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갇힌 유배인을 찾아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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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갇힌 유배인을 찾아서-3
  • 류용철
  • 승인 2016.09.07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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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신지도에서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
▲ 원교 이광사

모래 울음소리가 십리 밖까지 들려 붙여진 이름 명사십리(鳴沙十里) 해수욕장이 있는 신지도. 절망의 섬 못지않게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섬이다.

예전에는 신지도는 유형의 섬이었다. 조선조 때도 46명의 선비들이 이곳에 귀양을 왔다. 송강 정철의 현손 정호(1648~1736), 김성탁(1694~1747), 서예가 원교 이광사(1705~1777), 윤행임(1762~1801), 다산의 형인 정약전도 이곳에서 8개월이나 살다가 흑산도로 이배되었으며 ‘석재별고’를 쓴 윤행임과 시조를 많이 지은 이세보(1762~1801)와 우두(牛痘)를 연구를 했던 지석영(1855~1935)도 신지도의 외로움과 추위를 견뎌낸 사람들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유배기록은 38회나 된다. 신지도의 유배생활의 애환과 아픔을 노래한 기록이 보이는 개인 문집으로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와 이세보의 ‘신지일록’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갑술옥사, 을해옥사, 신유옥사, 당론 등 정치적 사건에 연루돼 신지도로 유배왔다. 이들의 외로움은 하나의 명사(鳴沙)가 됐는지 모른다. 외로움과 삶의 절망과 추위를 견디며 예술의 경지를 일궜다.

신지도에 유배 온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의 삶이 그러했다. 그가 남기고 간 서체의 예술적 경지는 현대에까지 그 맥이 이어지면서 빛을 발하고 있다. 이곳에서 원교는 서법 이로서인 ‘원교서결(圓嶠書訣)’을 완결했다. 아들인 이영익은 신지도 서굴을 유람한 기문과 신지도 사람의 이상관에게 대한 글을 남겼다.

 

▲ 백련사 현판

추사 김정희 대흥사 현판 교체 일화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와 조선시대 독보적 서체인 추사체를 남긴 추사 김정희간의 대흥사 현판 글씨를 두고 벌인 일화는 유명하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제주도로 귀양가던 길에 13대 대종사인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를 만나기 위해 대흥사에 들렀다. 이 때 추사가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쓰여진 대웅전 현판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며 초의선사에게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글씨를 써 주며 달게 했다. 문제는 추사가 내려버린 대웅전 글씨가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것이었다.

더욱이 추사는 친구인 초의선사에게 이렇게 호통까지 쳤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인데 어찌 안다는 사람(초의선사)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달아놓을 수가 있는 것인가?”추사의 극성에 초의선사는 현판을 떼버렸다.

원교는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 특유의 서체인 동국진체를 완성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런 이광사의 글을 폄하한 추사의 자존심도 대단했지만 7년 3개월간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한양으로 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내게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현판은 어디 있는가? 내 글씨를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주게, 내가 그 때는 잘못 보았어.”

이것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 하루아침에 사형을 당할 뻔한 위기를 맞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추사가 제주도라는 절해고도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봤다는 증거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원교 이광사 역시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추사처럼 완도 신지에서 23년이나 유배생활을 했다. 그래서인지 전남의 절에는 원교의 글씨가 제법 남아있다. 대흥사의 대웅보전 외에도 침계루, 천불전, 해탈문이 그의 작품이고, 강진 백련사와 지리산 천은사 극락보전 일주문, 명부전의 글씨도 그의 것이다. 그의 아들이 훗날 연려실시술을 지은 이긍익이다.

원교가 신지도에서 세상을 뜬지 14년 뒤에 강진으로 유배를 온 다산 정약용은 ‘탐진 촌요(耽津村謠)에서 「글씨방이 옛날에 신지도에 열려 있어(筆苑舊開新智島)/아전들 모두가 이광사에게 배웠다네(掾房皆祖李匡師)」라고 노래했다. 이는 원교의 글씨가 전라도 사남해안에 넓에 전파됐음을 말하고 있다.

 

▲ 백련사 현판

원교 이광사 생애
원교는 조선 정종의 열째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왕실 후손으로 대대로 고관을 지낸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큰 아버지 이진유(李眞儒)와 부친 이진검(李眞儉)이 반(反)영조의 진영에 섰던게 화근이었다. 부친은 1725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가 1727년 유배가 풀렸으나 강진을 떠나기 전에 병사한다. 그때가 원교가 23세 때이다. 3년 후 큰 아버지가 이인좌의 난에 연루돼 옥사하자 출사를 단념하고 학문과 서화에 전념한다.

원교의 넓은 학식과 예술세계로 당대 석학들과 교유를 한다. 학문으로는 학고 정제두(霞谷 鄭齊斗)를 통해 양명학을 접하고 백하 윤순(白下 尹淳)을 스승으로 만나 글쎄에 눈을 떴다. 서예가로서 높은 안목과 지식을 얻을 수 있었던 죽마고우 상고당 김광수(尙古堂 金光遂, 1699~1770)가 있었다. 상고당은 18세기 서화고동의 대표적 수장가로 명망이 두터웠다.

원교는 영조 31년(1755)에 발생한 천주교도들의 나주 벽서사건에 연루된 이진유의 조카라는 이유로 51세에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곳에서 8년동안 원교는 사람들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쳤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1762년 신지도로 유배를 당한다. 원교는 23년의 귀양살이를 했으며 그의 삶 자체가 유배의 삶이었으며 시문학 전체가 유배 문학이었다.

 

▲ 당곡에 위치한 석굴

원교 신지도에서 유배 생활
원고는 신지도 당곡(대평리 딸골)이라는 곳에서 처음 살았다. 함경도 부령에서 완도 신지도까지 여느 유배인들처럼 원교도 사비를 들여 와야 했다. 한양길이 수천리길이라면 그 거리는 두배에 달했다. 5~6개월을 걸어 유배지에 도달하고 적거지를 마련했다. 원교가 섬을 들어오기 위해 남창에 돌달했을 것이다. 완도를 걸쳐 신도를 가야하는 원교에게 살아생전 마지막 육지였을 것이다. 남창은 어떤 곳인가? 해남 남창은 완도대교가 개통되기 전에는 완도의 들머리에 위치해 인근 바다의 해산물과 들판의 곡식들이 몰려드는 집산지였다. 장이 발달된 것이다. 남창 장은 옛날부터 ‘입 아픈 장’이자 ‘허망한 장’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이곳은 장날마다 많은 장꾼들이 밀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손님이 워낙 많았지만 ‘골장’(해 지도록 보는 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원교의 첫 적거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주변 대숲과 부친을 돕기 위해 함께 생활했던 아들 이영익이 원교의 손님들과 함께 바다를 거닐다가 발견한 석굴은 남아 있다. 원교는 얼마 후 금실촌(신지도 금곡리)으로 적거지를 옮겨 산다. 15년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적거지로 추정되는 곳은 원교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기록에만 남아있다.

서예이론의 기틀인 원교서결을 세우다
원교에게 신지도는 유배의 섬이자 서예를 완성하는 곳이였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안다/ 섬이 왜 바다에 홀로 떠 있는 것인지/ 떠나간 사람을 기다려 본 사람은/ 백사장에 모래알이 왜 그리 부드러운지/ 섬은 그리움의 모래알/ 거기에서 울어 본 사람은 바다가 우주의/ 작은 물방울이라는 것을 안다/ 진실로 우는 사람의/ 눈물 한 방울은 바다보다도 크다.”(원재훈의 시 ‘섬에서 울다’ 중에서)

원교가 신지도에게 배신과 원망, 참을 수 없는 원망으로 흘린 눈물 한 방울은 바다보다 큰 서예로 탄생했지도 모른다. 그는 15년을 머문 금실촌에서 자신의 호를 수북(壽北)이라 칭하고 ‘수북집(壽北集)’을 엮었다.

원교는 신지도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면서 후학들에게 자신이 터득한 서법 요결을 전하기 위해 ‘서결’을 저술한다. 서결은 전 후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편은 원교 59세(1764년)에 썼으며 후편은 4년 후인 63세에 아들 이영익에게 글을 쓰게 하고 교정을 본 후에 완성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원교서결(圓嶠書訣)이다. 이것은 중국과 조선의 서법을 역사적으로 상호 비교하고 조선 특유의 서법을 밝혔다. 동국진체라고 하는 조선 고유 서체의 형성 과정과 이론을 기록하고 있어 서예 역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동국진체(東國眞體)는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1662~1723)와 서화가이며 옥동의 친구인 공제 윤두서(1668~1715)의 합작으로 이록했다. 공제의 이질인 백하 윤순(1680~1741)에게 전수된 후 원교가 이를 완성했다. 이 서체는 중국 서예와의 차별성을 확보하기 위해 민족 고유의 정서와 감정을 토대로 한국적인 자연스런운 조형성을 추구했다.

원교의 동국진체(東國眞體)는 모자라서 맛이 나지 않거나 지쳐서 난잡함이 없는 특유의 깊은 흥취가 담겨 있다는 평를 받고 있어 조선 서예의 진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유용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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