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산양경로당회장, 삼향동 통장 박태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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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산양경로당회장, 삼향동 통장 박태순 시인
  • 최지우
  • 승인 2016.04.06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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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스른 삶의 편린 애잔한 사랑의 서약 시가 되다
 

[목포시민신문=최지우기자] 갈래머리 단정하게 땋아 내려뜨리고 깔끔하게 손질되어 빳빳하게 풀 먹인 새 하얀 교복 카라. 풍부한 감수성으로 문학소녀였던 여고시절의 꿈을 50년 만에 이루며 당당하게 중앙지에 시인으로 등단한 어르신이 있어 지역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꿈을 이룬 주인공은 삼향동 산양경로당 박태순(66) 회장이다.  박태순회장은 제137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시부분에 ‘바느질하는 여자’로 당선돼 정식시인으로 등단했고, 박회장의 작품은 통권 제565호 월간문학 3월호에 실려 있다.

시의 전문이다.

바느질 하는 여자
경주박물관에 들러 분황사 돌사리함에서 나온
선덕여왕의 손가위, 금바늘, 은바늘, 가죽골무,
바늘통을 보았다.
반짇고리에 수북이 쌓인 실패들
삶의 화폭을 아름답게 기워낸 여자
바늘이 칼보다 강함을 알았다.
분황사 터를 서성거리며 生木을 찍는
그녀의 분신인 듯 청딱다구리 한 마리를 보았다.
그대는 어디에 잠들었는가?
긴 세월 독수공방 긴 밤을 새워
北斗에 한숨으로 불어 날린 실밥들
동해를 질러가는 기러기 쪽지에 묻은 사랑
지귀의 못난 사랑까지도 넓은 오지랖에 싸안아
잠든 그의 팔에 팔지를 끼워준 여자
지귀와 같은 설움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노라
365개의 벽돌로 쌓은 탑, 열두 계단을 올라
첨성대 위 자미원 12궁 거문고와 물병자리 별이 되었나
또 한번 법회가 열리는 날 이 뜰에 서성거리다
나도 잠들면
이 주춧돌 밑에 묻은 초혼장 보고
그대 눈물 글썽거려
내 팔목에도 팔찌 하나 걸어 주려나

박태순 시인은 당선소감에서 “이제부터 새롭게 문학인생이 출발 지점에 서 있는 느낌이다. 젊은 날 그렇게 소망했던 문청 시절의 병이 새롭게 옮아 붙었으니 말이다. 시업을 포기하고 영상예술에 매진했던 젊은 날이 자뭇 아쉽다”며 “문학교실을 기웃거리고 좋은 시집들을 붙잡게 된 것은 나의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밝혔다.

목포가 고향인 박태순 시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국내 굴지의 은해에 입행, 능력을 발휘하다 결혼과 함께 전업주부로 지냈다.  2남1녀의 공부 뒷바라지, 사업하는 남편 뒷바라지에 젊음을 바치면서도 항상 어릴 적 꿈에 대한 아쉬움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하고 싶어도 복잡하고 삭막한 서울에서는 여건이 되지 않아 포기하고 살았다.  11년 전 시부모님이 치매판정을 받고 장남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귀향하면서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리란 생각으로 목포로 왔다.

“시어머니가 2년 정도 치매를 앓으시면서 집에서 병 수발을 했었다. 몸은 고달팠지만 마음은 가벼웠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치매가 심해진 아버님을 요양원에 모시는 9년 동안 단 한 끼도 요양원 식사를 하시게 하지 않았다. 매끼 집 밥을 드시게 했다. 부모님에 대한 효를 다하고 싶었고, 내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싶었다”고 강한 효심을 나타냈다.

고향에 왔지만 오랫동안 떠나있었기에 지인들이 많지 않았다. 처음 5년간은 집과 병원만 오가는 생활을 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아는 후배의 소개로 목대 평생교육원을 알게 되었고 처음 시 창작 공부와 사진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매주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 아버님 식사 준비하고 학교에 나가서 공부를 했다. 서울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였지만 예향인 목포에서는 가능했었다. 동사무소와 학교 등 마음만 먹으면 공부 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했던 사진은 3년 전 정식 사진작가로 등록을 마친 프로가 되었고 밑그림에 시의 필요함을 느꼈다.

“인문학적 풍부한 지식으로 시를 쓰고 싶었지만 기초가 없었다. 목대 허형만 교수님게 1년 6개월 사사 후 선생님이 서울로 가시면서 수소문 끝에 담양에 문순태 문예창작대학이 있다는 것을 알고 2시간 40분 걸려서 담양을 다녔다. 하지만 한학기만에 그만둔 송수권 교수님을 찾아 광주로 다니면서 인문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 시간이 6년이다.”며 배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끈기에 대해 설명했다.
꾸준히 시를 써오는 동안 지방에서 등단 할 수 있는 여러 기회가 있었지만 이름 있고 권위 있는 중앙문학지에 등단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 이번 월간문학으로 데뷔를 하게 된 것이란 설명도 덧붙였다.

박태순 시인은 시의 밑그림으로 들어갈 그림을 직접 그리기 위해 몇 년 전부터는 동양화 수업도 꾸준히 받고 있다. 그림은 꼭 같이 배우고 싶은 사람이 있기에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한다. 3년전 결혼한 며느리 때문이다. 박시인의 며느리는 필리핀 출신이다. 신학공부를 하고 있는 큰 아들을 위해 직접 국제결혼을 주선했다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은 부모님 병수발을 직접 들었던 일이고 큰아들네를 다문화가족을 만든 일이다. 며느리가 너무 잘하고 아들이 행복해 하기 때문이다”고 당당하게 가족사를 밝혔다. 4월부터는 며느리와 함께 동양화를 공부하며 며느리가 이곳 생활에 잘 적응하고 한국 사람으로 살아 갈 수 있게 할 것이란다.

열정과 지혜로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오고 있는 박태순 시인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는 마음으로 새로운 계획을 준비중이다.
“올 가을쯤 그림을 더 배워서 한쪽은 사진 한쪽은 시 가 들어 있는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죽는 날 까지 글과 그림과 사진을 찍으면서 살고 싶다. 이제는 내가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속의 어떤 틀에서 벗어나서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다. 항상 인문학 속에서 근사하게 써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나만의 시를 쓰고 싶다.”고 밝혔다.

요즘 유행하는 어르신들이가장 좋아한다는 노래 ‘내 나이가 어때서’에 걸맞게 열정 가득한 의욕으로 시간을 탐하는 박태순 시인의 멋진 노후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지 않을까.
최지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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