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목포의 아픈 역사 기억하기] “국군‧경찰 후퇴계획 따른 계획적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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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목포의 아픈 역사 기억하기] “국군‧경찰 후퇴계획 따른 계획적 학살”
  • 김영준
  • 승인 2023.05.13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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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에 협력 관주 희생자들 미리 살해했던 것“ 증언
1기 진실화해위 ‘전남서남권 민간인 학살’ 보고서에 담아
■기획/ 목포의 아픈 역사 기억하기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수가 공개한 1950년 7월 공주 학살 현장.
이 사진은 영국 픽처포스트(Picture Post)지에 실린 것으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공주에서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수백 명이 집단학살됐다.

[목포시민신문] 1기 진실화해위에서 활동한 신기철 전 조사관은 “6.25전쟁 발발 후 호남지역에서의 국민보도연맹사건과 전투의 관계는 다른 지역의 경우와 달리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기철 전 조사관은 호남지역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전투의 주도권이 국군과 경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침략 의도를 가진 공격자가 아니라 후퇴 계획을 하고 있는 방어자가 주도권을 쥔 기이한 전투였다전투가 없었으므로 후퇴 일정에 맞춰 체계적, 계획적으로 학살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고 밝혔다. 대부분 지역에서 체계적으로 학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드러나며 희생 일정 역시 대체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는 미군 작전 지역에서 발생한 국민보도연맹사건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국민보도연맹사건에 가담한 가해 측 군인이나 경찰관들은 인민군이 점령할 경우 희생자들이 여기에 협력할 것이므로 미리 살해했던 것이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인권유린은 전남 서남권 곳곳에서 자행됐다.

무안 청계 복길마을 희생사건

19507월 인민군 6사단 제13연대는 목포로 가는 길목인 무안군 청계면을 점령하고 1개 분대를 복길마을로 보냈다. 이들은 후퇴할 때까지 복길마을에 상주하며 지역을 통치했다.

주민들은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이불과 식량을 제공했다.

하지만 인민군은 매일 당산나무 밑에서 교육과 회의를 하며 주민들을 세뇌했고, 불참한 사람에게는 구타를 일삼았다.

19217월 설립된 복길교회는 마을 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해왔다. 주민의 80%가 기독교인인 이유다. 주민들은 평소 무당과 머슴 등을 천시하고 배척했는데, 이 때문에 좌익들은 복길마을을 우익 기독교 마을로 인식해 퇴각기에 24명의 주민을 바다에 수장하거나 마을 뒷산에 생매장해 죽였다.

진실화해위에 의하면 복길마을 희생사건의 가해 주체는 인민군 6사단 소속 제13연대와 지방 좌익들이었다.

사건은 모두 9·28서울수복 이후 인민군 퇴각 시기인 1950928~101일 사건이 발생했다.

무안지역사건

#전쟁 전 피해= 무안 하의도(조사 자료의 지명 오류로 보임)에서는 19468월 강제공출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시위가 있었다. 경찰이 이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자 분노한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미군정은 하의도 일대에 계엄령을 내리고 미군을 파견했다.

주민들에 대한 공권력의 공격은 1949년에도 있었다. 1949814일 무안경찰서는 해제면 만풍리 이창현 등 5명의 주민들을 운남면 내리 저동마을 야산에서 총살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한 직후 무안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무안경찰서로 연행됐다. 주민들은 경찰에 의해 분류되어 일부는 목포형무소로 보내져 희생되었음이 확인됐다.

당시 무안경찰서 근무자 이모씨는 유치장은 2개로 모두 4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목포형무소에 감금된 보도연맹원은 1950713일부터 경찰이 후퇴하기 전인 723일 사이 목포시 인근 바다(신안군 비금면 해상)로 전남도경찰국 경비선에 실려 나가 선상에서 사살된 후 바다에서 희생당했다.

이들 외에 무안경찰서에 남겨진 국민보도연맹원들 역시 어디선가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아직까지 이에 대해 조사된 바는 없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해제면에서만 36명 정도가 희생되었다는 증언을 확보한 바 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무안지역에서는 인민군이 후퇴한 뒤에도 인민군 측에 의해 주민들이 집단희생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50103~4일에는 23가족 150여 명이 해제면 천장리 가실해안가에서 인민위원장 등 50여 명에 의해 집단희생되었다고 한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일가족이 희생된 경우가 많다. 무안지역이 완전히 수복된 것은 19501015일이라고 하며, 시신은 19513월 가해자의 가족들을 동원해 수습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국군 수복 후에 발생한 사건 중 대표적인 것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규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사건 발생일이 언제였는지 조사마다 다르며, 비록 완전한 수복이 늦었다고 하나 읍내 등 주요 지역이 이미 수복된 상황에서 150여 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의문이 있다.

이 사건의 발생 시기는 판결문, 전남일보, KBS위령비, 무안군사 등 자료마다 달랐으며, 가해주체도 패주하던 인민군, 지도방면에서 온 무장공비, 천장리 자위대로 각각 달랐다.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에 대해 1950104일 저질러진 것으로 판단했는데, 가해자 관련 판결문들에는 각각 915일과 101일로 서로 다르다. 마을에 세워진 위령비는 1014일로 기록되어 있고, 1952년 공보처가 발행한 피살자 명부에는 여러 날에 걸쳐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104일과 6일 희생자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희생자들에 대한 사망신고는 대부분 103일로 되어 있다.

#부역혐의 피해= 무안지역이 무안경찰서에 의해 완전히 수복된 때는 1014일이라고 하는데,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은 경찰이 수복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안경찰서는 195010월 함평읍 가동리 주민 은성수와 무안읍(당시 면성면) 성남리 주민 박희규 일가 3명을 고절리 무안천변의 한다리교 밑에서 총살했다. 한편 1014일 무안읍 성남리에 거주하던 박희규와 그의 가족을 좌익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같은 장소에서 경찰이 총살했다.

이때 30여 명의 주민들이 함께 희생됐다. 이외에 무안경찰서는 몽탄면 학산리 산음마을 주민 이일신을 마을 인근 철로 변에서 총살했으며, 같은 시기 몽탄면 이산리 배뫼마을 주민 임종일은 무안경찰서 경찰의 수배를 피해 집을 나간 후 행방불명됐다.

망운지서는 연행한 주민들을 면소재지 면화창고와 금융조합창고에 감금했는데, 당시 연행된 주민들 중에는 현 운남면 사람들이 많았다. 195010월 중순 연행된 주민 중 30여 명이 압창포 백사장에서 집단희생 당했다. 당시 희생자 중에는 해방이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한 망운면 목서리 김상균의 동생 김천우(교사, 당시 28) 등이 있었다. 당시 치안활동에 참여했던 주민 증언에 의하면, 지서에 있던 수류탄을 사용해 폭사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삼향지서는 1950114일 우익단체원들을 동원하여 지서 인근 섬너리 갈대밭에서 삼향면 유교리 주민 정해선을 총살했다.

해제지서는 수복 후 부역자를 색출한다며 대한청년단원들을 이끌고 각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들은 195010305명의 경찰이 10여 명의 대한청년단원들과 함께 송석리 송계마을에서 노영수 외 1명을 총살했다.

이에 대해 당시 함께 있었던 대한청년단원 출신 주민이 이를 목격했다. 이에 따르면 경찰 등은 마을에 도착하자 이장에게 밥을 지어달라고 했고 이에 이장이 앞에 간 경찰이 밥을 다 먹고 가서 새로 짓겠다고 하자 경찰이 이를 트집 잡아 사살한 것이었다.

해제지서는 1951년에 들어서도 주민들을 계속 살해했다. 14일에는 해제면 만풍리와 송석리 주민 정종태 외 6명을 양매리 지서 인근 바닷가에서 총살하였고, 25일에는 만풍리 주민 정성준을 총살했다. 한편, 같은 날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접한 정종태의 부친 정성준은 경찰에게 수차례에 걸쳐 이를 항의했다. 그러자 경찰은 정성준까지 연행하여 해제지서 인근 야산에서 총살했다.

현경지서는 19501031일 지서에 갇혀있던 현화리 성재마을 주민 박황보 등 주민들을 현경면과 망운면의 경계지점인 장가테에서 총살했다. 현경지서는 1028일 현화리 주민 정귀례를 살해했으며, 116일에는 그 당질 박기재를 타살했다.

신안지역사건

#국민보도연맹사건= 신안에서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요청에 의해 신안군 관내 읍·면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사실을 조사(‘기초사실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 보도연맹 사건으로 분류된 희생자는 5명이었다. 유족 정해순은 부친 정수종은 희생되기 전에도 좌익활동을 했다고 하여 지서에 잡혀가서 가서 매를 맞고 온 적이 있다. 전쟁 발발 후 경찰에 연행되어 목포시 인근 바다에 수장되었다. 제사는 음력 522(195077)인데 이날이 집에서 나간 날이다. 소문에 지도읍 전체에 12명이 함께 희생되었다고 증언했다.

#부역혐의 피해= 국군은 1950102일 목포에 진입했다고 하는데, 104일 저녁 무렵 군인 1개 소대 병력이 인민군 복장을 하고 비금면 북부지역인 신원리 원평항으로 상륙했다.

군인들은 당시 면사무소가 있었던 덕산리 덕대로 이동하여 국군의 배지를 뒤집어 단 채 불을 켜고 마을을 다니면서 주민들을 마을 앞에 집결시켰다. 주민들은 군인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한 채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마을 앞에 집결했다.

군인들은 청장년들을 민가 창고에 감금한 상태에서 경찰에 인계한 뒤 비금면을 빠져 나갔고, 감금된 주민들을 밤에 경찰에게 바닷가에서 살해당했다. 당시 창고에는 비금면 주민 40여 명이 있었다. 이후에도 비금지서에 갇혔던 주민들 13~14명이 19501129일 목포경찰서로 간다면서 도초로 가는 길에 살해당했다. 당시 비금지서 근무자 최모씨는 신안경찰서 사찰계가 비금면 수문통에서 24명을 총살하려고 했는데 비금지서장이 이중 13명을 구명한 일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지도지서는 지서 인근 창고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을 깨대골등에서 총살했다. 지도읍 봉리 표용진은 마을에 온 경찰 30여 명에게 연행당해 지도지서 창고에 감금되었다가 19501020일 광정리 방아들 깨대골에서 경찰에게 살해됐다.

지도읍 어의리 반장 임동원은 주민들의 추천으로 인민위원장을 했는데 이 때문에 지도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경찰의 조사를 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수습하여 죽곡리 대실재에 매장됐다. 내양리 둔곡 김성수와 김금순은 1031일 연행되어 지도지서 옆 정미소에 1주일 정도 감금되었다가 살해되었으나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

내양리 외양마을 인민위원장 박안수도 경찰에게 자수하여 창고에 감금된 후 119일 어디선가 살해당했다. 같은 마을 박윤수도 함께 희생당했다. 이외에 지도읍 감정3리 백련동 나기천, 나기십 형제가 희생됐다.

나기천은 19501113일 경찰에게 지도읍 화면나루에서 연행되어 지도지서 창고에 3, 4일 감금되었다가 목포로 이송도중 배 위에서 총살당했다. 또 나기천의 동생 나기십도 한달 즈음 뒤 논에서 일을 하던 중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형과 함께 좌익활동을 했다는 이유였다.

암태지서는 1950926일경 암태면 와촌리 박의담 등 3명을 연행하여 지서에 감금했다가 5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암태면 박달산 근처 해변에서 총살했다.

중도지서는 19501021일 병풍리 박희택 등 주민 18명이 증도면 등선리 야산에서 총살했다. 1950111일에는 조광우 등이 희생됐다.

장산지서는 처가인 장산면 오음리 광포마을에서 피난하던 영암군 군서면 송평리 조희채를 19501030일경 연행한 뒤 113일 오음리 바닷가에서 총살 후 수장했다.

자은지서는 1950122일 대율리 김재우, 김옥남 등을 연행해 자은면 남진선착장에서 살해했다. 경찰은 이들을 배에 싣고 나가 돌을 매달아 바다에 수장했다.

영암군 상월리 교회 교인 희생사건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전남에서 가장 많은 희생사건이 발생한 곳은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다.

상월리는 집이 크든 작든 집집마다 빨치산이 방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어두웠다.

상월리는 과거부터 군경이 빨치산 토벌작전을 벌였던 곳이다.

이 과정에서 빨치산들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그 보복으로 주민들의 희생이 컸다고 한다.

상월리에서는 주로 경찰 가족이거나 부유하다는 이유로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빈번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회 교인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195011월 초 상월리 앞 하천(일명 폿둠벙)으로 끌려가 죽창 등으로 희생당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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