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자금성, 명·청 왕조 500년 역사의 증인, 두 왕조 24명의 황제가 기거했던 세계 최대 규모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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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자금성, 명·청 왕조 500년 역사의 증인, 두 왕조 24명의 황제가 기거했던 세계 최대 규모 궁궐
  • 정거배
  • 승인 2016.06.22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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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65>
▲ 자금성의 유물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륙 남서쪽으로 대이동을 하게 된다. 일본에게 귀중한 역사유물을 강탈당하지 않기 위한 당시 중화민국 정부의 조치였다. 1933년 자금성 등 베이징에 있은 유물은 1만9천 상자에 포장된다. 이 중 1만3천 상자가 자금성 유물이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로 비밀리에 옮겨진 유물은 교회 창고에 4년 동안 보관된다. 1936년 9월 민국의 수도 난징에 베이징 고궁박물관 난징분원이 지어지고 상하이에 보관 중이 유물이 이곳으로 옮겨진다.

▲ 인터넷전남뉴스기자 중국언어와문화학 전공
중국 베이징 여행 필수코스는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규모의 궁궐인 자금성(紫禁城)이다. 자금성이란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란 뜻을 담고 있다. 1421년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 터 1924년 청나라 선통제(부이)가 쫓겨날 때까지 500년 동안 명·청 두 왕조의 24명의 황제가 자금성에 살면서 중국 대륙을 통치했다. 자금성은 세계 건축사상 최대 규모로 인류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성벽 높이가 11m에 너비 52m, 깊이 6m의 작은 수로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서 760m, 남북 960m, 면적 720,000m², 980채의 건물과 8천707칸의 방이 있다.

베이징은 춘추전국시대 연(燕)나라의 수도였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베이징을 비롯한 주요도시에서는 연경맥주를 마실 수 있다. 그 후 베이징은 북방 몽고족인 원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1264년 수도를 베이징(당시 대도)으로 천도했다. 이를 계기로 베이징은 중국 역사상 정치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원나라는 8년에 걸쳐 도시배치 등 설계를 거처 남과 북으로 뻗은 정방형 형태로 황성을 완공했다.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1254~1324)에 기록에 따르면 베이징에 대해 “이렇게 아름답고 균형적인 도시 모습을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당시 웅장하고 번창한 도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명, 영락제 베이징으로 천도 강행
1368년 몽고족의 원나라를 멸망시킨 한족의 주원장(홍무제)은 난징(南京)을 수도로 정했었다.
홍무제 때 태자 주표는 38세로 요절했기 때문에 황제 자리는 주표의 아들이자 손자인 건문제(주윤문)가 이어받게 된다. 1398년 명 태조 주원장이 71세로 세상을 떠나자 개국 황제 가문의 장손인 22세의 건문제가 2대 황제로 즉위한다.  그러나 건문제의 숙부이자 연왕(燕王)으로 있던 주체(영락제)가 1399년 지금의 베이징 근처인 베이핑(北平)에서 군사를 일으킨다. 자신의 조카이자 2대 황제인 건문제를 즉위 4년 만에 폐위시키는데, 이를 정난의 변이라고 부른다.  

당시 반란군은 난징의 황궁을 불을 질렀다. 권력을 찬탈한 주체는 잿더미 속에서 황제 건문제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다. 조카의 사체를 직접 확인 못했지만 황궁의 예법에 따라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피바람을 일으켜 조카인 황제를 제거한 영락제는 불안했다. 그래서인지 가끔 악몽에 시달렸고, 또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적발되기도 했다. 죄책감 때문인지 조상들과 하늘이 두려웠다.
재위 1년이 지난 1403년 4월 영락제는 문무백관들을 모아 놓고 베이징 천도계획을 발표한다. 영락제에게는 북방의 베이징이 심리적으로 친숙했다. 명 왕조 건국의 공으로 연나라 왕으로 봉해진 이후 줄곧 거기서 생활했기에 그렇다. 베이징 천도계획에 대해 대신들은 일제히 반대했다. 북쪽 국경선과 너무 가깝고 쫓아낸 원나라 몽고족이 거주하는 땅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100만 명 동원, 20여년에 걸쳐 완성
그러나 영락제는 베이징으로 천도를 결심하고 백성 이주정책을 추진한다. 베이징으로 이주하면 5년 간 세금을 면제했다. 이런 지원정책으로 저장성에 사는 부자들이 대거 베이징으로 이주하게 된다. 1405년 정화가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멀리 아프리카까지 대항해에 나선다. 정화의 원정은 중화사상의 전파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황제 영락제 지시에 따라 쫓겨난 황제 건문제를 찾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1406년 베이징에 황궁을 짓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한다. 건축에 사용될 목재는 멀리 사천성, 운남성에서 녹나무 등을 벌목하게 되는데, 인부 1천명을 깊은 산속에 투입하면 작업을 끝내고 살아 돌아온 이들은 5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벌목작업만 하는데 10년이 걸렸다. 대리석은 허난성 숭산 등지 외에 베이징에서 가까운 지역에서 채취했다고 한다. 대리석을 채취하는데 인부가 10만 명, 병사가 6천 명이 투입됐다. 인부들은 석재를 이동시킬 도로 500m마다 우물을 팠다. 겨울이 되자 우물에서 물을 퍼내 도로를 빙판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노새 1천 마리가 대리석을 끌고 베이징까지 운반했는데, 한 달 정도 소요됐다.  자금성을 짓는데 남방에서 온 장인 10만 명 등 100만 명이 동원됐다. 자금성 완공 전인 1409년 황제의 임시거처인 중남해가 지어졌다. 영락제는 아직 황궁이 있는 난징보다는 이곳에서 머물렀다. 대신들은 여전히 베이징 천도를 반대하자 황제는 일부 대신들을 처형하거나 파직하고 농민으로 격하시켰다. 1416년 11월 영락제는 문무백관들을 소집하고 베이징 천도를 다시 거론한다. 그러자 반대하는 이들이 없었다.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기록에서는 자금성은 17년 간 건축자재 확보 등 준비기간을 거쳐 원나라 시대 황궁자리에 3년 6개월 만에 완공했다고 돼 있다.

1421년 설 명절인 춘제 때 영락제는 자금성에서 낙성식과 조하의식을 거행했다. 경축일에 신하들이 조정에 모여 황제에게 축하하는 의식이다. 자금성이 완공되자 영락제는 사면조치를 내렸다. 일화에 따르면 이 시기 황제는 점성가를 불러 길흉화복을 의뢰했는데, 점성가가 자금성에서 대화재가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대노한 황제는 점성가를 옥에 가두고 만약 예언이 빗나가면 참수형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그해 5월 9일 천둥 번개와 벼락이 떨어져 자금성 3개 전각이 소실됐다. 불길한 조짐이었다. 1424년 말타기에 능한 영락제는 북방으로 몰아낸 몽고족을 정벌하기 위해 직접 출정한다. 그러나 전투 과정에서 말에 떨어져 큰 부상을 입는다. 이를 계기로 병을 얻어 결국 진중에서 세상을 뜬다. 황제의 나이 65세였다.
벼락을 맞아 소실된 자금성 내 3개 전각은 17년 만인 영락제의 손자 영종이 즉위한 뒤 재건하게 된다. 1644년 명 왕조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만주족의 청나라도 수도를 베이징으로 삼았다. 왕조는 교체됐지만 자금성은 여전히 황제들의 거처가 됐다.

귀중한 문화유물, 열강들의 약탈
1911년 쑨원이 주도한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의 청 왕조는 타도됐다. 그러나 마지막 황제 선통제인 부이를 비롯한 왕족들은 자금성 안에서 그대로 거주했다. 부이는 1924년 자금성에서 추방될 때까지 황궁의 엄청난 유물을 빼돌렸다.  여기에다 왕조 멸망을 지켜본 황궁의 환관들도 부도난 회사 자재 빼돌리듯 귀중한 유물을 몰래 훔쳐서 팔았다. 이를 계기로 생겨난 곳이 지금 베이징의 유리창 골동품 거리이다. 황궁에서 흘러나온 유물들은 이곳에서 거래됐다. 마지막 황제를 추방한 중화민국 정부는 황궁 유물을 조사했다. 도자기와 서화를 비롯해 금이나 옥으로 만든 남아 있는 각종 유물들을 확인했다. 천진으로 거처를 옮긴 청대 마지막 황제 부이는 일본 조차지에 기거하면서 호화생활을 계속했다. 망국의 황제였던 그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이유도 자금성에서 갖고 나온 유물을 팔아 치운 덕분이었다.   

자금성과 함께 베이징에는 별궁인 원명원이 있었다. 1707년 청조 4대 황제인 강희제 때 지어졌다. 이곳에는 당송 시대 귀중한 서적과 그림 등 200여 점을 비롯해 사고전서(四庫全書)가 있었다. 사고전서는 1773년 청대 건륭제의 명으로 편찬을 시작해 8년 만인 1781년에 완성된 중국 역사상 최대의 총서로 전 3천503부 7만9천337권에 달한다. 그러나 1860년 발발한 2차 아편전쟁 때 원명원은 영국과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에 탔다. 베이징을 점령한 양 국 군대는 4일 동안 원명원을 약탈했다. 이때 귀중한 역사자료인 사고전서는 불에 탔고 현재 7권만 보존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군은 당시 원명원을 약탈하면서 ‘황금으로 된 유물을 챙기면서 은으로 된 유물을 버렸고, 옥석으로 된 보화를 챙기면 황금유물을 버렸다’고 한다. 당시 귀중한 인류문화 유산이 잿더미로 변하고 약탈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의 문인 빅토르 위고는 “강도 두 명(영불 연합군)이 원명원을 약탈하고 불태운 뒤 유럽으로 돌아갔다”고 개탄했다.   약탈한 유물들은 현재 프랑스와 영국 박물관에 전시되거나 보관되고 있다. 1900년 8월 의화단 사건으로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자금성에는 황제가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열강의 군대는 1년씩 자금성에 주둔하면서 유물들을 약탈해 갔다. 이 때 영락제 때인 1407년 편찬된 명대 백과사전인 영락대전이 소실되거나 도난당했다.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170권이고, 나머지는 세계 각 국에 흩어져 있을 것으로 알려졌다.

중·일 전쟁 중 피난 길 올라
자금성의 유물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륙 남서쪽으로 대이동을 하게 된다. 일본에게 귀중한 역사유물을 강탈당하지 않기 위한 당시 중화민국 정부의 조치였다. 1933년 자금성 등 베이징에 있은 유물은 1만9천 상자에 포장된다. 이 중 1만3천 상자가 자금성 유물이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로 비밀리에 옮겨진 유물은 교회 창고에 4년 동안 보관된다. 1936년 9월 민국의 수도 난징에 베이징 고궁박물관 난징분원이 지어지고 상하이에 보관 중이 유물이 이곳으로 옮겨진다. 1937년 7·7 사변으로 중일전쟁이 본격 시작되자 상하이가 일본의 폭격을 받는다. 난징에 있던 유물들은 다시 기차에 나눠 실려 남로와 북로로 피난길에 오른다. 한코우, 창사, 후난대학 도서관, 사천성 성도와 산악지대 동굴로 이동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유물들은 일본군의 약탈을 피할 수 있었다.

1945년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하자 국민당과 공산당 내전이 시작된다. 장제스의 국민당정부의 수도 난징에 있던 유물들은 1948년 12월 타이완의 타이베이로 옮겨진다. 장제스의 지시로 옮긴 유물은 2천971상자로 전체 자금성 유물의 4분의 1에 불과하지만 엄선된 것들이었다. 현재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949년 10월 신중국 성립 이후 중국정부는 유물회수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전국에 흩어져 있거나 개인이 보관 중인 유물이 회수됐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들은 베이징 고궁박물관 외에 타이베이 고궁박물관, 난징 박물관, 요녕 박물관, 천진 박물관, 상하이 박물관 등지에 보관되거나 전시되고 있다. 이밖에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미국 등 세계 각지의 박물관에도 중국에서 약탈해 간 귀중한 문화유산인 유물들이 보관되고 있지만 정확한 수량은 파악하기 어렵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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