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시 북항환경관리과 수질담당 김종인 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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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 북항환경관리과 수질담당 김종인 계장
  • 최지우 기자
  • 승인 2015.05.06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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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만큼 나누고 살아야 하는 것이 진리지요”

23년째 매년 1천여만원 불우시설 정기적 기부
어린 시절 가난으로 성덕원 생활 이젠 되갚아야
퇴직 후 자유로운 생활 희망, 찾아가는 봉사 할 터

부와 명예, 권력을 다 가지고자 헛된 욕심을 부리다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에 대한 뉴스는 보는 이들에게 살아가는 목적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심각한 도덕적인 결함으로 소속된 단체에서 도태 되어야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 대한 소식 또한 평범하지만 알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훈으로 남는다.

요즘 같은 세상 개인적이고, 메마른 인심으로 인해 점점 인정에 굶주려 가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는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회자되고 더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여기, 가난으로 인해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며 버텨야 했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반듯이 성장해 수십 년 동안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매년 천만 원이 넘는 돈을 기부하고 있는 북항환경관리과 수질담당 김종인 계장의 아름답고 숭고한 삶의 모습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힘든 이들에게 한 줄기 희망으로 힘을 주고 있다.

“세상 이치는 비운만큼 채워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난 가진 것이 돈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만큼 마음이 부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별난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고, 모든 이들이 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행복의 가치를 조금만 바꾸면 된다. 한 끼 밥이 절실할 때는 밥만 먹으면 됐지만 요즘엔 너무 과한 욕심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같아 많이 안타깝다”며 특유의 선한 미소를 지었다.

김종인 계장은 매월 정해진 월급에서 성덕원을 비롯해 영빈장애인 시설, 목포 아동원 등 정기적으로 기부를 하는  나누는 삶을 20년이 넘게 해오고 있다.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다. 뻔한 공무원 봉급으로 마음이 쓰이는 여러 단체에 기부를 하는 것은 어린 시절 그 자신도 사회단체의 도움을 받으며 자랐기에 되갚아 주자는 생각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신안 암태가 고향인 김 계장네는 섬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가난하지만 평범한 농가였다. 누나와 두 동생들과 함께 바다를 배경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행복한 유년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나이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들처럼 떼쓰고 어리광 부리던 어린 시절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목포로 이주를 했고, 혈연단신 여자 혼자 몸으로 행상을 했지만, 넷이나 되는 자식들을 거둬 먹이기엔 너무나 힘들고 버거운 일이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지난하고 고달픈 생활을 이어가던 김계장네 4남매는 엄마와 떨어져 보육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 당시 누나가 11살, 김계장이 9살, 두 동생이 8살, 4살 이였다. 어린자식들을 두고 하루 종일 행상으로 벌어오는 수입은 하루 한 끼 먹는 건 해결된다고 해도 학교까지 보낼 수 있는 형편이 못 됐다. 그래서 4남매는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를 시켜 가난을 대물림하기 싫었던 어머니의 결심으로 성덕원에 맡겨진 것이다. 낯선 환경, 사회적 편견, 배고픔은 다 참을 수 있었지만 사무치게 그리운 엄마에 대한 사랑은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앞서는 아픈 추억이다.

“성덕원은 재워주고 먹여주고, 거기다 공부까지 시켜주는 곳이였으니 우리형제들한테는 딱 맞는 곳 이였다. 그 때엔 누구나가 다들 힘든 시기였었다. 그래도 우리는 형제들이 함께 있어서 견딜 수 있었는지 모른다. 세 동생을 거두느라 누나가 말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고생을 했다”며 지금은 서울에서 생활하는 누나에 대한 고마움을 안고 살아가는 남다른 과거에 대해 담담히 얘기했다. 현재는 다들 기반잡고  잘 살고 있기에 힘들었던 지난날을 웃으면서 더듬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으며, 더 단단한 형제애를 과시 하고 있다.

김계장의 보육원 생활은 웬만큼 기반을 닦은 어머니가 4남매를 데리러 올 때까지 계속 됐다. 그렇게 성덕원은 김계장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아픔과 고마움이 공존하는 곳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네 아이들 데려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몸이 부서져라 고생하며 눈물의 세월을 보냈던 어머니는 현재 큰 아들인 김계장의 효성으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십여 년 동안 이일 저일 경험을 쌓으며 생활하던 김계장은 당시 유행하던 고압가스 자격증을 취득하며 목포시청 기술직 입사를 하게 된다. 어릴 적 꿈이였던 공무원의 꿈을 이룬 것이다. 그의 나이 28살 때였다.

자신을 믿고 따라준 아내와 결혼도 했고, 두 아이도 무럭무럭 잘 커나가면서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자 김계장은 어린 시절 받았던 도움에 대한 보답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사회 환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성덕원부터 시작했었다. 처음 성덕원을 다녀와서 느꼈던 뿌듯한 감격은 잊을 수가 없다. 해가 거듭되면서 이곳저곳 도움 요청 받은 곳과, 직접 눈길이 닿는 곳, 시청의 추천을 받은 곳 등 여러 곳에 후원을 하며 오늘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잘 자라준 1남 1녀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이며, 자신들의 삶 또한 아버지처럼 살기를 원한다고 한다.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번만큼 나누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항상 듣고 자랐기에 자녀들 또한 나누는 삶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실천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많이 가진 사람이 조금만 나눈다면 이 사회는 더 행복하고 살기 좋은 곳이 될 텐데 안타깝다. 이제 얼마 후면 정년을 하게 된다. 아무 구속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면서 주위 도와주고 싶은 곳과 좋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고 계획을 밝혔다.

김종인 계장은 앞으로도 작은 금액이지만 꼭 발로 찾아가서 마음과 함께 전달하는 자신만의 기부 방식을 고집하며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초심을 잃지 않는 봉사자로 남고자 하는 마지막 희망 또한 놓지 않는다.

최지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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