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을 지키고 사는 섬의 이야기꾼들의 이야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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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지키고 사는 섬의 이야기꾼들의 이야기-①
  • 류용철
  • 승인 2018.06.1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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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섬의 큰 소리꾼, 장필재-1
 

[목포시민신문=유용철기자]본보는 신안군 문화원에서 최근 발간한 ‘전통지식의 화수분 섬의 생애사’를 기반으로 김경완 사무국장 도움으로 ‘섬을 지키고 사는 섬의 이야기꾼들의 이야기’시리즈를 마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첫 번째 순서로 신안군 장삼도 부속 섬인 마진도의 장필재 소리꾼이 게재된다. 이어 다음 순서로는 진도 가사도 윤갑율 상여소리 주인공과 김막래 할머니의 이야기가 차례로 총 여섯 차례 게재될 예정이다.

본보는 장필재, 윤갑율, 김막래 등 3명의 진정한 섬의 예술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섬 문화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고 섬 전통 문화 계승 발전에 대한 대안을 고민해 본다.

<글 싣는 순서>
① 작은 섬의 큰 소리꾼 장필재-1,2
② 한 많은 상여소리의 주인공 윤갑율-1,2
③ 악착같이 놀 줄 아는 김막래-1, 2

장필재는 1932년 4월 28일(음) 생으로 2018년 현재 87세다. 마진도에서 남자로는 가장 나이가 많다. 대체적으로 여성의 수명이 더 길다고 인식되듯 마진도에 나이가 더 많은 여성은 두 분이 더 계시고, 한분은 동갑이니 마진도 최고령자 순으로 공동 3위인 셈이다.

하지만 장필재의 고향은 마진도가 아니다. 마진도는 장산면에 속한 섬인데, 마진도 북쪽으로 장산도가 있다. 그 장산도 북쪽의 오음리가 고향이다. 장필재의 할아버지는 하의도에서 사시다가 아버지 대에 장산도에 이주해 왔다. 그래서 선산은 신의면(1983년 이후 하의면과 신의면이 분면됨) 기동마을에 있다.

소리의 고장, 장산도 오음리

장산도의 오음리는 뒷산 오음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인데, 이름이 심상치 않다. 오음(五音)은 궁상각치우의 오음과 같다. 한결같이 오음리 주민들이 소리를 잘하는 이유가 이런 지명 탓일까. 거짓말처럼 오음리 출신들은 모두 다 소리를 잘 한다.

장필재의 사형제들도 모두 (판)소리를 잘하고 좋아했다. 형 장필운은 목포에서 소리만 하다가 돌아가신 분이라고 했다. 전문가에게 소리를 배우지 못했고, 무대가 아닌 술집에서 소리를 하고 다니는 것이 한계였지만 어디에서나 환영받는 인물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장필재가 둘째였고, 셋째 동생(소리꾼 장보영의 아버지)과 막내도 음악에 소질이 있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장산도.

장산도를 대표하는 소리꾼의 한명이 하중숙(1924년생)이다. 그는 국악과 소리에 재능이 많고 실제 여러 곡을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창극단을 조직해 인근 섬을 찾아 공연한 사실은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진다.

장필재는 오음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한 동네의 하중숙 어르신이 동네 사람들과 창극단을 만들어 공연하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해방 직후였던 그때 여성들이 창극단 활동을 할 수 없어 남성들이 여장을 하고 공연을 진행했다. 하중숙은 늘 주인공을 맡았는데, 춘향전의 경우 성춘향을 맡았고, 이암용이 방자역할을 맡곤 했다.

“오음리는 다섯오자, 소리음자를 써요. 산세 때문이여. 산세에 그런 뭣이 타고 나지 않느냐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스승님이 하중숙이라고 그 분이 옛날에 왜정 때 유성기를 틀어놓으면 노래가 나올 것 아니여? 그런디 그분 친구 분하고 둘이가 우리가 째그마한 때 공부를 하드란 말이여. 사설을 적고 못 적으면 다시 바늘을 옮기고... 내가 지켜봤어. 거기서 사설을 받아가지고 한 거야. 그때 당시는 그분들이 이름을 날렸어. 지방에서 연극을 차려 가지고 신안군 안다닌 데가 없어. 이암용이가 방자역할을 하고 하중숙 그분이 춘향이 역할을 하고. 남자가 다 했어. 소리하는 여성분들이 없으니까... 남자가 여장을 한거야. 그때 당시 이름이 났어. 그란디 하중숙 그분이 중간에 예수를 믿으면서 소리를 멀리해 불드라고. 지금 생존해 계세요. 제가 살풀이 같은 것을 목포에서도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쳤어. 춤장단을 굿거리를 말하자면 가락을 많이 집어넣어서 치는 장단이제. 싸게 친다고 해서 소리를 귀로 듣고 내가 만들어야제. 만들어 쳐야지. 따라서.... 손으로 갈칠 수도 없어. 귀로 듣고 이녁이 만들어야 돼. 그란디 그것도 안해 부니까 손이 둔해 부니까 마음대로 안됐제. 그라고 소리도 사실은 판소리를 다 했어요.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을 다 했어요. 안해 부니까 사설을 다 까먹어 부렀어요. 몰라. 처음부터 끝가지 다 했지. 그 전에 소리하고 다닐 때는 옆에서 소리 듣는 사람이 어떻게 저 소리를 머리에 담아가지고 저렇게 하냐고 그랬어요. 심청전이 서너 시간 가차이 걸리죠. (심청전이 보통 4시간 반 정도 소요됨) 옛날에는 다 했지.”

오음마을 주민들로만 극단을 구성해 운영했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재능 있는 마을 주민들이 많아 충분히 가능했다. 창극단을 주도하던 하중숙은 후배들을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장필재와 나이가 비슷한 다섯 명을 골라 소리 연습을 시켰다. 이때가 열 두 살, 열 세 살 정도였을 것이라고 기억했다. 이 나이는 본격적인 단원이 될 정도는 아니였지만, 예비 후보자격으로서 기능을 전수받을 수 있는 때였다. 전문 소리 선생은 아니지만 한 동네 안에서 소리의 전통이 계승되는 체계가 완벽하게 자리 잡혀 있었던 셈이다. 제자들 중 장필재의 목소리나 재능이 월등하게 뛰어났던지 판소리와 여러 가지 가사를 적은 책(가사집)은 나중에 장필재에게 전수되었다. 하지만 그 책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군대에 다녀와 보니 집에 있어야 할 그 책이 사라져 버린 것.

『신안군지』(3권, p579, 2017. 신안군지편찬위원회)에는 하중숙 선생이 그 가사집을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잠깐 소개되어 있어 그 내용을 실어본다.

“...(중략) 그때에 유성기 말고 돌아댕기면서... 소리 나는 것, 전축을 듣는디, 참 똑똑하게 가사가 나와요. 유성기는 가사가 희미해. 뭐라고 하는 줄 몰라요. 그란디 전축은 똑똑하게 나오면서 춘향전을 하는데 잘 하드라고요. 그래서 필기를 했지요. 그런디 내 머리에 음성이 들리는데, ‘하집사야, 너는 성경학교 와서 구습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노래공부를 또 할라고 하느냐... 하지마라’하는 책망이 내 머리에 쏙 들어요. 나는 욕심에 ‘이거 부를라고 적는 것이 아니고 갈칠라고 적습니다. 마진도에 장필수라고 제자가 있어요. 내 답변이 그랬어요...(중략)”
- 「장산 오음리 소리꾼 하중숙」 中

여기에서 언급되는 장필수(녹취록의 원본에도 장필수라고 지칭한 것이 분명함)는 장필재를 말한다. 하중숙 선생이 제자를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 좋은 가사를 전하려고 노력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단락이다.

이렇게 소리를 배우고 즐겨 부르던 그는 종종 소리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젊었을 적 큰 행사에서 그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비금도에 유옥우 국회의원 아버지 소상 때 불려갔던 기억이 있다. 장례식장에서도 ‘밤달애’라고 망자를 위로하며 노는 판도 있지만, 소상 때도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즐겁게 만들어 줘야 했다. 당시 춘양전, 흥부전의 여러 대목을 들려주며 찾아온 사람들을 한시도 가만히 있게 하지 않았다. 밤새 놀 기세로 그렇게 보내기도 했다.

“내가 좋아서 한 것도 있지만, 내 노래를 옆에서 듣고 다 좋아한단 말이여. 그래서 소리 공부를 하다가 내가 하의도 신의면 기동마을이라고 있어요. 거기서 놀러오라고 하니까 간 거지. 상당히 커요. 한 100여 호가 될 거야. 그분들이 나를 초대해 가지고 저녁밥을 먹는데, 어떤 분이 ‘소리 잘한 사람 온께 저녁밥을 먹고 들어보자’고 한거야. 저녁밥을 먹고 있으니까 어르신들이 한분 두 분 모여 들드라고. 그라다가 상을 내 놓으니까 그 소리를 해. ‘저 장산서 온 젊은이가 소리를 잘한다고 하니 듣고 가서 자고 싶다’고. 죽은 사람도 소원을 들어준다는데 저렇게 소리를 듣고 잡다는데 대접해보라고. 어르신들이 듣고 싶어 하니까 들려줬지. 그런데 한자리 듣고 가지 않고, 한자리 더, 한자리 더 그런 거야. 고수도 안데꼬 가고 혼자 갔는데.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하다가 하니까 듣는 사람이 싫증이 안나지... 그러다가 날이 샌거지... 동네사람들과 꼬박 날을 샜다니까. 그때는 창이 내가 타고나긴 타고 났어요. 오래 쓰면 목이 갈리는데 저는 목이 쓰면 쓸수록 새창이 나부러요. 더 듣기 좋은 창이 나오니까...”

장산도에서 술도가집을 운영하던 김을팔이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소리꾼들이 오면 초대해 자리를 마련했다. 그곳은 겨울에도 술밥을 쪄야 하기 때문에 방이 항상 뜨겁게 준비되어 있어 그곳에서 놀곤 했다. 당시 그는 유명한 선생이 왔다고 하면 직접 가 보았다고 한다. 덕분에 장필재는 여러 섬으로 공연을 다니면서 광주의 임방울 선생과 놀아보기도 했다.
<신안문화원=김경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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