-섬 잇는 뱃길...거친 바다 맞대며 가슴에 추억 켜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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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버려지는 항‧포구 활용책 찾기-③]뭍-섬-섬 잇는 뱃길...거친 바다 맞대며 가슴에 추억 켜켜이
  • 류용철
  • 승인 2023.10.20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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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 항로 끊긴 항‧포구마다 질곡의 근대사 속 작은 역사 주렁주렁
압해도 해협 가란도‧복룡‧가룡 선착장 물길 따라 출렁이던 삶 가득
육로교통 없던 해남 화원반도 뱃길 목포 나들이 방조제 건설로 쇠락
버려지는 항포구 활용책 찾기-

<글 게재 순서>

천사대교 개통 10지워지는 섬

방치되는 항포구 실태

섬 주민 역사 숨 쉬는 항포구

포구 활용책 고심하는 지자체

일본 센토내해 섬의 선택

전문가 좌담회

두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자은도 제1의 선착장으로 자은도 주민과 물류를 실어나르던 남진 선착장. 새천년대교와 은암대교가 건설된 이후 항구의 기능이 멈춰 발전을 멈췄다.

[목포시민신문] 섬에 사람의 손길 닿기 시작하면서 항포구는 섬의 주요 거점으로 주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장소다. 섬은 이곳을 통해 뱃길을 통해 뭍과 소통했다. 자연스럽게 이곳에는 섬에 거주하는 사람과 생산되는 물류가 모이고 돈이 넘쳐나면서 중심이 됐다. , 이곳은 섬사람들의 추억과 근대사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과거를 기록하고 있다. 섬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생활에도 섬을 드나들던 방법이 뱃길이 유일했던 때는 항포구는 말 그대로 섬에서 가장 물류와 사람의 왕래가 가장 활발히 모였던 곳이다. 목포항에서 뱃길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항로는 섬과 섬을 잇고, 리아스식 해안인 해남, 진도, 완도 무안 등 해안가 주민들의 주요 이동통로가 됐다. 뱃길 항로는 서해안 지역 섬들의 역사를 낳고 추억을 만들며 섬과 소통하며 섬마다 고유한 특징의 문화를 형성했다. 매일 바다와 거친 바람과 맞대면해야 하는 섬사람들은 이곳에서 안식을 찾고 고단한 인생에서 신화를 만들고 꿈과 희망을 키워갔다.

자은도 남진 선착장 = 새천년대교와 은암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자은도 주민들의 목포까지 다니는 여객선이 다니며 관문 역할을 하던 자은도 남진 선착장. 자은도는 암태와 팔금, 안좌와 함께 신안 다도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자은도가 육지로 연결된 것은 2019년 새천년대교가 건설되면서부터다. 이전에는 이들 4개 섬은 은암대교, 중앙대교, 신안1교 등 섬과 섬을 연결하는 연도교로 연결돼 있었다. 이처럼 연륙연도교가 되면서 암태도와 자은도에 변화가 생겼다. 목포와 뱃길로 연결했던 13개 선착장 중 10곳이 기항지의 기능을 상실하고 3곳만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자은도에는 1996년 자은면 남지리와 암태면 오상리를 연결하는 은암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남진욕지고교한운사월포 선착장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목포까지 여객선이 운항하면서 섬 주민들의 발이 됐다. 대교 개통에 따라 자은도에 있던 선착장은 신안군 지도읍과 연륙된 증도를 다니는 여객선이 운항하는 고교선착장만 기항지 역할을 하고 있다. 자은도 주민들의 관문이었던 남진항은 김 양식 어민들의 어항으로 변모하면서 과거의 번영을 뒤로한 채 퇴락하고 있다. 1960년대 말 부서 파시로 유명했던 사월포항과 섬 동쪽 욕지선착장도 기항지의 기능을 상실했다.

자은도 주민들은 뱃길이 뭍으로 나다니는 유일한 방법일 때 선착장은 여객선을 타고 생활필수품을 사고 목포에 나가 공부하는 자식들을 부양하는 수단이었다. 당시 여객선 운항이 자주 없는 작은 포구에서 종선을 타고 남진 선착장 등 여객선이 정박하는 큰 항으로 이동해 목포에 나가기도 했다. 30~40명의 주민의 비좁은 종선에 몸을 싣고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도 낫기도 했다.

자은도가 고향인 최송춘(65·목포시) 씨는 자은도에서 배를 타면 암태도와 팔금도까지 거쳐 목포시까지 3시간 이상 걸려 갔다라고 말했다.

해남 화원반도 땅끝선착장 인근에 설치된 목포구 등대. 목포항을 나들던 배들은 넓은 시야 바다로 나갈 때 지나치는 곳이다.

신안 압해도 선착장 = 압해도는 군청사가 위치한 신안군의 중심 도서이다. 20086월 목포시 북항을 잇는 압해대교가 개통되면서 연륙이 됐다. 압해도에는 가란도, 우간도, 고이도, 매화도, 마산도 등 부속 섬이 있으며 목포시와 섬을 잇는 뱃길에 송공선착장 등 연안항과 선착장이 16곳이 있다. 대교가 건설되기 전에는 목포시 북항과 가장 가까운 남동쪽인 신장 선착장이 섬의 관문 역할을 했다. 압해도 선착장들은 육지와의 거리에 따라 독특한 지역적 특성을 보인다.

섬의 동북쪽에 있는 선착장들은 목포의 뱃길을 이용하기보다는 거리상 가까운 무안군 운남과 청계에 나가는 도선이 다니는 소규모 포구가 발달했다. 이곳 선착장들은 1984년 건설된 영산강하구언에 따른 물살과 밀접한 영향을 받으며 활용됐다. 하구언 건설 전 압해도 앞 해협은 조류간만의 차이로 빠른 물길에 따라 주민들은 뱃길을 이용하고 어로 활동으로 생활했다.

압해도 가란도선착장은 압해도 해협의 물살에 따라 위치가 달라졌다. 가란도는 압해도와 무안 청계면 사이에 있는 섬이다. 이곳은 무안군과 신안군으로 행정구역이 달라지면서 주민들의 뭍에 나가는 선착장을 달리했다. 이곳에서 압해도 숭의선착장까지 200M에 불과했다. 신안군은 이곳에 2012년 사람들만 통행할 수 있는 가란대교를 건설했다. 1969년 신안군에 편입되기 전 가란도는 무안군에 속하면서 주민들은 목나루 선착장을 이용해 무안 청계면 복길리로 나갔다. 주민들은 직접 뱃삯을 걷어 복길리까지 운항하는 도선을 운영했다.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가란도에는 아직도 전통적 상 장례풍습인 다래라 하는 독특한 생활양식이 전승 계승되고 있다.

압해도 복룡 나루터와 무안군 망운면 도원선착장도 압해도 해협의 빠른 물살로 목포 뱃길을 이용하기 어려운 주민들이 거리로 가까운 무안 망운으로 나가면서 활성화된 포구이다. 이곳 주민들은 3시간이 걸리는 목포 때문에 목포 뱃길을 이용하기 주민은 육상교통의 발달에 따라 기능이 변화됐다. 주민들은 3시간 넘게 걸리던 목포 뱃길보다는 가까운 망운면 도원선착장을 이용해 뭍으로 나갔다. 목포 북항까지 가던 여객선은 도원에서 광주까지 가는 시외버스가 운행되면서 1976년 중단됐다. 압해도 복룡 나루터와 도원선착장은 여객항 기능이 사라졌고 현재는 어항으로 활용되고 있다.

, 신안군 압해도 가룡항과 무안군 운남면 신월항은 섬과 무안 해안가 주민들의 주요 이동통로 역할을 했다. 압해도 가룡리 주민들은 목포시로 나갈 때 신장 선착장까지 가서 북항으로 나가기보다 운남 신월항으로 배로 나가 버스를 이용해 목포로 이동했다. 무안 운남에서 압해도를 잇는 국도 77호선 2013년 김대중 대교가 개통되면서 양 지역의 항구는 기항지의 기능은 축소됐지만, 주민들의 어업 활동에 필요한 어항과 인근 섬을 잇는 뱃길의 여객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섬 주민들의 뭍 나들이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해남 화원반도 땅끝선착장 = 이곳은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해안에 사는 주민들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내륙에 있는 해남 화원반도는 1996년 영산호와 영암호, 금호로의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까지 주민들이 해남읍으로 나가는 것보다 뱃길을 이용해 목포에 나가는 것이 훨씬 쉬웠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뱃길을 이용해 목포와 교류하면서 생활했다. 자연스럽게 선창이 생겼고, 양화리 선창이라 불리는 땅끝 선창이 목포와 인근의 달리도, 금호도로 나가는 관문 역할을 했다. 이곳을 나들던 여객선은 해남 송지, 완도항까지 운행했다.

1981년 목포와 영암군을 잇는 영산강하구둑이 건설되고 금호영암방조제가 들어서면서 이곳은 쇠락했다. 2000년대에 간헐적으로 다니던 여객선이 끊기면서 흔적만 남아 있다.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여객선이 영산강하구언과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 물때에 따라 운항하던 기억이 있다. 밀물과 썰물 때 운항 시간을 달리하면서 주민들을 목포까지 실어날랐다. 한상영(71·화원면 양화리) 씨는 목포 앞 선창까지 40분이 소요됐으며 달리도 등 인근 섬을 돌아갈 때는 2시간가량 소요됐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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