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도해 모항 목포 희망만들기 인문강좌-5 임춘성 목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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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해 모항 목포 희망만들기 인문강좌-5 임춘성 목포대 교수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6.04.1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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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이민과 혼종의 도시
▲ 상하이의 야경

모던 상하이의 부침

[목포시민신문] 마르크스가 부도덕한 전쟁이라 평했던 아편전쟁이 1840년에 일어났고 패전한 중국이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南京)조약을 체결한 다음해인 1843년, 상하이는 개항을 맞이하면서 중국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했다. 개항 이전부터 상하이는 인근 도시의 기능을 흡수하고 있었고, 그보다 훨씬 이전인 1685년 청 강희제가 개방했던 네 곳의 항구 가운데 하나인 강해관(江海關)이 상하이 인근인 송강(松江)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불을 지피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명나라 정화(鄭和)의 대항해(1434)도 이곳에서 시작했다. 이렇듯 상하이의 지정학적 가치는 일찌감치 주목을 받아왔었고 1843년의 개항을 계기로 집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것이다. 상하이는 개항 이전부터 난징, 양저우, 닝보, 항저우, 쑤저우 등 인근 도시들의 기능을 서서히 수렴하면서 1930년대에 국제적인 도시 ‘대(大)상하이’가 되었고 1950년대 이후 공화국의 장자가 되었다.

아편전쟁 이전 유일한 개방 항구였던 광저우의 상인들은 난징조약 직후 개항된 상하이에 가장 먼저 왔다. 그 뒤를 이어 오랜 도시 경영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인근의 닝보인들이 몰려왔다. 모던 상하이는 광둥 무역과 닝보 금융의 경험을 받아들인 기초 위에 ‘몸소 서양을 시험(以身試西)’해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창안했다고 보아야 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이들 상하이 금융인들은 마오쩌둥뿐만 아니라 장제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홍콩을 선택했는데, 이들은 서유럽식 금융업과 상업 실무를 습득한 최초의 중국인으로, 서양의 규칙에 따라 국제적인 금융게임에 참가해 홍콩 발전을 기틀을 다졌다. 그리고 금융업이 세계경제를 주도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형성된 전 세계 화교들의 국경 없는 네트워크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80년대 개혁개방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중서교류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 측 창구는 1840년 이전의 광저우, 1843년 개항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전까지의 상하이, 1950년대 이후의 홍콩,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의 광저우와 선전(深?), 1990년대 이후 상하이가 중심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크게 보면 ‘주장(珠江) 삼각주’와 ‘창장(長江) 삼각주’ 사이를 오간 셈이다. 중국 근현대 장기 지속(longue dur?e)의 관점에서 볼 때, 상하이는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의 대외 창구 노릇을 한 셈이다. 외국인 조계와 국내외 이주를 통해 중국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한 모던 상하이는 1930-40년대에 세계적인 국제도시의 명망을 뽐내다가, 1949년 공산화된 이후 그 영광을 홍콩에게 넘겨주었다. 1930년대 서양인들에게 ‘동양의 파리’ 또는 ‘모험가들의 낙원’으로 일컬어졌던 상하이가 왕년의 영광 회복을 선언하고 나선 것은 1990년대 들어와서다. 푸둥(浦東) 지구 개발로 뒤늦게 개혁개방을 실시한 상하이는 10여년 만에 중국 최고 수준의 발전을 이루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상하이가 중국 근현대사의 진행과정을 압축적으로 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모던 상하이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근현대 중국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하이영화’와 ‘영화 상하이’

중국영화는 오랜 제왕의 도시 베이징에서 탄생했지만 조계 도시 상하이를 자신의 성장지로 선택했다. 중국영화사에서 ‘상하이영화’의 비중은 상당히 크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까지 중국영화사는 상하이영화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양자는 ‘원주가 비슷한 동심원’이었던 셈이다. 근현대도시, 이민도시, 국제도시, 상공업도시, 소비도시 등은 영화산업 발전의 요건을 설명해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영화가 상하이로 인해 입지를 확보하고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면, 상하이는 영화로 인해 근현대화를 가속화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상하이 영화산업은 상하이뿐만 아니라 중국 근현대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영화의 유통과 소비는 상하이 경제와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영화 도시 상하이는 다시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곤 했다. 상하이영화가 주로 상하이에서 제작된 영화를 가리킨다면 이른바 ‘영화 상하이’는 ‘영화 속의 상하이’이고 ‘상하이를 재현한 영화’이다. 이는 영화와 도시의 유기적 결합,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상호작용에 대한 관심이다.

 베네치아 영화제 수상작 『색, 계』

2007년 가을과 겨울 사이 홍콩과 타이완 그리고 대륙에서 리안의 『색, 계』는 대대적으로 환영을 받았다. 리안 신화, 리안 기적, 세계적으로 공인된 감독,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중국계 감독 등의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게, 그는 상업과 예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거머쥐고 대륙·홍콩·타이완을 넘나들고, 중국어세계와 영어세계를 횡단함으로써 ‘화인의 빛(華人之光)’이 되었다.

장아이링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리안의 『색, 계』는 ‘두터운 텍스트(thick text)’다. 이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복합적인 의미구조를 가진 텍스트라는 의미다. 『색, 계』의 두터움은 서사구조와 1940년대 중국의 정치 상황, 작가의 신변 이야기와 상하이 노스탤지어 등에서 비롯한다.

먼저 서사구조를 보면, 『색, 계』는 최소한 세 개의 이야기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바깥에서부터 보면, 리안의 영화 『색, 계』, 장아이링의 소설 「색, 계」, 그리고 일명 ‘시베리아 모피점 사건’이라 불렸던 딩모춘(丁?村)-정핑루(鄭?如) 사건이 그것이다. 오리지널 이야기는 미인계 간첩 이야기로, 이는 장제스 정부와 왕징웨이 정부에 관계된 국민당 내부 모순에 관련되어 있다. 원래 난징에 근거지를 두었던 장제스 정부는 일본 침략을 피해 충칭으로 물러났고, 당시 중국 측 대화 상대를 찾던 일본은, 1927년 장제스의 4?12쿠데타에 의해 국민당에서 축출된 우파 왕징웨이를 찾아냈고, 그를 수반으로 삼은 괴뢰정권을 수립한다. 딩모춘은 바로 이 왕징웨이 정부의 정보 총책이었고, 실제 사건에서는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우파와 좌파 사이의 정보전이었던 것이다.

리안의 『색, 계』는 장아이링의 「색, 계」를 토대로 삼아 많은 공백을 메우고 있다. 주인공 이 선생(易?成)의 이름에는 ‘시베리아 모피점 사건’의 주인공 딩‘모’춘과 장아이링의 남편 후란‘청’의 이름이 혼합되어 있다. 이모청은 오랫동안 아무도 믿는 친구가 없었던 외로운 인물이다. 그는 어두운 곳이 싫어 영화관에도 가지 않고 손님이 적다는 이유로 맛이 없는 식당을 골라 다니는 인물이다. 그는 모든 인간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어내는 인물이고 동창을 처단한 후 애인과 밀애를 즐기는 그런 인물이다. 또한 리안은 여주인공 왕자즈에게 홍콩대학 생활을 가미해 홍콩대학 유학 경험이 있던 장아이링의 그림자를 투영시켰다. 영화로 개편된 『색, 계』는 장아이링의 원작보다 훨씬 정채롭다. 특히 클립형 체위 등 베드신은 대륙의 노출 수위를 넘나들었고, 국민당 내부의 모순도 그동안 다루기 어려웠는데, 그런 금구(禁區)를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관객들에게 ‘금지된 것을 돌파하는 즐거움’도 선사했다.

왜 중국 대중은 『색, 계』에 환호하고, 왜 중국 당국은 『색, 계』에 관대한가? 『색, 계』의 감동의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사랑의 진정성(authenticity)’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 선생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느낀 왕자즈는 마지막 순간에 이 선생에게 ‘빨리 도망치세요’라고 말한다. 이 말을 할 때 후과를 인지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대가로 그녀는 채석장에서 동창 5명과 함께 총살당한다. “여성의 마음에 이르는 길은 음도를 통한다”는 장아이링의 언급을 남성이 체득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왕자즈가 다이아반지와 육체적 쾌락으로 표현된 이 선생의 사랑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것은 분명하다.

리안의 『색, 계』는 섹슈얼리티로 넘쳐난다. 전통적인 ‘재자+가인’ 서사모델을 모던한 수준으로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베드신 연출은 포르노 뺨친다. 그러나 『색, 계』의 섹슈얼리티는 인위적이고 깔끔하며 특이한 체위와 미장센으로 구성되어 있다.

‘색, 계 현상’은 상하이 노스탤지어와 섹슈얼리티, 그리고 국제적 공인 등이 중층적으로 교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물론 국제적 공인의 배후에는 미국의 권위가 존재하고, 미국의 권위에 의해 인정받은 감독에게 환호하는 것은 현 중국의 미국 숭배와 미국 상상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문화민족주의 기제가 자리하고 있다.

 『색, 계』의 문화적 두터움

『색, 계』의 배경에 1940년대 초 상하이가 놓여 있어 영화의 ‘문화적 두터움(cultural thickness)’을 더해 주고 있다. 『색, 계』에 재현된 1942년의 상하이는 상당히 다채롭다. 특히 국제화 수준이 남다르다. 행인은 말할 것도 없고 커피숍과 보석점 등의 직원부터 교통경찰, 레스토랑의 피아니스트 등에 이르기까지 외국인의 모습이 심상(尋常)하다. 주인공도 수시로 외국인 점원에게 영어로 의사소통한다. 심지어 배급으로 연명하는 줄 선 외국인들과 가창(街娼)으로 보이는 거리의 외국 여성까지도 눈에 띈다.

그러나 꼼꼼하게 보면 『색, 계』에서 보여주는 상하이 모습은 1990년대에 크게 유행한 ‘상하이 노스탤지어’의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큰 길의 모습은 난징루(南京路)에 국한되어 있고 주인공의 패션은 대형 화보 잡지 『양우(良友)』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모던 치파오 여성과 서양식 정장 남성의 조합은 모던한 ‘재자+가인’의 패턴을 창출했다. 수십 곳의 치수를 재야하는 모던 치파오는, ‘순수하고 소박한 올드 상하이’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억압으로 변모해 숨쉬기 어렵게 만든다. 리안이 구성한 상하이는 영화의 주요한 공간인 침실과 마찬가지로 ‘상상된 공간(imagined place)’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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