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진 금호장례식장 회장, 용해동 명예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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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진 금호장례식장 회장, 용해동 명예동장
  • 최지우 기자
  • 승인 2015.01.15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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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버는 재미보다 쓰는 재미여!”
 

10여년 아동센터, 경로당, 사각지대 후원
어려운 환경 이겨내고 7남매 키우며 봉사
꾸준한 나눔과 실천 삶의 목적이자 의무
적선은 남 아닌 나를 위한 비움의 최고 선물

나이 잘 먹는 방법 중의 하나가 있는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꼭 지키고 있는 것이라는 현대 어르신들의 신생활처세가 인터넷을 통해 공감을 얻고 있지만 올해 나이 70인 금호장례식장 이상진 회장의 살아가는 방법과는 거리가 좀 멀다. 

이상진 회장은 피를 나눈 내 자식 내 형제간도 아닌 남을 위해 아까운 돈을 쓰면서도, 행여 소외된 아이들이나 이웃들이 불편하고 힘들어할까봐 티내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펼치고 있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그의 미담은 여러 매체를 통해 소개되며 오히려 그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남들보다 좋은 직장도, 번듯한 차도, 그렇다고 가진 돈이 많은 것도 아니며, 철저히 계산된 정치적 야심이 있는 것도 아닌 그가 10여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주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마음을 쓰고, 정성을 들이며 살아가는 그의 삶을 재 조명해본다. 
 
“돈은 쓸려고 버는 것이여. 모아 두면 냄새나고 탈이 나는 법이제. 돈은 쓰고 나눠야 진짜 돈 값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나 먹고 살 것만 있으면 쓰고 나눠야 한다는게 내 지론이여“ 이 명확한 논제는 이상진 회장이 돈을 버는 목적이며 이유이기도 하다.

이상진 회장의 지난 10여 년간의 행적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으며, 나눔과 실천을 통한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건강하고 잘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상진회장의 선행은 연중 무휴로 진행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지역내 어려운 이웃들을 보살피며 진행 되고 있고, 매년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이상진 회장의 처음 봉사활동 시작은 동사무소 자생조직단체에 가입하면서 부터였고, 주민자치위원장을 맡아 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소외된 지역 구석구석을 살펴보면서 본격화 되었다. 떡국 나눔 행사나, 지역 공터 환경정비 활동, 자치센터 수강생들의 간식 지원, 이웃사랑 나눔 및 자생조직 송년의 밤 행사 등을 항상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주민자치위원장을 내려놓은 지금은 동사무소와 동민들이 추대해준 명예동장직을 겸허히 받아들여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소임을 다하고 있다.

지난 2012년 관내 5개소의 지역아동센터 정기적 후원과 간헐적 지원을 위해 동 단위로는 전국최초로 ‘사랑 나눔 후원회’를 구성 2천만원을 기부하고 그 후 매년 1천만원씩 3년 동안기부했으며, 앞으로도 매년 1천만원씩을 후원 할 계획이다.  아동원과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4년 전부터 설날이면 세배돈을 건네며 덕담을 건내고 있다. 

또 홀로 어렵게 살아가는 어르신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고 있으며,  경로당의 환경 개선 활동, 불우 청소년들에게 장학금 지급, 넉넉지 않은 살림에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한 가정 세대 돕기 등 우리 주변에 조금만 눈을 돌리면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요구되는 불우이웃부터 돕는 일에 솔선수범하고 있다.
이상진 회장은 “나눈다는 것은 남을 위하는게 아니고 나를 위하는 것이여. 나눠주고 얻는 기쁨과 행복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거든. 항상 마음이 가 있으니 이런 저런 도울일이 생각나고 궁금해지고 그래서 한 번씩 둘러보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줄 뿐이여 별거 아니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제” 라며 너스레를 떨지만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주위 지인들은 잘 알고 있다.

목포시청 김혜자 복지과장은 “우리가 일을 하다보면 관에서는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다. 그럴때면 이상진 회장님께 도움을 요청한다. 회장님은 아무런 단서도 이유도 달지 않고 무조건 달려가서 도와주시는 분으로 시에서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이상진 회장을 평했다.

이상진 회장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지원을 하고 있는 산돌지역아동센터 이지영대표는 “회장님이 아니였다면 우리 센터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어떻게 아시는지 항상 채워주신다. 아이들 컴퓨터와 에어컨, 여름철 물놀이비용, 겨울 난방용품까지 회장님의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회장님의 선행을 여러 군데 알리고 싶지만 회장님이 드러내 놓는 것을 원하지 않아 마음으로 항상 감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상진 회장은 신안군 압해면 분매리가 고향으로 그는 가난한 어촌마을에서 태어나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다. 고향에서 가사에 보탬이 되기 위해 농사일을 하면서 청년기를 보냈다. 전국 첫 최연소 마을 이장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지만 가난은 항상 따라다녔다. 27세 때 목포에 나와 돌 공장을 운영하는 중 공장에서 파 놓은 물 웅덩이에 어린이 2명이 익사하면서 공장 문을 닫아야 했고, 야심차게 시작했던 건설회사 마져 경험 부족으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까지 그의 인생에서 성공은 단 한 번도 와주지 않았다.

40대 빚더미에 앉은 이상진 회장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5남2녀의 아이들을 최소한 먹여야 했기에 남들이 꺼리는 장의업에 뛰어들었다. “아내와 함께 직접 염을 하고 상주들을 상대하며 밤잠 안자고 열심히 일을 했제. 우리가 하도 열심히 일을 하면서 빚을 갚아나가니까 빚쟁이들도 빚을 탕감해주고, 이자도 줄여주고 그러드라고. 세상은 독하지 만은 않은 법이구나 느꼈제. 그때부터 남들한테 눈을 돌리기 시작했을 거여. 그래도 남 갚아줄 빚이 남아 있으면서 기부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아내의 도움이 컸제, 반대하면 못했을 건데 나보다 더 좋아 하드라고. 지금의 내가 있는 건 다 아내의 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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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진 회장네는 2년 전에야 젊은 시절 사업하며 졌던 빚을 다 갚았다고 한다. 이상진 회장이 특별히 아이들에게 더 관심과 애정을 쏟는 이유는 막내가 세살 때 한창 유행이던 뽀빠이 과자를 먹고 싶어 했지만 수중에 단돈 천원이 없어서 사주질 못한게 한이 되었다고 한다. 귀한 아이들이 자라서 이 나라를 책임지게 되고, 자신의 미래또한 책임지게 될 것이란 윤회를 믿기에 그의 어린이 사랑은 더 빛나고 끝이 없다.
“내가 가난하게 살았기에 우리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어. 그게 항상 한이 되고 미안하지만 한편으론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드라 위안을 받으며 살제. 아무 탈 없이 잘 커서 지금은 잘 살아주니 내가 항상 감사하고 고마워해”

자녀에 대한 가슴 아픈 그의 사랑은 그대로 전달되어 지금은 대를 이은 봉사를 진행 중이다. 아버지의 욕심 없는 기부에 대해 찬성하고 지지하고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아버지를 지켜주고 있는 자녀들이야 말로 이상진 회장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요즘 그는 힘들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밑거름이 돼 목포요양보호사교육학원에서 “돈 때문에 못 죽겠네”라는 인생강연도 하고 있다. 힘든 시대를 살아오며 나눔 실천으로 숭고한 가치를 펼치고 있는 그의 강연은 교육생들에게 감동을 전하며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현실사회에서 물질보다 정신적 풍요가 더 중요하다는 진리를 알리고 있다.

“적선은 꼭 돌아오는 법이여,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나를 돕는 것이여. 욕심을 버리면 이렇게 행복하고 세상이 즐거운데 왜들 아둥 바둥 사는지 안타까워. 어려울 때 지혜롭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여”지역의 많은 칭송과 도움 받은 사람들의 감사 속에 당당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이상진 회장의 잘 사는 방법은 나눔의 봉사였다. 새해엔 이상진 회장의 비움의 나눔 철학이 널리 널리 전파되길 간절히 빌어본다.
최지우기자(tm01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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