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함 팔라다
상태바
전함 팔라다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4.12.26 20: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함 팔라다호, 러시아 대문호 곤차로프의 한국 방문기

 
곤차로프는 “나는 본능과 상상으로 글을 쓰며, 이성보다는 ‘가슴’으로 글을 쓰는 ‘무의식의 작가’다.”라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주장했다.

곤차로프(И.А. Гончаров)의 "전함 팔라다"는 19세기 중엽 세계 여행기라는 측면에서 문학적으로 주목받았으며, 젊은 시절 안톤 체호프(А.П. Чехов)을 비롯한 여행을 동경하는 당대 사람들의 베스트셀러였다.

또한 영국, 일본 등의 식탁을 소개해주는 ‘식유기(食遊記)’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을 통해 당시 러시아가 인식한 조선의 역사와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곤차로프가 청국과 일본, 류큐(현재의 오키나와)를 서로 비교하고 각 나라의 역사를 소개하는 모습에서 당시 러시아인들이 동북아 지역에 대해 이미 상당한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한국과 러시아 관계사의 연구자가 주목했고, 2000년 이후 러시아인의 시선에 의한 한국이라는 주제로 다시 주목을 받았다. 기존에 조선과 러시아 관계사라는 측면에서 팔라다호가 주목 받았다면 이번에는 팔라다호에 비친 조선의 모습과 사람이라는 측면이 부각되었다.

그동안 학술적·문학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전함 팔라다??가 2014년 국내에 최초로 번역되었다. 이 책의 구성은 곤차로프가 제독 뿌쨔찐(Е.В. Путятин)의 비서로 ‘팔라다’ 함대에 승선하여 여정 중에 남긴 일지와 편지를 중심으로 되어 있다.

곤차로프는 러시아인 최초로 1854년 당시 조선의 거문도와 동해안을 탐사하고 관련 기록을 남겼다.

19세기 중엽 러시아 사실주의 대문호 곤차로프는 21세기의 어떤 작가보다도 대담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면서 세상의 진실을 파헤친 인물이었다.

곤차로프는 1812년 6월 6일(러시아력) 심비르스크(Симбирск)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곤차로프는 1820년 사제 트로이츠키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배웠다.

곤차로프는 1822년 모스크바 상업학교에 입학했고, 1831년 모스크바국립대학교 문학부에 입학하였다. 당시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는 게르첸, 레르만또프, 뚜르게네프 등이 다녔고, 곤차로프는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푸쉬킨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곤차로프는 제독 뿌쨔찐(Е.В. Путятин)의 비서(секретарь)로 전함 팔라다호를 탔고, 1852년 10월 7일 러시아를 출발해서 1855년 2월 13일 뻬쩨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곤차로프는 항해 중 일지를 작성하고 편지를 보냈다.

여행기는 1855-57년 사이 "전함 팔라다"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1858년 2권의 책으로 발간되었다.
러시아황제 니꼴라이 1세(НиколайⅠ)는 1852년 중국과 일본과의 개항을 추진하기 위해서 러시아 제독 뿌쨔찐(Е.В. Путятин)을 특사로 임명하였다.

팔라다호는 1852년 10월 7일 끄론슈따뜨(Кронштат)를 출항하여 영국에서 구입한 스쿠너 범선 ‘보스톡’(Восток) 호와 함께 극동으로 항해했다. 이들은 1851년 극동함대 소속 코르베츠 ‘올리부차’(Олибуца)호 및 수송선 ‘공작 멘쉬꼬프’(Князь меншков)호와 합류하여 1853년 8월 10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했다.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2일부터 4월 7일까지 거문도에 정박했고 1854년 4월 20일 조선 연안에 도착해서 5월 11일까지 동해안 조사를 시작했다. 곤차로프는 거문도를 직접 답사하며, 필담으로 조선 주민과 대화했다.

그 과정에서 서양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명명한 국가는 러시아였다. 조선의 동해안을 조사한 함대는 러시아 제독 뿌쨔찐이 이끄는 ‘팔라다’호였고, 독도를 발견한 함정은 ‘올리부차’호였다. 러시아는 19세기 중반 조선의 동해안을 탐사하면서 서도와 동도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독도의 명칭을 표기했다.

이는 러시아도 독도를 한국의 영역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무엇보다도 곤차로프는 조선인의 ‘호기심’을 포착한 인물이었다. 곤차로프는 조선이 중국과 일본보다 빨리 서양을 수용하여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호기심’을 주목했다. 20세기 한국의 눈부신 발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곤차로프는 조선에 관한 설명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익살을 부렸다. "언제 가보실 건가요? 어제 본 오페라의 감명이 금방 사라질 지도 모릅니다." 그는 한편의 감동적인 오페라를 간직한 한국을 누구보다도 먼저 포착한 서양인이었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