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제대로 알자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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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 <8>
  • 정거배
  • 승인 2015.03.2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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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전남뉴스 기자, www.ohmyjnews.com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과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전 세계에 이전의 미국보다 더 큰 영향 미칠 것’

지난 연재까지 중국의 역사를 대충 개괄해 봤다. 거대한 대륙, 다양한 전통과 문화를 가진 중국의 장구한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은 분명하다. 그 중 19세기 아편전쟁부터 시작된 중국의 근현대사는 고난과 도전의 역사였다. 또 20세기 오랜 기간 국공내전과 항일전쟁 등 중국이 헤쳐 온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오늘의 중국을 이해하는 단서가 되기를 기대한다.

1911년 쑨원을 주축으로 한 신해혁명은 만주족이 지배해 왔던 청조왕조와 붕괴와 함께 봉건체제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 뒤 1927년부터 2차례 국공내전 등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이 주도한 신민주주의 혁명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으로 이어졌다. 

혁명 1세대의 퇴장과 문혁의 종말
신중국 건국 이후 대약진 운동의 50년대를 거쳐 1966년부터 촉발된 문화대혁명은 중국 대륙을 10년 간 암흑기로 몰아넣었다. 1976년 1월과 9월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혁명 1세대가 역사의 무대 뒤로 퇴장하고 문화대혁명도 막을 내렸다. 10년 간 계속된 문화혁명 기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4인방도 해체됐다. 마오쩌둥의 부인이었던 장칭(江?)을 비롯 정치국 위원이었던 야오원위안(姚文元),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왕홍원(王洪文), 정치국 상임위원 겸 국무원 부총리 장춘차오(張春橋)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덩샤오핑(鄧小平)은 국민당군에 쫓기던 1934년 대장정 당시 30세에 불과한 키 작고 왜소한 청년이었다. 그가 이제 문화대혁명이 끝나마자 중국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중국 공산당 혁명 2세대인 그는 1978년부터 1983년까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1981년부터 1989년까지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아 역사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총 설계하고 주도하게 되는 주인공이다.

1978년 개혁개방 시동을 걸다
중국은 마오쩌둥 사후 2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78년 12월부터 개혁개방에 본격 착수했다. 덩샤오핑은 1978년 정치공작회의에서 “당장 개혁을 추진하지 않으면 우리의 현대화 사업과 사회주의 건설사업은 매장당할 것”이라며 당시 문화대혁명을 추종하는 세력에 대해 비판하면서 시장의 해방과 실사구시, 전진을 위한 단결을 역설했다.

문화혁명 이후 중국의 앞날을 결정할 중요한 시기가 됐던 그해 12월 8일 열린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제11차 삼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4개 현대화 노선 및 개혁개방 방침을 발표하게 된다. 다음해인 1979년에는 그동안 집단 생산책임제였던 농촌의 체제를 가족단위 생산책임제로 전환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게 된다.

80년 8월에는 당시 영국에 속한 홍콩과 가까운 광둥성 선전(深?)을 비롯해 포르투갈령인 마카오를 마주보고 있는 주하이(珠海), 그리고 타이완을 마주하고 있는 푸젠성 산터우(汕?)와 샤먼(廈門)을 경제특구로 지정한다. 이어 84년에는 상하이 등 14개 연안도시가 개방된다. 덩샤오핑은 시장경제체제 도입에 대해 과거 사회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며, 이른바 덩샤오핑 이론인 과학적 사회주의를 역설하며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이념을 제시하게 된다. 1984년 물가상승 등 부작용과 시장경제 체제 도입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80세인 그는 4년 전 경제특구로 지정됐던 선전을 방문했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전유물 아니다‘
그는 여기서 “나는 이제껏 걸어 온 길을 되돌아 가지 않는다. 삶은 걸어온 길을 되돌아 갈 수 없는 등산과 같다. 선전의 눈부신 발전이 우리의 경제정책이 옳았음을 증명한다”며 개혁개방정책 추진을 거듭 역설한다. 그 뒤 1989년 6월 4일 베이징 텐안먼 사태로 당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가 실각했다. 중국은 지난 78년 개혁개방 이후 계속된 시행착오와 정책을 둘러싼 논란 등으로 불안한 국면은 지속됐고, 연 20%를 웃도는 물가폭등으로 톈안먼 사태라는 체제 위기까지 겹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보수파 지도부가 권력을 장악한 가운데 장쩌민(江澤民)이 당 총서기에 취임한다.

이런 가운데 중국대륙 밖에서도 격동이 이어졌다. 1989년 9월 폴란드 등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된다. 1990년 10월 3일에는 동독과 서독이 하나의 독일로 통일이 되고 급기야 1991년 12월 25일 소련연방이 붕괴된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 공산당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은 것이다. 사회주의 해체를 지켜보던 서구 국가들은 이제 중국을 주시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하지 않았으며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개혁개방 정책을 고수할 것이며 발전만이 가장 중요한 도리”라고 강조했다.
 
‘계획· 시장 경제는 발전 위한 수단’
그는 또 88세의 노구를 이끌고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2일까지 연해 경제개방도시에 속하는 우한(武漢), 선전(深?), 주하이(珠海), 상하이(上海) 등을 시찰하면서 담화를 발표한다.  

유명한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로 기록된 그의 발언은 훗날 중국에서 사회주의 이념의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 그는 “자본주의는 수백년 동안 진화해 왔지만 우리는 겨우 몇 년 밖에 투자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회주의를 개혁개방 없이 경제개발과 생활환경을 개선하겠다면 그것은 막다른 길 밖에 없다”고 못박았다.

이어 “시장과 계획이란 이름으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구별할 수 없으며 계획경제와 사회주의는 같은 말이 아니다. 또한 시장경제가 곧 자본주의는 아니다”고 역설했다. 그가 제시한 사회주의의 본질은 “자본주의에도 계획은 있고 사회주의에도 시장은 존재하며 계획과 시장은 모두 경제개발을 이루는 수단일 뿐”이라고 정리한다.

덩샤오핑 이론이 된 그의 담화는 “생산력의 발전과 착취와 양극화 해소, 공동의 부를 달성하는 것”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제시했다. 그 후 장쩌민 주석은 1992년 중국 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시장경제의 장점을 받아들이면서 사회주의 잇점을 유지한다”는 이른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다시 정리해서 밝혔다. 톈안먼 사건으로 일시 주춤했던 개혁개방정책은 다시 추진됐고 사영기업 육성,400여 가지의 규제완화 등 경제개방에 속도가 붙었다.

1934년 10월 장제스의 국민당군의 포위 공격에 필사의 탈출을 시도한 공산당의 대장정은 무기와 전력 등 모든 면에서 우세한 장제스가 패배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장제스는 영국과 미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비행기를 타고 오가며 전투를 지휘했다. 쫓기는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맨발로 강과 협곡, 설산을 넘으며 죽음의 행진을 했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 이후 시작된 내전에서도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장제스의 국민당과의 비교했을 때 절대적인 열세였다. 그런데 장제스의 국민당은 타이완 섬으로 쫓겨났고 공산당은 승리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했지만 당시 서구 사회를 비롯한 세계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중국이 서구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될 줄로만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동유럽 사회주의 해체를 보면서 중국에 대한 서구의 전망은 대부분 비관적이었다.

중국의 영향력, 경제로 국한되지 않을 것
그러나 개혁개방 30여년 만에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G2국가로 부상하고 미국과 경쟁하며, 전 세계에 이처럼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줄은 대부분 예측하지 못했다. 세계가 장제스의 국민당과 대결에서 공산당의 승리를 예측하지 못했고, 오늘 중국의 변화와 부상에 대한 예측이 빗나간 이유 역시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관점으로 바라본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상하이 화둥사범대학 왕샤오밍(王曉明)교수는 지난 2009년 4월 한국에서 출판된 책 <21세기 중국의 문화지도> 서문에서 “서양 이론을 끌어와 이 변화를 명확하게 분석할 수 있을 것이라던 1980년대의 보편적인 믿음은 이제 사라졌다. 새로운 중국과 새로운 전 지구적 세계체제에 대한 서양 이론들의 해석능력은 점점 그 한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의 저자 마틴자크는 그의 책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주로 경제부문에만 국한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오히려 중국은 정치적, 문화적으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중국이 발휘할 영향력은 지난 세기 미국이 (세계에) 끼친 영향력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전망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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