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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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4.07.3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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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균 -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허헌·김병로·이인과 항일 재판투쟁
항일 법정변론활동을 통해서 본 대한민국 법질서의 원천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법을 통한 독립운동은 가능했을까.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의미를 갖는 독립운동일 수 있었을까.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률가에게 변호를 부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김창숙)라고 하거나 “육법전서 들고 독립운동”을 하려 한다고 매섭게 비판(한용운)한 독립운동가들의 태도와 일제 식민지 법제도의 불합리성을 근거로 하여 흔히 우리는 일제의 법과 법논리로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운동을 변론하는 것이 극히 미미한 효과만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3인”의 항일 변호사, 허헌과 김병로, 이인을 중심으로 하여 일제 식민지 법정에서의 법률투쟁에 관한 각종 사료를 심층적으로 면밀하게 고구(考究)하고 종합한 한인섭 교수의 노작은 통념과는 다른 답을 제시하고 있다.
‘법을 통한 독립운동’은 의미 있는 독립운동이었다는 것이다.

‘법을 통한 독립운동’의 효시가 된 3·1운동 재판이 그 대표적 예이다. 전국에서 수많은 조선인이 체포되고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그중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과 실질적으로 일을 맡았던 15인을 합친 48인에 대한 재판은 당시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변론을 맡았던 허헌 변호사는 형사소송법상의 법리를 바탕으로 하여 당시 형사소송 관행의 빈틈을 포착하고는 검사의 공소가 형식적 요건조차 갖추지 못하였기에 각하되어야 한다는 날카로운 법률적 주장을 펼쳐 일본 재판관과 검사를 법률적 궁지에 몰아넣었고, 제1심에서 공소불수리(公訴不受理) 판결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 사건은 다른 재판에 미칠 파장이 엄청났기에 언론을 통해 생생하게 보도되었고 조선 천지를 울리는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항소심에서 이 판결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미 일제 사법부와 검찰의 권위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버렸고, 대중은 법정에서의 항일 법정변론이 갖는 위력을 절감하게 되었다.

법정에서 법절차에 따라 법리와 법률적 논변을 펼치는 변론활동은 독립운동사에서 어떤 위상을 가졌던 것일까. 철저하게 통제되고 억압되었기에 의미 없는 소음으로만 처리되던 독립운동가들의 목소리가 법정에서의 법적 논변을 매개로 하여 공적인 정치적 목소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 독립운동가들을 고무하고 독립의 대의를 널리 확산시킴으로써 조선독립에 관한 대중의 의식과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재판투쟁은 항일 독립운동의 주요한 한 장이자 방법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와 에피소드를 통해 3인 변호사, 허헌과 김병로, 이인을 포함하는 항일 변호사들의 법정 외 활동도 당시 독립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음을 잘 그려내고 있다. 1926년 5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세계일주여행을 하던 허헌 변호사가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여하여 당시 독일과 프랑스 유학생이면서 조선대표로 참가한 이미륵, 이극로, 황우일, 김법린과 함께 조선의 독립 문제가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과정을 읽노라면 비통한 심정도 일지만 절로 탄성이 나고 호연지기가 솟아오른다.

한글에 대한 사랑으로 한글학자들을 지원하다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고난을 겪은 이인 변호사, 일제 말기 경기도 양주군 창동에 은거하여 자급자족하면서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제의 패망에 대비하여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설계하던 김병로 변호사의 행적도 마찬가지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기개, 식견, 지혜를 갖춘 이 3인 변호사들에 대한 촌철살인의 세평이라든가 한용운, 김창숙, 안창호, 여운형과 같은 독립운동지도자들의 국사적(國師的) 풍모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에피소드를 즐길 수 있는 것도 이 책이 주는 큰 재미다.

일제의 법률에 미미하게나마 담겨 있던 보편적 법가치인 권력남용의 견제와 인권옹호의 가치를 극대화하여 우리 민족을 위해 적극적이고 투쟁적인 변론을 펼침으로써 “일정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인권옹호와 사회정의”를 위하여 법률가가 되기로 했다고 고백하는 3인 변호사를 통해서 독자들은 대한민국 법질서의 원천이 무엇인지, 법률가와 지식인이 본받아야 할 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한인섭 교수의 저작은 좌표를 잃어버린 시대의 우리에게 북극성을 제시하는 대작이라 할만하다.

김도균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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