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상업학교 “일 총독부 폭압정치 반대” 항거 기록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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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상업학교 “일 총독부 폭압정치 반대” 항거 기록 나와
  • 김영준
  • 승인 2023.12.13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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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1월 목포상업학교 항일운동 전개
광주학생운동 전국으로 확산시킨 기폭제
“학생들의 ‘의로운 항거’ 아는 이 드물어”
지난해 KTV는 1929년 11월 목포상업학교 항일운동을 방영했다.

[목포시민신문]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한다. 제국주의 전쟁 절대 반대한다.”

94년 전,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이 일제를 항거하며 외친 구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여학생 희롱사건을 도화선으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것은 192910, 한달 뒤 이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며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이 동조 시위에 나서면서 외친 구호이다.

1929년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광주학생운동은 당시 일제의 보도통제로 인해 단 한번 신문에 실렸을 뿐 일반 대중이나 학생들에게 그 전말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1980년대 민주화 이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광주에 이어 목포에서 일어난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의 운동은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기폭제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다.

학계에선 목포상업학교의 항일운동은 광주학생운동이 요구했던 식민지 교육철폐와 일본제국주의 반대를 넘어 1927년 창립된 좌우합작 항일단체인 신간회의 지원 아래 치안유지법 철폐, 무산계급 해방과 같은 진보적인 정치 구호가 포함된 학생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한다.

광주대 한규무 교수는 광주에서 있었던 학생시위를 서울에 있었던 대규모 연합시위로 이어주는 불씨 역할을 했던 것이 1929년 목포상업학교 시위였다고 말한다.

목상 항일운동의 흔적

1929113일 광주에서 한일 학생간의 갈등이 항일운동으로 분출되고,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던 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 반대 시위로 나아가게 됐다.

그로부터 2주 뒤 무렵인 1119,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인 목포 송도 신사와 정림여학교 앞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그 운동은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으로 전파 시키는 불꽃 역할을 하게 되며, 훗날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운동 중 가장 진보적인 학생운동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주도한 이재실(당시 목포상업학교 2학년)과 박사배 그리고 박종식 등 학생들은 깃발과 전단 1500여 장을 만들어 시내에서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등을 외쳤다. 이 시위로 이재실 등 36명이 구속됐고, 무기정학 등의 처분을 받은 학생들이 70여 명에 달했다.

체포 후 이재실은 대구복심법원에서 6개월 형을 받고 수감생활을 한 뒤,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게 된다. 오갈 데 없는 처지에서 밀항을 선택하여 일본 아자부수의축산학교에서 조선유학생 동지회 활동을 하며 항일운동을 이어나갔다.

지난해 8월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시위 주동자인 이재실씨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재실의 장남 이광림씨는 맨처음 목포에서는 목포상고가 제일 먼저 동맹휴교를 결의해서 다른 학교들이 가세하게 선두에 섰다. 등사판을 이용해서 격문을 수천 장 만들어 뿌리며 시위를 주도했다하지만 당시 시위에 가담한 다른 많은 학생들은 여전히 진실 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을 받으려면 유가족들 중 누군가 신청을 해야 하는데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일가족이 모두 숨졌거나,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신청자가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지역에선 가족이나 유족이 없더라도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분들의 혼을 위령할 수 있는 그러한 노력들은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역사적인 큰 사건의 경우 유가족이 신청을 않더라도 사건의 진상규명을 지자체 차원에서라도 신청해 역사바로 세우기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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