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문화원, 신안문화원 이사 유달국악원 김연례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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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문화원, 신안문화원 이사 유달국악원 김연례 원장
  • 최지우
  • 승인 2014.05.20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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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풀어내는 恨 인생사 봉사로 승화시켜

일흔 한 살의 목포 신안, 문화원 소리꾼
어릴 적 꿈 이뤄 지역봉사와 제자 양성까지
힘들고 어려운 이들 무료강습으로 꿈 찾아줘


[목포시민신문=최지우기자]"사르르르렁 실겅 당겨주소. 해이여어루 당겨주소. 이 박을 타거들랑은 아무것도 나오지를말고 밥 한통만 나오너라. 평생의 포한이로구나. 헤이여루 당기어라. 톱질이야!
여보게 마누라, 톱소리를 어서 맞소, 톱소리를 내가 맞자고 허니 배가 고파서 못 맞겄소."
"배가 정 고프거들랑은 허리띠를 졸라를 매소"
"헤이여루 당겨주소, 작은 자식은 저리 가고 큰자식은 내한테로 오너라.
우리가 이 박을 타서 박 속일랑 끓여먹고 바가지일랑은 부잣집에다가 팔어다가
목숨보명 살아나세. 당겨주소, 강상의 떴난 배가 수천석을 지가 실고 간들
저희만 좋았지 내 박 한통을 당헐수가 있느냐. 시르르르렁 시르르르르르렁 실겅 시르렁
실겅 당기어라 톱질아."

가슴의 한을 모아 쏟아하는 판소리 흥보가중 흥부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부인과 박을 타는 이 장면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짜 박을 타는 모습을 상상하며, 앞으로 뒤로 몸을 움직이게 한다.
곱게 단장한 모습에 북을 향해 내리치는 힘 있는 손동작으로 젊은 사람들도 따라오지 못하는 열정의 노익장을 과시하는 일흔 한 살의 김연례 원장이 토해내는 판소리 한마당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짜릿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목포문화원과 신안문화원에서 소리공부를 지도하고 있는 유달국악원 김연례 원장은 오십이 넘은 나이에 소리 공부를 시작, 지금은 매달 제자들과 함께 요양병원 어르신들을 위한 소리봉사와 각종 행사의 자원봉사를 하며, 건강한 노년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판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모든 시름이 잊혀 졌지요. 하지만 그렇게 좋아했던 소리공부는 집안 어르신들의 반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접어야 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꼭 소리를 하며 내 가슴속의 한을 풀어야지 하는 바램이 있었지요” 라며 평생의 숙원 이였던 소리를 통해 지금은 진정한 삶의 보람과 긍지를 느끼고 있다고 했다.

김연례 원장은 진도가 고향으로 어릴 때부터 늘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동네잔치 할 때도, 상여가 나갈 때도, 한 여름 뙤약볕 아래 바쁜 농부들이 농부가를 부르던 농번기 때도, 소리는 끊이지 않고 항상 삶속에 녹아 있었다.
젊은 시절 시골 농사꾼의 아내로, 네 아이의 엄마로, 시부모를 모시는 며느리의 삶을 살아야 했던 김연례 원장의 젊은 시절에 자신을 위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식구들을 위한 시간 내기에 몸은 지쳐갔고, 자신의 꿈을 찾거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적 금전적 여유도 없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다들 그렇게 살아가려니 하고 내 한사람 희생으로 온 가정이 평온했으니 참고 살았지요. 시골 생활이 그러하듯이 여자들에게는 고난의 연속입니다. 한량 이였던 남편은 가장의 책임보다는 자신을 위한 시간에 더 할애를 했지요. 농사를 비롯해서 집안의 모든 대소사는 다 내 책임 이였으니 여자의 일생이려니 하고 체념하고 살았습니다”라며 지나온 시절에 대해 담담히 설명했다.
힘들었던 시절 이였지만 남편과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며, 여자의 행복을 느끼며 그렇게 평범한 일상이 계속 되리라 생각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인생의 전환점이 된· 복병이 찾아 온건 마흔하고도 여섯살 때였다.  남편이 홀연히 세상을 등진 것이다. 가정의 울타리가 되어주던 가장의 부재는 정신적인 상실감과 함께 더 큰 책임감을 남겼다.
“처음엔 막막했어요. 존재 자체만으로 힘이 되어주던 남편 이였으니까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진짜 가장이 되었지요. 참 힘든 날들 이였는데 아이들이 착해서 잘 버텨 냈어요” 라며 힘들었던 시절 자신을 지탱해준 에너지원은 아이들이였다고 했다.
김연례 원장은 진도의 생황을 정리하고 두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쉰 살의 나이에 낯선 목포로 이주를 결심했다.

두 아들을 챙기며, 식당을 운영하던 그녀는 건강상의 이유로 모든 일을 접고 이제는 자신의 보호자가 되어줄 만큼 성장한 아들의 권유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소리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평생의 꿈이자 한으로 남아있던 판소리를 하게 된 것이다.
“밤 낮 소리 생각만 하며, 선생님이 불러준 흥보가 대목 대목을 연습했어요. 오랜 시간 동안 염원했던 공부였기에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8년 동안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습니다”라며, 꿈이 현실이 되었던 믿을 수 없었던 행복감을 들려줬다.
흥보가와 심청가, 수궁가한마당을 차근차근 공부한 김연례 원장은 민요까지 사사한 후,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긴 김연례 원장은 지역의 소외된 곳을 찾아다니며 소리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나누고 싶어서 였다.

“찾아가서 소리를 통한 봉사를 하면 많은 어르신들이 좋아하고 자신들도 가슴의 응어리진 삶을 토해내고 싶어하는것을 느껴요. 그럴 때 마다 보람을 느끼고, 내가 소리공부를 하길 참 잘했구나하는 뿌듯함을 느낍니다”라며, 자랑을 했다.
김연례 원장은  자신처럼 여건이 되지 않아 소리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무료강습을 통해, 판소리를 널리 알리고 활성화 시키고 싶은 작은 꿈이 있다.
김연례 원장은 결코 작지 않은 일흔 한 살의 나이지만 아직도 할 수 있는 일아 많다는 사실에 최대의 희열을 느끼며,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온 힘을 다해 소리전파에 힘쓸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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