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원도심 레스토랑 비프런던 신창진 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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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원도심 레스토랑 비프런던 신창진 쉐프
  • 최지우
  • 승인 2016.07.20 11: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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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노소 누구나 자유스러운 분위기속 맛있는 한 끼

▲신창진 쉐프는 원도심을 살리는데 앞장서며 목포 발전에 작은 힘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램으로 목포에서 성공하고 싶은 가장 큰 욕심이 있다.
“목포의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다. TV출연, 최연소 사장 등 목포에 소문이 자자할 만한 경영인이 되어 멘토가 된다. 원도심을 살려 시장 표창까지 받으며 내 이름으로 된 길이 형성되어 다시 상권이 원도심으로 돌아온다”

원대한 꿈을 가진 스물셋 청년이 군대 시절 자신만의 성공노트에 적어 놓은 문구다.

청년은 지난 5월 군 제대를 하고 제대 전 휴가 때마다 준비한 계획대로 원도심 한복판에 혼자 힘으로 자신의 레스토랑 비프런던을 오픈했다. 비프런던은 눈에 띄는 간판도, 광고도, 전단작업도 하지 않지만 전국 블로거들이 찾는 지역 명소로 꼽히며 유명세를 타고 있다.

스물셋 아직은 어리지만 꽉 찬 생각으로 알찬 인생을 설계해 가고 있는 비프런던의 신창진쉐프 또한 원도심을 지키는 젊은 인재로 지역의 관심을 받고 있다. 비록 시작은 작지만 창대한 끝을 꿈꾸는 신창진 쉐프의 남다른 패기와 자신감 넘치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했다.

“고3때부터 요리사를 하겠다고 꿈꿨지만 다른 친구들과는 달랐다. 일찍 내 가게를 하고 싶었다. 대학을 가고 경험 쌓고 그렇게 누구나 하는 것처럼 하기는 싫었다. 나만의 방법으로 내 꿈을 펼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에서 첫 시작을 하고 싶었다. 남들은 빠르다고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하면서부터 준비를 했다. 비프런던은 3년만의 결실이다” 고 했다.

▲밤이면 더 아름답게 변신하는 비프런던은 블로거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비프런던은 원테이블로 실내 인테리어와 소품 하나하나 식기류 하나하나까지 블로거들의 관심을 받을 만큼 독특하고 아름다운 세련된 디자인의 작은 레스토랑이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은 홈 파티 느낌으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울려 노는 자유스러운 분위기속 맛있는 한 끼’ 비프런던이 추구하는 컨셉이다.

“목포에는 미식가들을 충족 시켜줄 목포만의 레스토랑이 없다. 유명 프랜차이즈점 뿐이다. 미식가들을 충족시키고 싶었고, 목포의 미식수준을 높이고 싶었다. 처음에 원테이블을 한다고 했을 때 다들 말렸다. 하지만 난 자신 있었다. 남들과 다르게 가야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창업에 대한 강한 신념을 보였다.

▲ '목포의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다. TV출연, 최연소 사장 등 목포에 소문이 자자할 만한 경영인이 되어 멘토가 된다' 성공노트에 적혀 있는 신창진쉐프의 다짐이다.

신창진 쉐프는 운명처럼 요리사가 되었다.

마흔둥이로 태어난 신 쉐프는 원래 어릴 때부터 노래를 했었고 연예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먹는 것과 좋아 하는 사람들 만나는 것을 포기하면서 까지 연예인이 될 만큼 절실 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때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운명처럼 친한 친구가 한식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다 따고 바리스타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만의 꿈을 개척하고 있는 친구를 보면서 진로에 고민하고 있던 자신도 요리를 생각하게 되었고 망설임 없이 요리학원에 등록을 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먹는 것을 좋아했고 요리하는 것 또한 좋아 했단다.

“운이 따랐는지 필기 실기를 한 번에 합격 했다. 그때부터 자신감이 생겼다. 한식, 중식, 양식 등 조리사 자격증을 차례로 땄다. 요리를 하면서 만난 정세훈 이란 친구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장본인이다. 난 한식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친구는 그 당시에 다섯 개의 자격증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자극을 받았다.“며 해맑게 웃었다.

     
 
▲ 고등학교 졸업 후 부터 작성하기 시작한 요리관련 스크랩북과 성공노트
대학은 호텔조리학과에 합격을 했지만 그는 미련 없이 포기를 했다. 1년에 천만 원 정도 되는 학비를 감당할 집안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론 보다는 실전으로 경험을 쌓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6개월 일하고 6개월을 경기도와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맛 집 투어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요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흥미가 생겼다. 그리고 자신감이 더 생겼다. 잘하는 집 망한 집을 다 다녔다.

“사진을 한 천장정도 찍었다. 열심히 보고 벤치마킹을 했다. 서울골목 골목을 다니면서 롤 모델인 서울의 장진우를 알게 되었다. 죽어 있던 구도심을 살리는 걸 보고 내가 하고자 하는 방향과 같은 것을 알고 무작정 찾아갔다. 그에게서 여러 가지 조언을 들었다. 그리고 서울 갈 때마다 장진우 길을 갔었고 군대에서 휴가 나올 때마다 찾아 갔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다녔던 결과가 지금의 비프런던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신창진쉐프의 성공에 대한 강한 집념은 군대생활도 남다르게 하게 된다.

군대에서 쉬는 시간마다 공부하며 요리책 스크랩을 했다. 열심히 하는 것을 본 후임들이 감동해 요리잡지 수집에 도움을 많이 줬다. 그렇게 만든 스크랩북이 5권이다. 여러 종류의 요리 잡지 수 십 권은 인테리어, 소품, 요리레시피 등 종류별로 특화된 신창진 만의 특별스크랩 북으로 다시 태어났다. 거기에다 고등학교 때부터 작성해놓은 여러 권의 성공노트가 있다. 남들보다 앞서가고 싶은 욕심과 성공하고 싶은 강한 욕망을 그렇게 단련 시켜왔던 것이다. 신쉐프는 이 스크랩북과 노트들을 가보로 물릴 생각이다.

요리를 하기로 결심하고부터 평일 알바, 주말알바로 악착같이 사업 자금을 모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정식으로 요리사로 근무하면서도 쉬는 날 알바를 하며 자금을 모았다.

 
“주말 쉬는 시간이 아까워 웨딩알바를 했다. 검정 양복에 검정 구두가 조건이여서 새 구두를 사 신고 갔었다. 일할 때는 몰랐는데 끝나고 집에 가는데 발 뒷꿈치가 다 까져 너무 아파 신을 신을 수가 없었다. 맨 발로 지하철을 타고 이모 집 까지 갔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못할 것이다. 친구들은 학교를 다니는데 나는 그러지 못하기에 뒤쳐져 있다는 강박관념이 있었 던 거 같다”며 웃었다.

그는 올 연말까지 가게 하나를 더 여는 게 목표다. 25살에 200평 규모의 목포 프리미엄 푸드코트를 건립하고 30년 뒤에는 애플삼성창진이 되고 싶다. 하지만 최우선으로 목포에서 성공하고 싶다.

함박웃음 가득한 앳된 얼굴로 쉴 새 없이 울리는 예약 전화에 응대 하는 신창진쉐프의 창대한 미래를 그 누가 의심 할까. 그는 아직은 어린 친구지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열정을 품고 있는 목포의 아들이다.

최지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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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ivia 2016-10-12 09:13:24
신창진쉐프 응원합니다. ^^
저도 목포 원도심이 활성화 되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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