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단상-조기호 시인] 풍성하게 존재하는 삶
상태바
[수요단상-조기호 시인] 풍성하게 존재하는 삶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3.11.29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기호

[목포시민신문] 거리의 은행잎들이 하나, 둘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오늘은 한 줌의 바람 앞에서 그저 맥없이 떨어져 나뒹굴고 있다. 오만방자했던 삶의 끝에 이르러 홀로 초라한 모습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무모함과 어리석음의 편린片鱗 같기도 하고, 어쩌면 고독의 나락에서 허둥대는 누군가의 영혼처럼 느껴지기도 하여 이 가을의 구석에 선 내가 문득 두렵고 가여워진다.

잔주름이 더욱 깊어지는 나이다. 서서히 휘어가는 시간의 마디마다 아쉬움과 쓸쓸함이 옹이처럼 박혀, 어느 때부터인가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가 날마다 일상과 동행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모두가 지난至難한 세월들이었다. 아등바등 몸을 추스르며 살아온 생물체로서의 한살이가 아니었던가, 모든 것이 미안했고, 죄스러웠고, 그리고 곤고했던 탓에 나는 불현듯 살아갈 날들이 살아왔던 날들보다 훨씬 짧다는 어떤 절박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도대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있었던 젊은 시절과는 다른, 닫히고 막힌 시간들에 휩싸인 노부老夫의 심정이란 때로는 허허벌판의 황량한 풍경을 연상시키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빳빳하고 새하얀 이웃의 부음이 날아 들어오는 날에는 아득해 보이던늙음과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와 갑자기 남은 삶이 두렵고 당황스러워 지는 것이다. 의식 없이 하루하루를 살다가 속절없이 회한의 마음으로 죽음을 맞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과, 보다 의미 있는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겠다는 각성으로 잠시 숙연해지는 것이다. 명분과 관습과 변명 속에 감추어진 이욕利慾의 뿌리를 걷어내고 지금까지 잃고 지내왔던 새로운 자신의 삶(진정한 가치)을 찾아, 마음껏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하여야겠다는 다짐을 한순간 해 보는 것이다.

틱낫한은 그의 책 기도중에서, 수행자의 기도는 세속적인 건강, 성공,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 따위를 위한 것보다 '이 물질세계의 환영幻影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가'에 대하여 더욱 고뇌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질세계의 환영幻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더 많은 것을 갖고 싶고, 더 좋은 것을 갖고 싶고, 더 안락해지고 싶고, 더 아름다워지고 싶고, 그래서 잔뜩 풍족豐足해지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싶다. 물론 우리는 수행자가 아니며 더구나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러한 욕망을 단지 헛된 환영幻影이라고 치부해서만은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인간들이 지니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채워도, 채워도 배부르지 않는 그런 공복감空腹感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의 괴로움은 자신과의 불화였다. 늘 부족하고 어리석고 여유가 없는 나를 인정하는 일이 그리도 힘들었다. 그리하여 그러한 공복감은 당연히 불만과 좌절로 이어져 평온한 마음으로 아무런 갈등 없이 내 밖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에 큰 장애가 될 수밖에 없었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그 소중함마저 잃는다고 한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있다고 한다. 이는 우리들이 물질세계의 환영幻影으로부터 마음껏 해방되어질 수 있기를 권면하는 말이라 여겨진다.

분주한 삶의 틈바구니에서 정신없이 하루를 지내다 보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내가 이렇게 허둥대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자문을 해 볼 때가 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일상의 북새통 속을 그렇게 시달리며 살아온 것일까. 요즘 들어 나는 내가 좀 더 느긋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많이 남지도 않은 세상을 자꾸만 쫓기며 살아가는 느낌이 드는 까닭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더 가져야 하는 것일까?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봐도 그렇게 안달복달할 것은 아마 없는 것 같다. 그저 건강하고 평안한 일상을 누릴 수 있다면 그로 만족할 일이라 감히 여겨진다. 생각건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들을 툴툴 털어버리고 가벼운 몸으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보를 즐기듯 넉넉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일이 어쩌면 행복으로 가는 첩경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나 둘, 이웃들이 그리고 친구들이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떠나간다. 나는 지난날들을 부끄러이 돌아다보며 그러나 이제 남은 날들은 정성스럽게 살아가고 싶다. 추하지 않게, 옹색하지 않게, 초조함이 없이 여유 있고 너그럽게,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미안하지 않도록 두루 다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한 생을 다 하고 떨어지는 은행잎의 낙화를 바라다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삶의 궁극은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법정의 말씀을 떠올려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