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신안장애인노약자자원봉사센터 김창환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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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신안장애인노약자자원봉사센터 김창환 센터장
  • 최지우 기자
  • 승인 2014.12.03 1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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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 다 내어 주고 빈 몸! 하지만 누구 보다 부자
 

강산이 두 번 바뀌는 긴 세월동안 나를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서 일을 하고, 가진 것을 몽땅 내어주는 삶을 산다면 누군가는 미친 짓 이라고 할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지로 21년 동안 남을 위한 인생, 그것도 나보다 못한 노약자와 장애인을 위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보통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미친 짓을 하고 있는 우리 이웃이 있다.

목포 기차역 대합실 한편에 마련된 공간에서 갈라진 손가락으로 구두를 깨끗이 닦고 번쩍 번쩍 광을 내주는 구두닦이 아저씨 그가 바로 미친 짓을 하는 화제의 주인공 김창환씨다.

그는 현재 목포신안장애인노약자자원봉사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자비로 만들어 놓은 여객선 터미널 앞 노약자와 장애인의 대기소의 주인이기도 하다. 

이 대기소에는 두 명의 직원과 법인 사무국장이 상주하며 배를 오르내리는 장애인이나 노약자들의 도우미역할을 하고 있으며, 배 시간에 될 때까지 편하게 누워서 기다릴 수 있는 공간으로 김창환씨가 지난 2011년 가진 돈을 몽땅 털어 세운 것이다.

이곳은 신안의 섬을 오가는 장애인이나 노약자들에게 꼭 필요한 쉼터이며,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로 매일 방이 꽉 찰 정도로 이용객이 넘쳐나는 인기 있는 곳이다.

이 자원센터 대기소의 모든 운영은 김창환씨가 하고 있으며, 직원들의 급여 또한 김창환씨가 책임지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남들보다 가진 것이 많은 것도 아니고,  많이 배운 것도 아니다. 사회적으로 이름을 알려 얻고자 하는 정치적 야망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나보다 못한 노약자나 장애인들을 보면 먼저 마음이 가고, 나서서 도와주어야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는 천성 때문이다.

“나도 잘 모르지만 난 이렇게 사는 것이 편하다.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어 그런지는 몰라도 그들을 보면 남 같지가 않다.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함으로서 내 맘이 편하니 하는 것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나는 이렇게 사는게 좋다”고 답했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청각장애를 가졌고, 조카는 정신지체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가족들에게 장애는 남의 일이 아닌 자신들의 일이였던 것이다.

 
김창환씨의 현재 직업은 구두닦이다. 그가 매일 구두를 닦는 이유도 자원봉사센터와 대기소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가 원래 자리 잡았던 곳은 지금 자원봉사센터가 있는 여객선 터미널 앞 이였다.
 
배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구두를 닦아주면서 섬을 오가는 노약자나 장애인들을 도우며, 고향에서의 첫 봉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점점 레저 스포츠가 생활화 되고 등산화와 운동화가 유행하면서 구두 닦는 손님이 줄어들었고, 자원봉사센터와 대기소운영에 차질이 생겼다. 혼자서 동동거리는 그를 안타깝게 여긴 주위 사람들의 권유와 관심으로 현재 목포역 새 터전에서 일을 새롭게 시작한 것이다.

“주위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의 목포역내에서 구두를 닦을 수 있게 해 준 것도 다 여러분들이 신경을 써준 덕분이다. 나 혼자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지금껏 이어져 올 수 있었다”며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다“ 고 밝게 웃었다. 
 
김창환센터장은 해남 화원면이 고향으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목포로 건너와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살이를 떠났다.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서울에서 가난한 시골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리어카 행상과 사우나청소, 각종 배달 등 온갖 궂을 일을 도맡아 하며 보다 나은 인생에 대한 꿈을 키웠고,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작은 슈퍼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타고난 천성은 버리지 못하는 법.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가 생겨나자 김 센터장은 그동안 간간히 행하던 봉사에서 본격적인 봉사활동으로 나섰고, 두 아들과 아내는 항상 두 번째 여야 했다.

섭섭해 하는 가족들과는 달리 그의 마음은 가족들은 이해해 주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지만, 93년 어느 날 타향에서 이렇게 봉사 하는 것 보다 이왕이면 고향에서  봉사를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모든 것을 정리, 홀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김창환센터장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는 시점 이였다. 내가 아닌 너를 위한 베푸는 삶을 결심한 김 센터장은 젊은 시절 사우나에서 근무하며 배웠던 구두닦이를 하며 꿈에 그리던 고향에서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서 21년의 세월동안 그는 철저히 남을 위한 인생을 살고 있다.
어느덧 예순 둘의 나이가 된 그에게 예전엔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작은 소망도 생겼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봉사를 하며 만족해하고 고마워하는 장애인과 노약자를 보며 보람을 느끼지만 많이 부족해 항상 아쉽고 미안한 생각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대기소 내 창문에 방범창이 없어 TV를 도둑맞는 가슴 아픈 일도 있었고, 비바람에 컨테이너 건물인 대기소가 밀려나고, 유리창이 깨지는 천재지변도 있어 항상 준비하고 대비하며 살아야 한다.

“나는 어차피 집이 없으니 아무데서나 자도 상관없지만 도둑을 대비해 꼭 여기서 자야 한다. 유리창에 방범창이 있다면 안심이 되겠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방범 창을 할 수도 없고 여름이나 겨울 폭풍과 찬바람이 제일 두려운 존재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목포의 관문인 기차역과, 여객선 터미널에서 친절한 미소로 노약자와 장애인을 위해 봉사하며, 관광객들을 위한 안내 도우미 역할도 자청하고 있는 김센터장은 관에 도움을 요청하며, 생색내기도 할 수 있겠지만 여직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본인이 원해서 좋아서, 누군가 하면 좀 더 좋은 세상, 살만한 세상이 될 것 같아 할 뿐이란다
가진 것 다 내어주고 빈 몸으로 누구보다 부자로 살아가고 있는 큰 사람. 김창환센터장이 있기에 미항 목포의 앞날은 전국 그 어느 곳 보다 따뜻함이 넘치는 곳으로 기억 될 것이다.

최지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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