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제대로 알자<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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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58>
  • 정거배
  • 승인 2016.04.2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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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서 발명된 종이는 어떻게 유럽에 전파됐을까
▲ 8세 중엽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중앙아시아까지 전파된 제지술은 다시 8세기 말경부터 11세기 말경까지 이라크 바그다드까지 건너가게 된다. 서기 90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서기 1100년 모로코 페소라는 지방에 제지공장이 들어서게 된다. 제지술이 유럽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과 영국까지 전파된 것은 12세기 중반이후였다. 비로소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전파된 것은 17세기 말엽이었다.

▲ 정거배 인터넷신문 전남뉴스기자/중국언어와문화학전공
화약과 나침판, 종이, 활자 인쇄술은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 4대 발명품이다.  중국에서 2세기 후한시대에 종이를 만든 제지술이 발명된 이후 유럽까지 전파되기까지는 무려 120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영국인들의 경우 14세기가 돼서야 비로소 종이를 사용하게 됐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책과 관련해 가장 많이 착각하는 사례가 있는데,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인 1세기에 중동에서는 종이자체가 없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고대에는 양가죽이나 강변에서 자라는 풀을 이용해 만든 파피루스가 문자를 기록하는 도구로 사용됐다. 귀한 양가죽이나 파피루스를 사용해 기록물을 보고 보관하는 것은 귀족 등 특권층만이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예수시대에는 팔레스타인 등 중근동 지역의 문맹률은 95%에 달했다. 구하기 쉽지 않은 양가족 등으로 기록해 봤자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기독교의 신약성경 중 마태복음 등 4복음서는 예수가 죽은 뒤 적어도 40년 뒤부터 써지기 시작했다. 예수 생존 시 디지털 녹음기도 속기록을 작성하는 사람도 없었다. 7세기에 탄생한 무함마드의 이슬람교는 기독교 성경에 해당하는 꾸란이라는 경전이 있다. 꾸란을 기록하는데 무려 300장의 양가죽이 필요했다.

후한의 채륜, 종이를 발명
인류가 처음 사용했던 기록 재료 중의 하나는 무른 찰흙판에 송곳처럼 끝이 뾰족한 것으로 기호나 문자를 기록한 점토판이었다. 기록한 뒤 점토판을 불로 구웠다. 점토판 문서는 인류 4대 문명 발상지 중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종이와 비슷한 재료로 가장 오래 된 것은 기원전 2500년경 이집트 나일강가에서 자라던 잡초 중의 하나인 파피루스(Papyrus)였다. 그러나 페이퍼(Paper)의 어원이 된 파피루스는 식물성 섬유를 가공하는 단계까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종이라고 규정짓기는 어렵다.
중국에서는 서기 105년 후한시대 황제인 화제(和帝)때 채륜(蔡倫, 50?~121?)이 종이를 발명했다.

고대 중국에서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 거북 뼈인 갑골이나 대나무 등 죽간을 활용해 기록을 했다. 귀하긴 하지만 비단이나 무명천을 이용하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은(殷)나라 때에 거북이의 등껍질과 짐승의 뼈에 글자를 새긴 갑골문(甲骨文)과 청동기에 글자를 새긴 종정문(鐘鼎文)이 있었다.
이어 춘추(春秋)시대에는 죽간이나 목판에다 글자를 기록했다. 전한(前漢) 시대에 귀족들은 비단이나 부드럽고 얇은 천에 글을 기록했다. 죽간이나 비단 위에 문자를 기록하는 것은 갑골에 비해서는 수월했다. 하지만 죽간은 무겁기 때문에 운반이 불편했다. 비단은 비싼 가격 때문에 일반인들은 사용할 수 없었다.

진시황, 하루 수레 한차분량 문서 처리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 시대에 종이는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그래서 진시황은 국정을 수행하면서 하루에 수레 1대 분량의 문서를 읽고 처리했다고 한다. 죽간이나 목간으로 된 문서이기에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량이 많아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그 이후 고대 중국인들은 작은 면화 솜을 이용해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1933년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Sven Hedin)은 지금의 신장위구르 자치구 지역인 롭노르 북쪽 한나라 봉수대 유적에서 종이조각을 발견했다. 이 종이는 삼베줄기를 재료로 한 것으로, 길이 40센티미터 폭 100센티미터였다.

채륜은 궁중에서 근무했는데, 당시 왕실에서는 비단에다가 주로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한 두번 쓰고 버리는 것이 재정적 부담이었다. 당시 왕실의 물자 등을 담당하던 채륜이 이를 보다 못해 비단을 대신할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채륜은 재주가 뛰어난 인물로 나무껍질과 어망, 헌 천 등으로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서기 105년 채륜은 종이를 만들어 황제에게 헌납하게 되면서 대중화됐다. 그 후 중국에서는 서적필사와 문화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서예를 즐겼던 중국인들은 종이품질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자연적으로 제지술 발전을 거듭하게 됐다.

그 뒤 남북조시대에는 등나무 껍질을 주원료로 하는 제지술은 더욱 발달하게 됐고 4세기에는 조선으로 전파됐다. 중국기록에 따르면 384년 백제에 불교를 전한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서 제지술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있다.  이어 7세기초인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에 의해 일본까지 전파됐다. 이처럼 중국과 이웃한 나라들에는 제지술이 비교적 빨리 전파됐지만 유럽까지는 건너가지 않은 상태였다.

탈라스 전투,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의 패배
제지술이 유럽쪽으로 건너가게 된 것은 역사적인 전투인 서기 751년 탈라스 전투가 계기가 됐다. 양귀비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당나라 현종 때였다. 지금의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 접경 지역인 탈라스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로, 역사상 처음으로 동양과 서양이 전쟁을 했던 사건이다. 특히 탈라스 전투는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군을 주축으로 한  동맹군과 아랍군이 맞붙었다.  이슬람의 동진과 중국 역사상 번성한 당 왕조의 서진정책이 충돌한 역사적 사건이다. 탈라스 전투는 당나라에 복속된 지금의 중앙아시아 일대를 이슬람의 아랍세력이 점령하자, 당 조정에서 고선지 장군으로 하여금 서역 출정을 하게 한다. 서기 668년 당나라군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많은 고구려인들은 포로로 잡아온다. 고구려 포로의 아들이 고선지였다. 그는 군인으로 능력을 발휘해 당 조정으로부터 변방사령관에 해당하는 절도사라는 직책까지 받게 됐다.

지금의 티벳일대와 파미르 고원에 해당하는 파키스탄과 중앙아시아 일대를 평정하며 무패의 장군으로 명성을 얻는 고선지는 당 조정으로부터도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는 힘겨운 싸움이었다. 지야드 이븐 사리프가 이끄는 아랍군은 10만 명이었고 고선지가 지휘하는 병력은 당나라군을 주축으로 2만4천명에 불과했다. 더욱이 함께 했던 동맹군들이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협살당하는 상황이 됐다. 전투 중 당나라군에 속했던 텐산 북쪽에 유목민족인 카르르크족이 아랍군쪽으로 돌아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당나라군은 괴멸하고 고선지를 비롯한 지휘관과 소수의 병사만이 탈출했다. 양측은 5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당나라는 패했다. 중앙아시아 패권을 놓고 서양과 최초로 벌인 교전이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751년 탈라스 전투와 1840년 영국과 벌인 아편전쟁을 잊지 않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유물 사마르칸드지
탈라스 전투에서 승리한 아랍진영은 당나라군 포로를 잡아 갔는데 그 중에서 제지기술자들이 있었다.
포로들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로 끌려가 생활하게 됐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종이인 사마르칸드지가 탄생했다.  이와 관련해 서방에 전파된 제지술은 중국이 아닌 고구려 제지술이라는 주장도 있어 흥미롭다.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측에 포로로 잡힌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주장이다.
고구려 멸당 당시 제지술이 당나라보다 뛰어났다는 점도 이유로 제기된다. 당나라 초기 중국인들이 '만지'라 불렀던 고구려 종이가 당나라에 대량으로 수입됐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고구려 종이는 삼을 원료로 한 마지(麻紙)였으며, 탈라스 전투 후 사마르칸드에서 생산된 종이 역시 마지였다는 것이다. 결국 고선지 장군에 편제된 고구려 유민들 중 제지공이었던 포로에 의해 '고구려 제지술'이 서방으로 전파됐다는 주장이다. 어찌됐던 당시 사마르칸드를 끼고 흐르는 씨압 강 유역에 300곳의 제지공장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어 질 좋은 ‘사마르칸드지’를 대량 생산했다고 한다.  주원료는 아마나 면화 나무였으며 그런 전통은 20세기초까지 이어져 왔다. 지금은 사마르칸드지는 뽕나무를 주원료로 해서 전통제지술을 복원했다.

17세기 말에 미국에 전파
8세 중엽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중앙아시아까지 전파된 제지술은 다시 8세기 말경부터 11세기 말경까지 이라크 바그다드까지 건너가게 된다. 서기 90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서기 1100년 모로코 페소라는 지방에 제지공장이 들어서게 된다. 제지술이 유럽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과 영국까지 전파된 것은 12세기 중반이후였다. 비로소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전파된 것은 17세기 말엽이었다.

중국에서 발명된 제지술은 사람들의 생활환경을 바꿔 놓았다. 우선 문자기록이 편리해졌다. 서적 등 출판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됐다. 인류는 종이발명을 계기로 인쇄술 발명으로 이어졌다. 종이를 이용해 기록해야 하는 수요가  급증하자 7세기 말 목판 인쇄술이 최초로 발명됐다.  13세기 초에는 금속활자가 발명됐다. 중국에서 종이 발명을 시작으로 인류는 인쇄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대량인쇄와 복사를 통한 기록과 보존 등 문화의 전승이 이뤄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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