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에 휘말려 임자도에 유배 온 우봉 조희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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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에 휘말려 임자도에 유배 온 우봉 조희룡
  • 류용철
  • 승인 2016.09.2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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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지 않으면(不狂) 미치지 못한다(不及)’ 진리를 일찍 터득
▲ 어머리해수욕장

조선시대 문인화 대가 매화를 사랑한 유배인

뻘이 바다에 녹아 물고기를 키우는 곳이 있다. 옥해(沃海) 한 가운데 떠 있는 섬 신안 임자도. 이곳은 광활한 모래사장인 대광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하지만 조선 후기 문인화의 대가인 우봉 조희룡과 연인 있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나라 문인화의 대가인 우봉 조희룡의 유배지가 임자도 이흑암리에 있다.

정쟁(政爭)에 휘말려 섬에 갇힌 선비의 춥고 시린 마음 한 자락을 느껴본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 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둘 떼지어 빠져 나갑니다.

정호승 시인의 ‘하늘의 그물’이란 시가 유배인에 걷힌 우봉의 마음같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우봉(又峰 1789~1866)은 1789년 생으로 추사보다 3년 뒤에 태어났다. 그는 1789년 아버지 상연(相淵)과 어머니 전주 최씨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선후기에 영락 하여 무반직으로 출사하다가, 아버지와 그의 당대에 이르러 중인계층으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글씨 쓰기와 난 치는 법을 추사에게서 배워 수제자로 인정받았다.

추사는 55세 때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로 귀양을 갔으나 우봉은 63세에 김조순 일파가 권력을 독점하면서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오규일과 함께 추사 김정희의 심복으로 지목되어 이곳 임자도로 귀양 와 3년을 바닷가 오두막에서 기거했다. 추사는 서귀포 대정읍 동문가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사방에 둘러쳐진 곳에 위리 안치되었고, 우봉은 파도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뿐인 이흑암리(당시 흑석촌)란 곳에서 갇혀 살았다. 우봉은 주민들과 교류하며 문인화에 심취했다.

▲ 조희룡 기념비

우봉 열정과 광기를 지닌 화가
우봉은 열정과 광기를 지닌 화가였다. ‘미치지 않으면(不狂) 미치지 못한다(不及)’는 진리를 일찍 터득했다. 스승인 추사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을 신봉했지만 우봉은 ‘그림과 글씨는 손끝에 달린 것이다. 손재주가 없으면 종신토록 배워도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며 손기술인 수예론과 그림 그리는 자체를 즐기는 유희론을 주장했다.

추사는 서권기 문자향을 가슴에 담아 그 정신이 화가의 창자와 뼛속으로 스며든 후에 기운이 손가락으로 흘러나와 그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중국 이론을 그대로 추종했다. 그러나 우봉은 중국 화법이 추구하는 이념과 기법을 따르지 않았다. 당시 모든 이의 눈에 익은 진경산수를 기존 방식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의 산과 강을 조선 산수화로 그렸을 뿐이다. 우봉 그림의 뼈대는 ‘불긍거후’(不肯車後)의 정신이다. ‘앞서 가는 남의 수레 뒤를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표절과 모사 모창이 판치는 이 시대에 경종이 될 만한 선지자적 업적이다.

추사는 제 길을 걷고 있는 우봉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조희룡 같은 무리는 나에게 난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칙 한길을 면치 못했으니 그의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추사가 그의 서자 김상우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고 하니 멘토를 따르지 않는 멘티에게 많은 배신감을 느꼈으리라.

오히려 우봉은 자신을 따르는 동료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벽오시사(碧梧詩社)를 결성하여 그의 화풍을 흔들림 없이 이끌고 나갔다. 소치 허유와 이덕무도 우봉을 따랐으며 후배 화가 유숙에게 배운 괴짜 화가 오원 장승업도 그림 속에서 우봉의 맥을 이어 명품 매화도를 완성해 냈다. 추사와 흥선 대원군이 난초의 달인이라면 우봉은 매화의 귀재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이 있듯이 매화 그림에 관한 한 추사도 우봉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도 ‘완당평전’에서 “우봉은 완당 일파 중에서 최고의 화가이며 산수와 매화는 추사를 앞지른다”고 말하고 있다.

▲ 우봉 홍매대대련

매화에 빠진 우봉
우봉은 방에 매화 병풍을 항상 두르고 살았으며 매화차를 마시며 매화벼루에 먹을 갈아 매화 그림과 매화시를 지었다. 자신이 살던 집을 유배 초창기엔 ‘만구음관’(萬鷗吟館`1만 마리의 갈매기가 우짖는 집)이라 했지만 섬 생활에 익숙해지고는 ‘매화백영루’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겨울 눈 속에서 피는 설중매(雪中梅)는 ‘일생을 혹한 속에 살지만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梅香)고 한다. 우봉의 삶이 늦봄에 피는 홍매와 같이 따사로움 속에 일생을 살지만 그렇다고 향기를 파는 일은 없는 지 모른다.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고매한 것을 좋아하여 매`난`국`죽을 사군자로 꼽았다. 그중에서도 매화를 으뜸자리에 올린 것은 자태와 품성 그리고 매향이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리라. 문화유산답사를 다녀보면 우리나라 전역의 유명 사찰과 서원 등에는 매화의 기운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다. 화엄매로 불리는 화엄사의 흑매(黑梅), 화엄사 길상암 아래 비탈에 서 있는 450년 된 야매(野梅), 백양사의 고불매, 통도사의 백매와 홍매, 산청 산천재의 남명매, 산청 예담촌의 분양매, 담양 죽림재의 죽림매, 명옥헌 원림의 명옥헌매 등 얼핏 짚어봐도 이름난 명품 매화들이 수두룩하다.

아마 이곳에도 우봉 매화도에 영향을 끼쳤을 매화가 어디엔가 있었을 지 모른다. 매화 나문가 남아있다면 200여년은 족히 되었을 것으로 우봉에게 영감을 준 매화나무라면 전국의 명품 매화로 이름을 올렸을지 모른다.

▲ 적거지 오르는 길

매화와 얽힌 이야기
매화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전남 승주 선암사 홍매의 자태가 아름답다. 선암사 무우전 옆 돌담에 기대고 서있는 수령 500여 년이 넘는 홍매 대여섯 그루는 자태와 색깔이 아주 아름답다. 그보다도 가람의 앞뒤 마당을 빗자루 없이 쓸고 다니는 매화 향기는 코가 시릴 정도로 향기롭다.

다음은 산청군 단성면 운리 단속사 터에 외롭게 서 있는 정당매가 그것이다. 고려 말 강희백이 단속사에서 공부할 때 심은 매화이다. 무너진 빈 절터에 홀로 서있는 고고한 모습은 너무 애잔하여 지금도 망막 속에 떠올리기만 하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또 한 이야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생 두향(杜香)이 애지중지하던 매분이다. 두향은 18세 때 서른 살이나 많은 단양군수 퇴계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리워하는 마음을 지닌 관기였다. 두향은 학문과 예술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당시 퇴계는 두 번째 부인과 사별한 지 두 해째 되는 해였다. 매화를 가꾸는 솜씨가 비범한 그녀였으니 매화를 좋아하는 퇴계가 빠져들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퇴계는 짧은 임기를 마치고 떠나기 전 날 밤 두향의 치마 폭에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다’(死別己呑聲 生別常惻測)는 시 한 수를 적어 준다. 두향은 퇴계가 떠날 때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매분을 마지막 정표로 가마에 실어 보낸다. 퇴계는 숨을 거둘 때까지 20년 동안 이 매화를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듯 애지중지한다.

두향의 분매는 얼음 같은 살결과 옥과 같은 뼈대를 지닌 보기 드문 빙기옥골(氷肌玉骨)이었다. 그 매화는 가지치기를 잘하여 등걸은 드러나고 줄기는 알맞게 구부러지면서 성깃하고 꽃은 드문드문 붙어 있는 최고의 단엽 백매였다.

이 매화를 잠시 서울에 두고 고향으로 내려온 퇴계는 못내 그리워 손자 안도를 시켜 자신의 거처로 가져오게 한 적도 있었다. 두향의 혼이나 다름없는 아취고절(雅趣高節)의 분매를 보고 퇴계는 ‘원컨대 님이시여 우리 서로 사랑할 때 청진한 옥설 그대로 고이 간직해 주오’(願公相對相思處 玉雪淸眞共善藏)라는 글을 짓는다. 이는 사랑할 때 나눈 운우지정을 그리워하며 두향에게 바치는 최고의 헌사가 아니었을까.

퇴계는 임종 날 아침 “분매에 물을 주라”고 이르고 두향의 사랑이 꽃망울마다에 서려 있는 매화를 바라보며 조용히 눈을 감는다. 퇴계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이다. 그런 행복한 열반이면 하루에 서너 번이라도 죽을 수 있을 텐데.

▲ 적거지 집

우봉 홍매대련과 얽힌 이야기
우봉은 임자도에서 머무는 동안 새로운 화법을 완성하고 자신의 그림세계를 집대성했다. ‘황산냉운도’, ‘방우림산수도’, ‘괴석도’등 임자도의 풍광을 화폭에 담으면서 그림에 몰두하여 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완성한다.

그중 대표작은 마치 용의 형상을 한 용매도이다. 용매도라 불려지는 ‘홍매대련’은 중국풍의 매화 그림과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수많은 매화 송이가 있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화려한 줄기가 있으며, 적지 않은 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엄청난 규모감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또한 우주로 비상하는 용에 역동성과 모든 이들에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천수관음의 자애로운 마음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우봉의 적거지에서 가까운 곳에 어머리 해수욕장과 용암굴이 있다. 이곳은 우봉의 작품과 밀접한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어느 날 천둥이 치고 비가 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용이 승천 한다”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조희룡은 급히 문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이미 용은 사라지고 난 뒤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용의 형상을 설명하였다. “마치 기둥과 같은 꼬리가 늘어져 말렸다 풀렸다 하면서 유유히 동그라미를 그리다가 구름사이로 들어가 없어졌다”고 설명하였다. 조희룡은 용이 승천했다는 곳에 가 보았다. 주민들은 이무기가 바위 속에 살다가 용이 되자 바위를 깨뜨리고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서 ‘용난굴’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솟구치는 용의 형상을 아름답게 표현한 용매도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우봉은 2년 반의 유배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림을 그렸다. 황량한 임자도 섬에서 갈매기와 벗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았고, 자연을 스승으로 삼고 만구음관에서 예술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유용철기자

<목포문화원 자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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