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격동하는 중국 근·현대사 현장의 중심에 서다, 아편전쟁으로 강제개항, 경제대국 중국의 상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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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격동하는 중국 근·현대사 현장의 중심에 서다, 아편전쟁으로 강제개항, 경제대국 중국의 상징으로
  • 정거배
  • 승인 2016.06.22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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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 <66>
▲ 1990년 4월 중국 공산당과 국무원은 상하이 푸동지구를 개발하기 위해 개방한다고 공식 선언한다. 지금 우리가 상하이 가면 볼 수 있는 진마오다샤 등 마천루와 동방명주탑이 있는 곳이 푸동이다.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만주족의 청왕조를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했던 쑨원은 일찍이 푸동지구를 동양을 대표하는 세계적 규모의 항구로 만들자는 구상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1929년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도 상하이 개발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 정거배인터넷전남뉴스기자 중국언오와 문화학전공
‘중국의 역사를 보려면 시안(西安)을 가고, 중국의 현재를 보려면 베이징을, 미래를 보려면 상하이를 가라‘는 말이 있다. 현재 상주인구만 2천500만 명에 달하는 상하이는 동방의 뉴욕을 연상할 정도로 세계적인 도시이다. 지금은 국제 금융과 무역 중심지다. 상하이는 1800년대를 거쳐 1949년 신중국 성립 그리고 개혁개방시대 장강삼각주 개발에 이르기 까지 근현대 중국역사의 축소판이라고 불러야 적절할 것 같다.

중국 대륙은 한국인들은 양자강이라 부른 장강을 중심으로 남방과 북방으로 나눈다. 역사적으로 북방에서는 왕후장상과 영웅호걸, 열사열녀가 많이 등장한다. 반면에 남방에서는 문인을 비롯해 상업이 성장했다. 남방이 여성적이고 낭만적이 기질인 이유는 우선 생산물이 풍부하고 기후 또한 온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북방을 대표하는 도시는 수도 베이징이고 남방을 상징하고 오늘의 경제대국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는 국제도시 상하이다. 베이징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대륙의 수도답게 정치에 관심이 많다. 베이징 거리에는 여행 가서 보면 노령층들도 많아 보인다. 그러나 상하이는 개방적이고 서구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는 두 도시가 역사적으로 걸어온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차이
상하이는 중국 대륙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장강의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인 4-5세기 진나라 때 쑹장(松江)과 임해지역 주민들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았다. 대나무로 “후(扈)”라고 부르는 낚시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또 당시 장강의 지류가 바다로 이어지는 곳을 “두(瀆)”라고 불렀기 때문에 상하이 일대를  “후두(扈瀆)”라고 불렀다. 후에 “후(扈)”를 “후(?)”라고 부르게 됐고 이를 지금도 상하이 옛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상하이에 가면 자동차 번호 앞에 후(?)를 볼 수 있다.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상하이가 세계사 전면에 등장한 시기는 1840년 청나라가 영국과의 아편전쟁 때문이었다.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1842년 8월 영국과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여기서 홍콩 섬을 영국에 넘겨주고 상하이,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등 5개 항구를 개항하게 된다. 강제 개항을 계기로 미국과 프랑스, 일본 등 열강들은 상하이 등지에 자국의 영토와 동일한 조계지역을 확보한다. 1843년 개항된 상하이는 당시 인구 27만 명으로, 100만 명에 달하는 쑤저우, 50만 명의 항저우, 난징, 닝보 등 주변 도시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영국은 먼저 황푸강 서쪽 와이탄을 점령하고 자국의 조계지역을 확보했다. 이어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열강들은 잇따라 상하이에 점령해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었다.

남방의 부자들 모여들어
그 후 1851년부터 1864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지속된 태평천국의 난은 대륙 남방에 살던 지주 등 부자들을 상하이로 흡수하는 역할을 했다. 빈농과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태평천국군은 지주와 자본가 등이 타도대상이 됐다. 돈을 싸들고 상하이로 피난을 온 이들은 조계지를 중심으로 터전을 마련했다. 아편전쟁 직후 20만 명에 불과했던 인구는 50년 뒤인 1895년에는 50만 명으로 늘어났다. 다시 30년 뒤인 1920년대 말에는 300만 명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상하이는 중국이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침탈 당하는 치욕의 역사만 갖고 있지는 않다. 1921년 7월 당국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중국 공산당이 태동했다. 현재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 건물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서 천두슈, 마오쩌둥 등이 모여 제1차 중국 공산당 당대회를 열었다.

1925년 5월, 일본계 방적공장의 공장주가 파업노동자를 총살했고, 이에 상하이 학생과 시민들은 상하이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가인 난징루(南京路)에 모여서 항의를 했다. 이에 대한 영국경찰의 발포로 전국적으로 반영(反英)운동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1927년 4월 12일에는 장제스가 주도한 상하이 쿠데타, 4·12 사건이 발생했다.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노동자 규찰대를 무장해제하면서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쑨원이 주도했던 제1차 국·공합작은 와해됐다. 중국 공산당은 그해 난창봉기를 일으키지만 실패하자 징강산 등 뿔뿔이 흩어져 지구전에 들어간다.

23살의 조선 청년 윤봉길의 거사
1932년 4월 29일, 조선의 청년 윤봉길은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기념행사장에서 폭탄을 투척했다. 23살의 조선 청년이 감행한 의거로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등이 사망했다.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가 절단됐으며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를 절름발이 장애인으로 만들었다.

그 뒤 중일 전쟁이 본격 시작됐던 1937년 8월 13일에 장제스는 중국군 70만 명을 동원하여 상하이 부근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한다. 일본군이 무력으로 영국 등이 차지하고 있는 조계지를 제외하고 상하이 전 지역을 점령한다.  그 후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상하이 조계지역에도 폭격을 하게 된다. 그래서 상하이는 조계지역까지 일본이 점령해 버렸다.  그 후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고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릴 때까지 상하이는 지하에서 항일운동의 벌어지는 도시가 된다.

상하이의 자존심 푸동지구
신중국에 있어서 1976년은 마오쩌둥을 비롯한 혁명 1세대의 퇴장이었다. 이어 권좌에 오는 덩샤오핑은 역사적인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한다. 2년 간의 준비기간을 거처 1978년부터 본격 추진된다. 1990년 4월 중국 공산당과 국무원은 상하이 푸동지구를 개발하기 위해 개방한다고 공식 선언한다. 지금 우리가 상하이 가면 볼 수 있는 진마오다샤 등 마천루와 동방명주탑이 있는 곳이 푸동이다.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만주족의 청왕조를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했던 쑨원은 일찍이 푸동지구를 동양을 대표하는 세계적 규모의 항구로 만들자는 구상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1929년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도 상하이 개발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개혁개방 가속 드라이브가 붙기 시작한 1992년 1월 덩샤오핑은 노구를 이끌고 광동지역의 선전과 주하이를 시찰하면서 “개혁 개방을 가속화하자”는 뜻의 이른바 ‘남순강화(南巡講話)’를 발표했다. 다음달인 2월 설명절인 춘제 때였다. 폭죽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덩샤오핑은 상하이 푸동지구 도로확장 공사 현장을 방문해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그해 7월 중국 정부는 푸동지구를 선전 등 경제특구와 같은 수준의 우대정책을 발표하면서 푸동 개발을 본격화됐다. 1994년 텔레비전 송신탑으로 468미터의 동방명주탑이 완공됐다.  1999년 서울의 명동과 같은 남경로에 대한 개조작업이 150년 만에 진행됐다. 최대 규모의 보행자 거리를 만들었다. 

이어 2002년에는 남경로 2차 개조작업을 추진해 국제적인 쇼핑거리를 만들었다. 상하이시 정부는 프랑스의 샹제리제 거리, 미국의 미시간 거리, 일본의 긴자거리를 능가하는 세계적인 명소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2004년에는 F1국제자동차경주대회가 상하이에서 열렸다. 경주장 건설비용으로 3억2500만 달러가 투입됐다. 푸둥국제공항에서 롱양루 역까지는 자기부상열차가 건설됐다. 2010년에는 세계박람회가 열렸다. 주제는 ‘더 좋은 도시, 더 좋은 삶’이었다. 현재 상하이에는 지하철이 16호선까지 건설돼 있다. 도시를 쉽게 돌아 볼 수 있어 여행자들에게도 편리하다. 

올 6월 푸동지구에 테마파크인 상하이 디즈니랜드가 정식 개장했다. 이곳에서는 종사자만 무려 10,000명이 달한다.  미국 디즈니와 중국의 선디(申迪)그룹이 2009년 중국 정부 허가를 받아 2011년에 착공해 5년 만에 완공했는데 한화로 6조6500억원이 투입됐다.  미키 애비뉴, 트레저 코브, 어드벤처 아일, 투모로우랜드, 판타지랜드 등 6개 구역으로 꾸며진 디즈니랜드, 디즈니랜드호텔, 토이스토리호텔, 대극장, 디즈니타운, 싱위안(星愿)공원이 만들어졌다. 뿐 만 아니라 쇼핑몰, 음식점과 각각 420개와 800개 객실이 있는 호텔도 들어섰다. 건설 규모면에서 도쿄 디즈니랜드의 약 2배, 홍콩 디즈니랜드의 약 3배에 달한다고 한다.  상하이시정부는 앞으로 상하이 국제관광리조트의 개발과 운영을 추진하기로 하고 디즈니랜드를 위주로 테마 여행 코스를 개발하기로 했다  상하이 디즈니랜드 방문객은 첫해인 올해는 1300만 명에 이르고 향후 연평균 3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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