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해양시대 섬 주민들의 삶 흔적 켜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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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해양시대 섬 주민들의 삶 흔적 켜켜이
  • 강봉룡 교수
  • 승인 2015.01.20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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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전 한반도 역사 고스란히 문화 보고
상장례, 밤달애, 다시래기, 유배유산 등 남아
섬 민속예술 소멸 위기…체계적 정리 숙제도

▲ 강봉룡 교수
▲ 섬 문화유산(Island Cultural Heritage)의 창조적 활용
섬에는 섬 주민들의 삶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형성된 독특한 섬 문화가 있다. 우리나라의 섬 문화는 시대에 따라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난다. 해양활동이 활발했던 고려시대까지는 국내외 해상교류의 인상적인 문명의 흔적들이 섬에 남아 있다. 반면 해양활동을 금지하고 공도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엔 인상적인 문명의 흔적은 거의 없다. 대신 조선후기에 입도하여 새로 정착한 섬 주민들이 유지해온 독특한 삶의 문화가 남아 있다. 이들을 통틀어 ‘섬 문화유산’이라 부르기로 하자.

전라남도 다도해에는 ‘섬 문화유산’이 대조적인 두 시대로 극명하게 나뉘어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 이들은 전남 다도해의 미래 비전을 운위할 때 가장 중요한 문화적 기반이 된다. ‘옛 해양의 시대’였던 고려시대까지, 그리고 ‘해금의 시대’였던 조선시대의 두 시대로 나누어 신안군 여러 섬들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을 소개하고, 그 보존과 활용의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기로 한다.

△ ‘옛 해양의 시대’의 섬 문화유산
해양활동이 활발했던 ‘옛 해양의 시대’(고려시대까지)에, 서해와 남해를 연결화는 결절점에 위치한 전남 다도해의 섬들은 국내외 바닷길(해로)의 징검다리로 기능했다. 연안의 섬들은 연안해로의 징검다리로, 먼 바다의 섬들은 황해를 가로질러 중국에 이르는 황해 횡단해로의 징검다리로 기능했다. 전라남도의 섬들에는 이러한 흔적들이 도처에 남아 전한다.

먼저 연안의 섬인 신안군의 안좌도, 장산도, 비금도, 지도, 하의도, 신의도, 청산도 등지에 고분이 남아 있고, 압해도, 임자도 등지에는 고분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장산도, 신의도, 비금도, 압해도, 임자도 등지에는 고대 산성으로 추정되는 산성이 잔존해 있다. 이러한 고분과 산성들은 이들 연안의 섬들이 고대 연안해로의 징검다리로 기능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 백제시대에 압해도와 장산도와 임자도에 각각 아차산현과 거지산현과 고록지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백제가 이들 섬들을 해로의 거점으로 편제했음을 보여준다.

통일신라시대의 사례로는 장보고가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주도하면서 핵심 거점으로 활용했던 완도 청해진유적이 대표적이고, 고려시대의 사례로는 삼별초가 몽골에 항쟁하면서 근거로 활용했던 진도의 용장산성이 대표적인 섬 문화유산이다.

다음에 먼 바다에 위치한 흑산도의 읍동 마을에는 흑산도가 고대 한-중해로의 징검다리로 기능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절터, 건물터, 제사터, 봉수터 등의 유적지가 확인되었고, 수많은 도자기편, 기와편, 문초석, 철마 등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9세기에 일본 고승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나 12세기에 송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 그리고 18세기에 이중환이 쓴 『택지지』 등의 문헌들은 흑산도가 고대 한-중해로 상의 주요 거점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유적과 유물과 문헌에 의거할 때, 흑산도 읍동 마을엔 국제해양도시가 형성되어 성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 ‘해금(海禁)의 시대’의 섬 문화유산
해양활동을 금지하고 천시했던 ‘해금의 시대’(조선시대)에, 당국은 섬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는 공도정책을 폈다. 자연 섬은 버려진 공간으로 전락했다. 조선 후기에 사람들이 섬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으나, 섬은 여전히 금기의 땅으로 간주되어, 섬 주민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대를 무릅쓰고 섬과 바다를 개척하면서 굳건히 삶을 영위하면서, 우리의 문화를 원형태로 유지-전승해왔다. 우리의 원형문화는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육지에서는 유교문화에 의해 교화(敎化)되어 거의 소멸되어 버렸지만, 섬에는 그 일부나마 남아 있다. 진도의 상장의례(씻김굿, 다시래기, 만가 등), 비금도의 뜀뛰기 강강술래와 밤달애, 장산도의 씻김굿과 들노래, 가거도의 산다이와 멸치잡이노래,  거문도의 뱃노래, 조도의 닻배노래, 그리고 도서지역 도처에 남아 있는 초분 등이 그것이다. 섬 주민들은 우리 원형문화의 지킴이 역할을 담당해왔던 셈이다.

먼저 진도의 상장례는 죽은 이의 영혼을 씻겨서 산 자와의 아름다운 이별을 고하는 과정을 연행하는 씻김굿과 상주와 그 가족들을 달래기 위해 축제식 장례식을 연출하는 다시래기, 그리고 출상할 때 운구하면서 부르는 만가 등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며 전한다. 비금도의 밤달애는 다시래기처럼 일종의 축제식 장례식이다. 마을 주민들은 엄숙해야할 장례식장에서 어우러져서 밤새워 북치고 장고치고 춤추며, 심지어는 남사당패의 놀이까지 동원하여 논다. 비통한 죽음의 슬픔을 놀이로 치유하려 했던 우리의 독특한 장례풍속이다. 유교문화의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지만, 유교문화에 의해 교화되기 이전에는 육지에서도 행해지던 우리의 원형문화에 해당한다.

비금도의 뜀뛰기 강강술래는 남녀가 어우러져 역동적으로 뜀뛰기를 하며 즐기는 강강술래로서, 여자만의 놀이인 타지역의 강강술래와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아마도 타지역의 강강술래가 남녀유별의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여자만의 놀이로 변모했던 것에 반해, 비금도에서는 남녀가 함께 즐기는 강강술래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산다이는 미혼의 젊은 남녀들이 어울려 노래부르고 춤추며 신명나게 즐기는 놀이문화이다. 역시 남녀유별의 유교문화에 의한 교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원형문화의 한 사례이다. 가거도의 멸치잡이노래나 조도의 닻배노래, 그리고 거문도의 뱃노래 등은 흥을 돋워서 어로노동의 힘겨움을 견뎌내려 했던 섬 지역 특유의 집단 노동요이다.

초분은 두 번 장사지내는 이차장(二次葬)의 일종이다. 사람이 죽으면 지상에 간단한 단을 만들어 시신을 모시고 이엉으로 덮어두었다가 3~4년이 지나 시신이 육탈(肉脫)한 연후에 다시 뼈만 추려서 땅에 묻는 장제이다. 역시 육지에서도 행해졌으나,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사라진 원형문화가 섬에 유지되어온 또 하나의 사례에 해당한다.

이밖에 ‘해금의 시대’ 전남 다도해의 인상적인 문화로는 유배문화와 표류문화가 있다. 유배문화는 크게 흑산도권과 지도-임자도권, 완도권으로 나눌 수 있는데, 흑산도권에는 손암 정약전, 면암 최익현 등이 저명하고, 지도-임자도권에는 중암 김평묵, 우봉 조희룡 등이 저명하며, 완도권에는 원교 이광사와 송촌 지석영 등이 저명하다. 표류문화로는 우이도 문순득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표류하여 오키나와, 필리핀 루손, 중국 마카오 등을 거쳐 3년만에 우이도에 돌아왔는데, 마침 그곳에 유배와 있던 정약전이 그의 표류 경험담을 듣고 글로 작성했으니, 우리나라 표류기의 백미라 할 <표해시말(漂海始末)>이 그것이다.

△ 방향과 전략-보존과 창조적 활용
조선 500년 해금정책의 영향으로 인해, 우리에겐 섬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있다. 그 이전 ‘옛 해양의 시대’였던 고려시대까지 섬에서 상당한 문명이 꽃핀 사례가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인지하는 사람들도 적다. ‘해금의 시대’에 섬 주민들이 지켜온 우리의 문화원형들이 섬에 살아 있다는 사실도 잘 모른다.

전남의 여러 섬에는 다채로운 섬 문화유산들이 허다하게 남아 있다. 이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어 이를 조사-정리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우선 시급하다. 더 나아가 이를 알리고 창조적으로 활용하려는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

먼저 ‘옛 해양의 시대’에 남겨진 ‘섬 문명’의 흔적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완도 청해진유적과 진도 용장산성유적에 대한 발굴은 상당히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로 이루어졌지만 여타 섬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는 그 중요성에 비해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안좌도 고분에 대한 간단한 발굴조사와 신의도에 밀집해 있는 수십기의 고분들 대한 개괄적인 조사, 그리고 흑산도 읍동마을에 대한 두세차례의 간략한 시굴조사가 고작이다. 특히 동아시아 해로의 주요 거점에 위치한 흑산도 읍동마을은 고대 국제해양도시가 있었던 곳으로, 청해진유적이나 용장산성유적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장기 정밀발굴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발굴과정에서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청하여 흑산도 고대 국제해양도시의 살상을 널리 알리는 전향적 기획도 필요하다.

다음에 ‘해금의 시대’에 남겨진 우리의 문화원형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어, 이에 대한 엄밀한 조사와 기록(문자, 음성, 영상)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시급하다. 필요에 따라서는 문화재로 추가 지정하거나 우수한 사례에 대해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죽음의 의례인 진도의 상장례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겠다.

진도의 상장례는 앞에서 거론했듯이 씻김굿과 다시래기와 만가가 하나의 세트를 이루며 행해지는 의례이다. 죽음에서부터 장지에 모셔지기까지 독특한 의례의 전과정이 이처럼 온전하게 전해오는 사례는 아주 드물다. 그런데 그 각각이 별도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별개의 문화현상인 것처럼 오인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에 세 과정을 진도 상장례라는 하나의 의례로 통합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시도할 것을 제안한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한편 오늘날 시대와 환경의 변화가 크게 일어나고 있는 만큼 섬에 전해오던 원형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 먼저 이에 대한 엄밀한 기록으로 정리해야겠지만, 한편으로는 민속예술을 오늘의 정서에 맞는 공연 작품 등으로 재창작하여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섬 여행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관광객들이 진도의 다시래기나 비금도의 뜀뛰기강강술래, 그리고 거문도의 뱃노래 등의 시연(試演)에 매료되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장산도의 들노래와 씻김굿 등도 새로운 창작공연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소지가 충분하다. 이와 관련하여 하와이의 훌라춤이 벤치마킹의 사례가 될 수 있다.

지역축제에서 섬의 민속예술을 적극 소개하는 것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진도의 신비의 바닷길 축제에서는 진도의 다양한 민속예술들을 무대에 올려 축제 방문객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목포 해양문화축제에서도 전남의 서남해의 섬 지역에 전해오는 다양한 민속예술을 차례로 무대에 올려서 축제의 콘텐츠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하면서, 보존과 활용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모색하는 일을 추진해갈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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