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영 탄생 100주년 기념 방한 김시터즈 리더 김숙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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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 탄생 100주년 기념 방한 김시터즈 리더 김숙자씨
  • 최지우
  • 승인 2016.06.0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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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 이난영!! 당신을 그리워하며 희망합니다.”
▲ 김숙자씨와 동생들에게 어머니 이난영은 절대 복종의 신 같은 존재였다. 김숙자씨는 남동생들로 구성된 김브라더스와 함께 1995년까지 함께 미국공연을 계속했다.

“어머니의 딸로 태어난 것이 무척 자랑스럽고 영광스럽다. 나에게 어머니는 위대함 그 자체다” 목포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며 목포와 함께 떠올려지는 비운의 여인 가수 이난영.  그녀의 딸이자 60년대 미국에서 활동하며 큰 인기를 모았던 김시스터즈의 리더인 김숙자씨의 어머니에 대한 남다른 소회다.

올해는 가수 이난영의 탄생 100주년이다. 목포시, 시립예술단체, 민간예술단체들은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4일까지 이난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다채로운 행사를 펼치며 지역이 낳은 최고의 가수에 대한 예우와 존경을 담아 축제의 장을 마련했다.

어머니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김숙자씨는 각종 행사에참석해 예향 목포인의 남다른 감회로 어머니를 추억했다.  76세의 고령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젊음과 미모를 간직한 김숙자씨를 만나 어머니 이난영과 김시스터즈의 화려했던 미국 활동기에 대한 전반적인 얘기를 나눴다. 김숙자씨는 목포 명예홍보대사로 임명됐다.

현재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숙자씨는 호텔업을 하다 은퇴한 이탈리아인남편과, 반듯하게 성장해 각자 가정을 꾸리고 있는 1남1녀의 자녀와 함께 행복하고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여성보컬그룹 최초의 한류스타 김 시스터즈는 천재작곡가 김해송과 가수 이난영의 두딸(김숙자·애자), 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이민자) 등 3인으로 1953년 결성됐다. 6.25 전쟁직후 김해송이 납북되고 이난영은 혼자 몸으로 7명의 아이들을 키우며, 생활고에 시달렸다.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다녔지만 이끌던 극단 식구들과 아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는 없었다.  점점 공연이 힘들어지고 지쳐갈 무렵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던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계획하게 된다.

김숙자씨는 “우리 형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음악 교육을 받았었다. 매일 하는 놀이가 노래하는 것이 였기에 어머니하고 무대에 서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9살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노래를 불렀고 전쟁 직후에는 미군들을 상대로 노래를 불렀다” 고 당시를 회상했다.

▲ 지난달 31일 목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김숙자토크 콘서트에서 김숙자씨는 신세대 걸그름 미미시스터즈와 바버렛츠와 함께 공연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미8군에서 영어로 된 세계적인 히트곡을 부르던 소녀들을 군인들은 환호했다. 노래의 뜻도 몰랐고 발음도 엉망이였지만 어머니 이난영의 혹독한 가르침을 받으며 소녀들은 성장했다.
전쟁이 끝나고 미8군에서 노래 부르는 김시스터즈가 알려지면서 방송국 출연과 함께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이난영은 팝송을 직접 배워서 불러본 뒤 김시스터즈에게 그녀만의 방식으로 가르치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현대의 프로듀서의 역할을 훌륭히 했다.  김시스터즈의 노래를 듣던 미국 군인들의 제의가 들어왔다.

“미국 군인들이 어머니에게 미국 가서 활동하면 꼭 성공 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들의 추천과 적극적인 주선으로 미국 활동을 시작했다. 뭔가 남들과 달라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어머니만의 판단에 우리는 악기를 배우고 춤을 연습했다”고 미국 진출에 대한 설명을 했다.

미국이 어디있는지도 몰랐던 16살 17살 18살 소녀들은 어머니의 엄한 당부와 믿음하나만 믿고 미국생활을 시작했다. 애초 4주 계약을 하고 떠났던 미국공연은 12년 만에야 한국에 귀국할 수 있었을 만큼 성공적 이였다.  전형적인 동양 외모의 소녀들이 악기를 다루고 춤을 추며 노래하는 모습은 미국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1960년 라이프(LIFE)지에 소개되었다. 시카고 TV 가이드의 표지로도 나왔다. 미국 CBS 인기 TV쇼 ‘에드 설리반 쇼’에 22차례 출연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녀들의 고생을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영어를 몰랐기에 우리나라 말로 적은 영어노래를 달달 외워서 불렀고, 인터뷰 또한 예상 질문을 한글로 적어 외워서 진행했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음식문제였다. 김치 깍두기를 먹지 못한 괴로움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훗날 그녀들의 얘기를 들은 외삼촌 이봉룡은 ‘김치깍두기’ 노래를 작곡해 부르게 하며 그녀들을 위로했다.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틴에이저 시절은 없었다. 힘들고 한국에 다시 가고 싶었지만 엄마와 약속을 했기 때문에 참고 성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오로지 일만 하고 살았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성공이라는 한 가지 목표 뿐이였다”고 당시의 비장했던 각오를 떠올렸다.

가수 이난영은 1963년 성공한 딸들의 초청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딸들은 ‘에드 설리반 쇼’에 어머니와 함께 출연했다. 전해지는 영상에서 들뜬 표정의 김시스터즈는 즉흥적 노래 가사로 그들의 어머니 이난영을 이렇게 소개한다. "여러분들께 소개합니다. 한국에서 온 실력있고 매력적인 우리 어머니를요 그녀는 한국 무대에서 늘 정상에 있었답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어머니가 가르쳐주었지요."

이난영은 딸들에게 “성공해서 돌아와라. 절대로 남자와 데이트하지 마라. 셋이 함께 움직여라”고 주문했다. 팀의 리더였던 김숙자씨에게 강한 책임감과 함께 성공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것이다.

▲ 김숙자씨는 목포가 어머니를 그렇게 사랑하고 존경 한 것에 대해 자신이 이난영의 딸이라는 데 아주 흡족하고 자랑스러워했다.
어머니가 4년 만에 미국으로 오셨는데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오셔서 우리를 보고 너희가 성공을 했구나 인정을 해 주셨다. 그때가 미국생활에서 가장 기쁠때로 기억한다. 그만큼 어머니는 우리에게 절대 복종의 신 같은 존재였다.”고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한국으로 돌아간 어머니는 남동생들로 김브라더스를 결성 미국으로 보냈고, 김시스터즈와 김브라더스는 1995년까지 함께 공연을 계속했다.  김시스터즈는 1967년 50만 달러를 세금으로 내 라스베이거스에서 유명한 고액 납세자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76달러였던 시절 김시스터즈가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받은 주급은 무려 1만 5,000달러였다고 하니?당시에 미국에서 김시스터즈의 인기는 미국내 당대의 최고였고 어느정도였는지 가늠할수가 있을 것이다.

김숙자씨는 미국에서 45년 동안 지속적인 활동을 계속하며 지난 2014년에는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안았다.  지난 1987년 폐암으로 사망한 애자씨를 제외한 김씨의 형제들은 현재 가까운 곳에 모여 살며  자주 모여서 지난 얘기를 하면서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

김숙자씨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3학년이 전부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과 미국의 풍습중 좋은 점을 취하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76세의 김숙자씨에게 거창한 계획이나 욕심은 이제 없다. 단지 온 가족이 함께 목포를 방문해서 사진이나 텔레비전의 목포가 아닌 진짜 목포를 보여주고 싶은 마지막 소원이 있다.  

활동당시 추진하지 못해 항상 아쉬웠던 ‘김시스터즈 거리’는. 현재 딸이 추진 중에 있다.  그녀는 목포가 어머니를 그렇게 사랑하고 존경 한 것에 대해 자신이 이난영의 딸이라는 데 아주 흡족하고 자랑스러워했다.
치열하게 한 생을 살아내며 강한 정신력으로 성공을 거머쥔 진정한 대한민국 최초의 한류스타 김시스터즈의 성공 뒤에는 천재적인 감각과 재능으로 기획하고 마케팅한 어머니 이난영이 있었다.
최지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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