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당동 주민자치위원회 박홍용 (홍용한약제분소)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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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동 주민자치위원회 박홍용 (홍용한약제분소)고문
  • 최지우 기자
  • 승인 2015.03.30 1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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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이기고 큰마음으로 나누는 참 봉사꾼
▲ 한 평 남짓 그의 약방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편하게 찾는 고민 해결소 역할을 하고 있다

30여 년째 지역 아동센터 8군데 정기적 봉사
20년째 지역 어르신들 자비 길거리 경로잔치
평생 힘닿은 한 꾸준한 나눔 진행 계속 할 터

3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 장애 4급이라는 천형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남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힘없고 의지할 곳 없는 동네 어르신들의 든든한 보호자 역할을 하며, 30여 년간 지역의 참 봉사꾼으로 칭송을 받고 있지만 자신은 당연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이가 있다.

그의 한 평 남짓한 약방에는 몸이 아픈 사람, 마음이 아픈 사람, 억울한 사람, 힘들고 외로워서 한마디 위로라도 듣고 싶은 사람들이 잠시 아픔을 놓고, 억울한 사연을 풀고, 위안을 받아가는 동네의 사랑방 역할을 한다.

주는 기쁨을 만끽하며, 내 세우는 봉사가 아닌 섬기는 봉사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는 용당동주민자치위원회 박홍용고문 (홍용한약제분소)의 꾸밈없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아픈 다리를 많이 쓰지 않고 손으로 할 수 있는 신체교정을 배운 박고문은 목포 유명 한약방에서 일을 하며 한약조제 공부를 해 지금까지 홍용한약제분소를 운영해오고 있다.

초창기 시절 동네사람들 때문에 돈을 벌어 1남2녀를 키운다는 고마운 생각에 작게나마 사회 환원을 하기로 결심하고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 수용시설을 찾아 봉사를 시작했다.

목포 공생원, 재활원, 목포 아동원, 일로 소전원 등 한군데 두 군데 다니기 시작한 시설 봉사가 22년째로  지금은 8군데의 시설 봉사를 하고 있다.  시설 봉사는 처음엔 홀로 시작했지만 박 고문의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사랑의 연결고리’라는 단체를 조직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래서 박고문에겐 수 백 명의 아들,딸들이 있다. 시설에 머무는 아이들은 박 고문을 아빠라고 부르며 따르고 있으며, 지난 구정 때는 생전 처음 한복을 입고 아이들의 세배를 받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명절 때면 세배를 할 사람도 없고 우리 옛 풍습에 대한 얘기도 예절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기에 더 외롭고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서 쑥스러웠지만 아이들의 세배를 기쁜 마음으로 받고 덕담을 했다고 자랑했다.

박 고문은 “나는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며 나눔의 기쁨을 느낀다면 우리 지역은 사랑이 가득한 곳이 될 것이다. 나는 어쩌면 몸이 불편해서 더 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지 모른다. 어릴 때 친구들의 놀림은 상처가 되었지만 내 스스로 상처를 보듬어 안고 치유하면서 내 마음을 키워 나갔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비장애인과 같았다면 난 아마 남의 아픔과 나눌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했을 것이다”고 했다.

세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인한 장애4급 판정을 받았고 박고문이 처음 봉사를 시작했던 단체도 소아마비 퇴치 운동을 펼쳤던 로타리클럽 이였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고, 아픔과 추억이 공존하는 영암 삼호 서창초등학교는 박고문의 출신학교로 매년 두 명의 후배에게 27년째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기도 하다.
서창초등학교 ‘홍용장학회’는 장학기금을 조성해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박고문이 매년 자비로 지급하고 있어 학교뿐 아니라 후배들에게 남다른 의미로 전해지고 있다.

아이들에게 정성을 쏟고 봉사를 계속하던 박고문에게 지역의 어르신들이 눈에 들어왔다.
영암이 고향인 박고문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만 모시고 살고 있었고, 하는 일이 한약조제와 신체교정이여서 어르신들과 함께할 시간이 많았었다.

집도 없이 남들한테 돈을 다 쓴다는 어머니의 핀잔을 받아가며 동네 어르신들을 위한 잔치계획을 세웠다. 길거리를 막아 돼지를 잡고 음식을 장만해 지역 거주 어르신들을 초청, 준비된 공연과 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처음 작게 시작했지만 해마다 규모가 커져서 지난해 5월엔 700여분을 모시고 20년째 행사를 마쳤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비로 행사를 진행하다 보니 힘들고 어려운 점이 많이 있지만 기다리는 어르신들과 오랫동안 해왔던 행사를 중단한 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올해도 생각중이라고 한다.
박고문의 이런 선행이 알려지면서 지난 2010년에 사회봉사부분 자랑스러운 전남인 상을 받기도 했고,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비롯해 해마다 많은 상을 수상했지만 별로 자랑할게 못 된다고 한다.

박 고문은“상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다.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 내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우러나서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해서 하기 때문에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

박 고문은 자신이 번 돈을 먼저 봉사금액으로 정해 놓기에 50이 넘은 나이에 처음 내 집 장만을 했다
처음엔 불편한 몸으로 힘들게 번 돈을 남을 위해 쓰고 있는 아들이 못 마땅해 핀잔을 주던 어머니도 이젠 대견스러워 하고, 가족들도 욕심과 대가없이 남을 위해 봉사하며 흐트러짐 없는 생활로 주위의 존경을 받고 있는 아버지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뜻을 받든다고 한다.

“아이들도 자신들을 위한 유산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한테 독하다고 한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봉사를 할 것이며,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비록 달려가지는 못하지만 최대한 노력하며 갈 것이다. 내 주위 가까운 곳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에 조금만 신경을 쓰고  본다면 도움 줄 것이 많이 있을 것이다”는 말로 미래 계획과 바람을 밝혔다.

최지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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