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와 명나라 정화의 대원정이 다른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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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와 명나라 정화의 대원정이 다른 점
  • 정거배
  • 승인 2015.06.1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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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세계의 약진은 식민지 확보와 노예거래 때문

▲ 역사적으로 중국과 서구가 세계를 보는 관점이 달랐다. 미국을 포함한 서구세계는 자신들 이외의 다른 대륙을 정복과 침탈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70년 전 아프리카까지 항해했던 명나라 제독 정화의 대원정 사례를 통해 서구와 중국이 세계에 접근하는 방식을 소개한다.
▲ 정 거 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 www.ohmyjnews.com>
미국을 포함한 서구세계가 노예거래와 식민지 확보가 없었다면 다른 대륙에 비해 획기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서구가 200년 동안 패권자로서 세계질서를 주도한 것은 이같은 일방에 대한 희생과 침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서구가 다른 세계에 접근하는 방식과 중국이 보는 관점의 차이에 대해 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1492년 이탈리아 출신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건너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신대륙 발견’으로 명명된 역사적 사건은 황금을 노린 약탈을 전제로 진행된 원정이었다. 콜럼버스는 특히 중남미 대륙에 상륙해 집단학살이라는 정책을 통해 약탈을 자행했다.

지금의 중남미 도미니카 지역인 카리브해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지상낙원처럼 아름다운 이 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 타이노족을 무력을 앞세워 유럽으로 강제 수송했고 다수는 학살했다.

신대륙에 대한 침탈과 인종청소
이들에게 금을 가져오게 해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수족을 잘랐다. 당시 25만명에 달했던 타이노족은 홀로코스트와 같은 인종청소와 강제로 유럽으로 노예로 끌려가면서 2년 만에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결국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60년 만에 타이노 원주민은 수백 명만 생존하다가 100년이 흐른 뒤에는 종족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줄었다. 콜럼버스처럼 서구인들이 노린 것은 금과 보물을 얻기 위한 항해였으며 잔혹한 정복자이자 착취와 약탈 그리고 인종청소였다. 더구나 유럽 정복자들은 천혜의 지상낙원 신대륙에 전염병까지 번지게 했다. 

그러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 70년이나 앞서 아프리카까지 대항해를 했던 명나라의 제독 정화(鄭和,1371~1434)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정화의 원정이 있었고 70년 뒤 1492년 콜럼버스는 당시 250톤 규모의 배 3척에 120여명과 함께 대서양을 건넜다. 그에 반해 명나라의 정화는 무려 길이가 130미터에 이르는 함선 등 62척 이상의 선박을 이끌고 2만7천8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선단으로 대원정을 했다. 그것도 원정은 1400년대 초에 7차례에 걸쳐 진행됐으며, 콜럼버스의 항해와 비교했을 때 조선기술이나 선단에서부터 유럽을 능가한 규모였다.

정화의 선단, 유럽 항해기술 압도
정화의 원정과 관련 지난 5월 중국에서는 흥미로운 기사가 보도됐다. 당시 대원정을 주도했던 명나라 정화 제독이 함대를 건조한 조선소로 추정되는 곳이 발견됐다는 소식이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와 중국 언론들은 난징(南京)시 장강(양자강) 유역에서 신축공사를 벌이던 건설노동자들에 의해 옛 정화 함대 함선을 만든 룽장(龍江) 조선소로 추정되는 곳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정화 함대는 당시 명나라 초기 수도였던 난징의 룽장조선소에서 건조됐는데 도크에선 후난(湖南)이나 광둥(廣東)에서 온 조선공 3만명이 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중국 당국은 이밖에 아프리카 케냐 해안에서 좌초한 것으로 알려진 정화함대 난파선을 찾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의 지시로 1405년 겨울 첫 원정을 시작으로 1430년 12월까지 있었던 정화의 원정은 모두 7차례 중국대륙 동해안을 출발해 동남아시아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고 인도의 항구도시 캘리컷, 페르시아만 입구인 호르무즈항, 아라비아 반도를 지나 아프리카 케냐의 말린디까지 이르렀다. 특히 1407년 출발한 두 번째 원정 때는 120여척의 배에 최대 인원인 3만7천명과 함께 했으며 나머지 항해 때는 모두 2만7천명선을 유지했다.

식민지 확보 아닌 중화사상 전파
정화 원정대는 외교와 교역, 전투를 비롯해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조직했으며 해도(海圖)를 읽고 나침판을 활용해 항해했다. 또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기후 변화를 예측하는 인원도 함께 승선했다고 기록돼 있다. 원정의 목적이 교역과 조공을 바치게 하는 것이었기에 명나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외교의례를 중시해 군인도 많이 배치했고 뿐 만 아니라 의료진까지 태웠다.

15세기 초 28년 동안 7차례 있었던 명나라의 대항해 역사는 세계사에서도 주목받을 만하다. 정화의 대원정은 70년 뒤 유럽사에서 ‘대항해 시대’를 연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가마, 마젤란과 비교해도 엄청난 차이를 난다. 1492년 콜럼버스와 함께 대서양을 건너기 위해 출항한 인원은 함선 3척에 승무원 120명이었고, 1497년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쳐 인도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 함대는 함선 4척에 승무원 170명이었다. 1505년 대서양과 태평양을 일주한 마젤란도 함선 5척과 승무원 265명에 불과했다.

명나라 때 정화가 대규모 원정대를 구성한 것은 중화사상에 기초한 중국을 세계에 과시하고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원정 도중 아라비아 반도와 마주하고 있는 호르무즈 왕이나 아프리카의 술탄들도 중국에 조공하라는 정화의 요구에 따라 사자·기린 등 헌상품과 함께 사절단을 명나라에 파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해상무역보다는 북방에 관심
당시 정화의 임무는 서구처럼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이를 위한 예비적인 탐사도 아니였다. 만약 명나라가 식민지 확보가 목적이었다면 영락제가 죽은 뒤에도 원정은 계속됐을 것이다. 중국은 서구처럼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데도 관심이 없었다. 그 대신 중국 황실의 존재감과 위대함을 세계에 알리는데 목적이 있었기에 정화의 원정대는 가는 곳마다 조공만을 요구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런 분석은 명나라가 영락제 사후 해상원정을 접고 쇄국정책을 펴게 된 것만 보아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해 준다. 1368년 몽골족인 원나라를 북쪽으로 밀어내고 세워진 명나라는 해상보다는 대륙의 북쪽에 관심이 많았다. 바다보다는 몽골족을 견제해야 할 상황이었다. 지금 우리가 중국에 가서 볼 수 있는 만리장성 역시 명나라 때 북방의 몽골족을 막기 위해 중축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해상원정이 명 3대 황제 영락제 사후 계속되지 못한 이유는 대규모 함대를 운영해야 하는 재정적인 부담도 있었지만 유가사상을 중시 해온 유학자들의 거센 반발 때문이라고 관련 학자들은 보고 있다. 조화를 강조하는 공자의 가르침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명나라 영락제는 1421년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이전함으로써 북쪽 국경선에 대한 관심을 집중한 대신 항해나 해안지역에 대한 관심은 줄었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명 왕조 건국 초기인 1371년에는 일본 해적을 이유로 해안지역 주민들의 원거리 항해를 금지하기도 했다. 나중에 명 왕조가 멸망하고 청 왕조 때에도 아편전쟁 이전까지의 합법적인 무역은 광저우에서만 허용한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해상을 통한 무역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영 역사학자 ‘정화가 호주 대륙 첫 발견‘
왜냐하면 명나라 등 역대왕조는 중국의 넓은 대륙에 자원이 풍부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외부세계와 물자를 교역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산동반도 연태 인근에는 봉래수성이 있는데 이는 외부와 교역과 왕래를 금지시키기 위한 역대 황실의 조치였다.

정화의 원정과 관련해 더 흥미로운 사례는 영국 역사학자 개빈 멘지스(Gavin Menzies)는 정화원정대가 1421년 처음으로 지금의 미국 대륙과 호주대륙을 발견했다고 주장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더 나아가 지난 2003년 호주를 방문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의회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1420년대에는 명나라의 원정대가 호주 해안에 도착한 적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지난 2007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주재 중국대사는 “정화는 아프리카 대륙에 차와 비단, 중국의 기술을 가지고 왔다. 정화는 한 줌의 땅도 침략하지 않았으며, 한 명의 노예도 거느리지 않았다. 정화가 외부 세계에 가져다 준 것은 평화와 문명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골프가 유럽에서 기원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명나라가 건국된 1368년에 그려진 <주첨기행악도>에는 황제 선종이 궁정 마당에서 신하들과 작은 공을 막대기로 쳐서 둥근 구멍에 빠뜨리는 경기를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이 게임을 ‘공을 친다’라는 의미의 ‘추이완’이라고 부른다. 골프의 영국 기원설을 반박하기에 충분하다.

어찌됐던 1400년대 초에 있었던 정화의 원정을 보더라도 서구와 중국이 세계를 보는 방식에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구는 자신의 이외의 다른 세계를 정복과 침탈의 대상으로 봤다는 것이다. 반대로 중국은 바다가 아닌 중국대륙의 주도권 확보에만 관심이 있었고 대양으로 진출해 식민지를 확보하겠다는 것에는 별관심이 없었다.

정화의 대원정과 서구인들의 대항해가 목적이 서로 달랐다는 사실이 이런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물론 이런 역사적 사례가 앞으로도 중국이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전제는 아니다.

적어도 지난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중국과 서구는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동기나 관점이 달랐다는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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