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인조정권, 명나라만 추종하다 망국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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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인조정권, 명나라만 추종하다 망국의 길로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5.08.3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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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치욕과 김무성의 종미(從美)행보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지난 7월 2일 서울 용산의 한미연합사령부를 방문, 커티스 스캐퍼로티 주한미군사령관을 등에 업고 한미동맹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평소 극우적이고 미국편향으로 알려진 김 대표는 이날 새누리당 소속 국방위원들과 함께 연합사를 찾은 직후 기념촬영을 하면서 스캐퍼로티 사령관에게 “한국에서는 존경과 감사의 표시로 업어주는 관례가 있다”면서 스캐퍼로티 사령관을 업었다. 이어 미국 방문기간 중 그의 미국편향의 발언은 1945년 일본제국주의 패망이후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승하려는 일부 친일인사들의 행보와 거의 비슷해 보인다.

▲ 정 거 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 · 중국언어와 문화학 전공>
중국을 제대로 알자<29>

지난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무역관장으로 있었던 김상철씨가 펴낸 책 <앞으로 10년, 한국 없는 중국은 있어도 중국 없는 한국은 없다>는 지금의 한중관계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중국통으로 알려진 그는 이 책에서 “단언컨대 미래 한국의 운명은 중국이 좌우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실제로 수교 20여년 만에 한국의 세계 최대교역국이 중국이 됐고 해외 수출 흑자의 75% 가량을 대중국 수출에서 벌어들이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현재 동아시아에서 전개되고 있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17세기 중엽, 대책없이 명나라만 섬기려 했던 조선조정의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조선은 지금으로부터 370여 년 전 쇠퇴하는 명나라와 만주에서 발흥하는 청(후금)나라 사이에서 작은 중화를 외치며 아무런 대책 없이 숭명배금을 고집했었다. 하지만 조선의 왕이 직접 오랑캐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어 항복하면서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당시 무능한 인조정권의 모습과 부상하는 중국과 쇠락하는 미국 사이에 끼여 있는 한국이 우방과 혈맹을 외치는 모습은 엇비슷해 보인다.

특히 새누리당 대선후보군의 한 사람인 김무성 대표는 지난 7월 미국을 방문해 ‘우리는 중국보다 미국이다’ ‘한국과 미국은 전면적 관계이고 중국과 한국은 분야별 일부의 관계’라고 발언하는 등 자신의 미국편향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다녔다. 외교를 국내정치 수단으로 악용한다는 비난을 받았던 그의 발언 취지는 마치 병자호란 직전 ’오랑캐인 후금을 섬길 수 없고 임진왜란 때 도와준 우방이자 혈맹인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대책 없었던 조선 척화파의 주장과 너무 흡사하다.    

인조정권, 대책 없이 우방 명나라만

1636년 12월 9일 청나라군 14만 명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된 병자호란은 다음 달인 1637년 1월 30일까지 있었던 두 달 남짓한 전쟁이었다. 조선 땅에서는 병자호란이 있기 40여 년 전에 임진왜란이 있었는데, 7년 간 계속되면서 백성들의 고통과 비참함은 현재를 사는 우리가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러나 임진왜란은 조선의 왕인 선조가 직접 일본군에게 항복한 것은 아니였지만 병자호란은 조선의 왕이 직접 오랑캐인 만주족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며 항복했던 치욕스런 전쟁이었으며, 이것으로 조선백성들의 비극이 끝난 것이 아니였다. 조선 땅에서의 새로운 비극이 시작되는 시발점이 됐다.

중국은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한 이후 2천년 동안 2차례에 걸쳐 소수민족(이민족)이 대륙의 주류민족인 한족을 지배한 적이 있었다. 몽고족의 원나라(1217년~1368년)와 만주족의 청나라(1644년~1912)이다. 우리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몽고족의 원나라가 금나라와 남송을 멸망시키고 13세기와 14세기 중엽까지 100년 가까이 중국대륙을 지배했었다.

그 뒤 한족출신인 주원장이 주도해 몽고족을 만리장성 밖 북쪽으로 몰아내고 1368년 명나라를 건국했다. 1392년 건국한 조선은 1592년 ‘명을 칠 테니 길잡이가 돼 줄 것’을 요구하는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되고, 명나라는 지원군을 보내 조선을 돕게 된다. 물론 명나라가 항왜원조(抗倭援朝)를 한 이유는 자신들을 향해 진격해 오는 일본군을 국경선 밖 조선 땅에서 물리치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속셈도 있었다.

조선 땅에서 임진왜란이 7년간 계속되는 동안 만주에서는 여진족인 만주족이 발흥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명나라는 쇠퇴의 길에 접어든다. 17세기에 들어서자 이른바 동아시아 패권경쟁이 시작되고 명·청 권력교체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조선에서는 정변이 일어난다. 바로 인조반정으로, 1623년 3월 조카인 능량군(인조)이 1천400여명의 군대를 동원해 자신의 숙부이자 조선 15대 왕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사건이다. 최명길, 김류를 비롯한 서인 일파가 주도한 쿠데타의 명분은 대략 3가지였다. 광해군이 아버지 선조의 계비인 소성대비(인목대비)를 감금시키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것, 궁궐 재건 등 토목공사로 국가재정을 축내고 민생을 피폐하게 만든 것, 그리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은혜를 베푼 우방인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케인 후금(청나라)와 화친한 것 등을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쫓겨난 광해군 정권 때는 명나라와 후금사이에서 비교적 중립을 지키면서 실리외교를 했었지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찬탈한 인조는 먼저 군신관계(임금과 신하의 관계)인 명나라부터 정권승인을 받아내야 할 상황이었다.

명·청 권력교체기, 외교의 무능

명의 입장에서는 인조정권 승인카드를 쥐고 조선으로 하여금 부상하는 후금을 견제 할 계산이었다. 따라서 인조정권은 줄타기 외교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만주의 후금(청나라)은 개와 돼지와 같은 오랑캐이며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며 최종적으로 숭명배금 정책을 기조로 확정한다. 명나라도 처음에는 새로 들어선 인조정권을 정권찬탈로 보고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만주에서 발흥하고 있는 후금을 견제하는데 조선을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결국 인조정권을 승인하게 된다.

물론 광해군에서 인조로 정권이 넘어가는 기간에도 만주에서는 기세등등한 후금과 쇠락해 가는 명나라와는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면서 만주족의 후금이 중국 대륙을 동북쪽에서부터 야금야금 잠식해 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명은 조선을 상대로 끊임없이 임진왜란 때 도운 것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편이 돼 오랑캐인 후금을 제압할 것을 요구했고 조선을 병력을 지원해야만 했다. 특히 만주에 주둔해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이끄는 군대가 후금 군대에 쫓겨 조선 영토인 평안도 가도에 장기 주둔하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조선은 우방 명나라 군대가 영토에 안으로 들어오자 결국 명의 요구대로 한해 국가재정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식량과 물자를 가도에 주둔 중인 모문룡군대에 공급해 줘야 했다.

척화파, 명분 앞세운 대책 없는 주장 

그런데 후금의 입장에서는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을 향해 서쪽으로 진격을 해야 할 마당에 항상 등 뒤에 명나라 모문룡군대가 조선영토에 버티고 있기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였다. 더구나 후금은 그 당시까지 해군력을 갖고 있지 않아 섬에 주둔 중인 모문룡 군대를 치기에는 부담이었다.

이를 심각하게 여긴 후금은 인조가 집권한 이후인 1627년 모문룡 제거와 명과 군신관계인 조선을 압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쳐들어왔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한다. 전쟁은 짧게 끝났지만 후금과 조선은 가도에 주둔하고 있는 모문룡 세력을 제거하는데 협조하기로 하고 후금과는 형제관계를 맺는다. 또 양곡 등 필요한 물자를 대주기로 하는 등 후금의 요구에 조선은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했다. 조선의 척화파는 후금을 배척한다고 목청은 높였지만 실천할 능력도, 맞설 군사력도 없었다. 

그러나 정묘호란의 협약은 결국 10년을 못 넘기게 되고 병자호란이 발생한다. 1636년 12월 9일 터진 병자호란은 주변 정세를 잘못 판단한 조선조정의 무능함으로 역사상 잊기 어려운 참혹한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청군이 조선을 침략한 명분은 자신들이 정복해야 할 대상인 ‘명나라를 조선이 편든다’는 것이었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넌 지 5일 만에 서울에 들이닥치자 당초 계획했던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두 달을 못 버티고 항복한다.

1637년 1월 30일 오전 남색 옷차림으로 남한산성을 걸어서 나온 인조는 삼전도(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부근)까지 나와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인조는 청 태종에게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인조는 이른바 삼궤구고두례(三?九叩頭禮)라는 치욕의 예를 해야 했다. 곧바로 현장에서 진행된 승전축제장에서 청 태종이 갑옷을 선물로 받은 뒤 두 번째로 이런 절차를 행했고 나중에 1주일 뒤 청 태종이 만주로 회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의 참혹한 비극

기록에 따르면 1월 30일 이날 오후 늦게 서야 서울 도성으로 청군의 호위 속에 복귀할 수 있었던 인조는 백성들의 호곡소리를 들어야 했다. 창경궁으로 들어가는 길에 잠실벌에는 청군에 잡힌 만 명에 가까운 포로들이 “왕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라는 울부짖음이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걸어 나와 항복하기 1주일 전인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함락됐다. 오랑캐 청군에게 겁탈을 당하지 않으려는 조선의 여인들은 스스로 자결을 선택했다. 청군에 쫓겨 바다 끝에 선 또 다른 조선여인들은 얼음장 같은 겨울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역사 기록에는 능욕을 피해 바다에 투신한 여인들의 머리 수건이 형형색색 낙엽처럼 떠다녔다고 돼 있다. 참혹함 그 자체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 돼 있는 동안 서울과 경기도지역 조선백성들은 청나라군의 칼날 앞에 방치됐다. 마을마다 시체가 널려 있었을 정도로 노인과 어린아이들만 남기고 살육과 함께 포로사냥이 자행됐다.
청나라로 잡혀간 조선인 포로는 소현세자를 비롯 조정관료들의 자식들까지 포함해 많게는 50만 명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잡혀간 조선의 여자들은 청나라 장수들의 첩이 되거나 첩에서 다른 장수의 첩으로 팔려나가는 노예가 됐다. 그렇다고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첩이 된 조선여인들은 본처의 질투에 학대를 받아야 했고 심지어 얼굴에 끓은 물을 세례를 받아야 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청 태종 홍타이지는 ‘야만적인 방식으로 투기를 일삼는 여인들은 순사(殉死)시키겠다’고 어명을 내릴 정도로 광범위하게 자행된 끌려간 조선여인들이 당해야 했던 또 다른 비극이었다. 

이처럼 포로로 만주까지 잡혀간 조선인들은 나중에 죽음을 각오하고 만주벌판을 넘고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약속한데로 다시 체포돼 청으로 돌려보내졌으며, 송환된 이들은 발 뒤꿈치가 잘리는 형벌을 받아야 했다. 

오랑캐 청의 제후국으로 전락하다

병자호란이 휩쓸고 간 지 5년이 된 1641년 11월 어느 날, 서울에 도착한 청 사신들은 조선조정의 백관들을 집합시켰다. 영의정 이하 조선신료들까지 집합해야만 했다. 그들 앞에 의주 부윤 황일호 등 11명의 이른바 반청인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청을 배반하고 명나라와 밀통했다는 죄목으로 참수됐다. 청 사신들은 참수된 시신들이 널 부러져 있는 현장에서 자기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라고 요구했고 조선조정은 공포에 질린 채 순순히 응했다. 병자호란으로 청의 제후국으로 전락한 조선은 이런 식으로 반청인사들이 처형되거나 아니면 청의 수도 만주 심양까지 끌려가 처형당했다.      

병자호란 전에는 혈맹이자 우방인 명나라를 끝까지 섬기며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면서 오랑캐인 청을 배격하고 문명국의 자존심을 지키겠노라며 외쳤던 척화파도,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를 바로 보자며 소리쳤던 주화파도 무기력했을 뿐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청은 병자호란 때 조선의 항복을 받아낸 뒤 12가지 조항을 강요했다. 조선과 명나라가 유지했던 사대관계인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청과 사대관계를 맺을 것, 명나라를 치는데 조선군대가 동참할 것, 도망쳐 온 조선인 포로들은 다시 송환하고, 앞으로 재무장이나 군비강화를 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러나 청에 항복한 인조는 정권은 유지할 수 있었다.

현 박근혜 정부는 2014년부터 중국이 창설을 주도하는 경제공동체인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창립회원국으로 가입하면서도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막차를 탔다. 그러자 한국이 누릴 수 있었던 사무총장 자리를 놓쳤다는 지적이 나왔다.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한 미사일 방어체계인 사드를 한국에 배치하는 문제를 두고도 이 정권과 여당에서는 갑론을박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이나 러시아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턱 밑에서 미국이 총를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보고 모른 척 할 리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중국이 주관해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리는 항일전승기념식 참석하는 문제도 상국인 미국의 눈치를 봐야했다.  

2015년 7월 27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워싱턴 특파원 간담회에서 “(미 의회 지도자들에게) 우리는 중국보다 미국이라는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같은 날 우드로윌슨센터 연설에서도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전면적인 관계고, 한-중 관계는 분야별 일부의 관계”라며 냉전체제 패권을 쥐고 있었던 미국중심의 자신의 외교관을 거침없이 밝혔다. 국제정세와 시대변화를 애써 외면하는 그의 종미사대주의적인 모습에 우려 만 앞설 뿐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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