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목포의 아픈역사 기억하기①]“그날 목포에 민간학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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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목포의 아픈역사 기억하기①]“그날 목포에 민간학살 있었다”
  • 김영준
  • 승인 2023.05.13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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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 직후 목포형무소 1400명 가장 먼저 수장
1948년 12월 5일 주민 6명 목포대 운동장서 총살
1950년 7월 24일 미 폭격기 목포수력발전소 폭격
1950년 9월 28일 인민군 주민 120여명 집단학살
1950년 10월 20일 국군 부역혐의 주민 4명 희생
진실화해위, 한국전쟁 전후 목포 민간인학살 발굴
■ 기획/ 목포의 아픈 역사 기억하기

본지는 해방 전후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목포에서 발생했으나 묻혀진 과거사를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관한 숙제를 지역에 던지고자 기획보도한다.

목포를 흔히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부른다. 일제강점기를 관통한 근대의 역사적 경험과 유산이 지금 목포의 강점이다. 하지만 근대 일제강점기의 건물과 흔적에만 집중돼 있지, 이후 근현대의 아픈 역사나 숨기고 싶은 사건은 조명받지 못한 채 사건의 실체는 심지어 묻혀 있는 것도 있다. 너무 적은 기록 그리고 묻힌 채 사라지는 과거사를 발굴 정리해, 지금 어떻게 기억할지 방법론을 찾는 후속 작업의 토대로 삼는다<편집자 주>

<글 게재순서>
라지는 그날의 현장1 : 묻힌 목포 민간학살
사라지는 그날의 현장2 : 살고자 탈옥한다. 목포형무소에 수감된 제주4.3
사라지는 그날의 현장3 : 행방불명된 감화원 목포학원 소년범들
사라지는 그날의 현장4 : 잊혀진, 물로 배 채운 부두노동자파업 흔적 찾기
왜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걸어야 하나? : 목포의 다크투어 필요성과 현 주소
아픈 역사 기억하기, 그 방법부터 배우자1- 제주43 평화공원과 평화재단
아픈 역사 기억하기, 그 방법부터 배우자2- 두 번째 홀로코스트 추모비 건립한 비엔나
또 하나의 다크투어, 9년째 고하도 세월호 지키는 사람들이 말하는 기억하기

[목포시민신문] 19506·25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은 목포에서도 일어났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2022년 하반기 조사보고서를 세상에 공개했다. 보고서에는 목포를 비롯한 6·25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을 포함한 다수의 사건 결정서 전문이 실렸다.

진실화해위와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에 따르면 6·25전쟁이 발발하자 목포에서 가장 먼저 희생된 민간인들은 목포형무소에 수용되었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었다.

특히 국민보도연맹원들은 목포지역뿐 아니라 무안, 함평 등 인근지역에서 끌려온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경찰 후퇴 전날인 1950723일 전남도경 경비선 금강호에 실려 신안군 비금면 인근 해상에서 수장됐다. 이 사실은 목포경찰서 사찰계 승모씨 등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목포경찰서 수사계 근무자 정모씨에 의하면 해군기지사령부, CIC, 목포경찰서가 합동으로 학살에 가담했는데, 목포경찰서 소속 경찰이 직접 총살에 가담했다는 증언이 있다.

당시 형무소 간수부장이었던 이모씨의 목격담에 따르면 당시 수감된 주민들은 징역을 살 줄 알았을 뿐 처형당할지는 몰랐으며, 당시 형무소는 포화상태로 보도연맹원을 수용할 공간이 없었으므로 끌려 온 당일 밤 실려 나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증언과 자료에 의해 목포형무소의 희생자 중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의 규모 추정이 가능하다. 목포형무소의 재소자 수는 194981,085명이었다. 형무소 간수부장이었던 이모씨에 따르면 국민보도연맹원과 재소자 등 1,4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으므로 당시 희생된 재소자는 1천여 명, 국민보도연맹원은 400여 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보도연맹사건 등을 비롯해 한국전쟁 당시 거의 무차별적 민간인학살을 보면 요즘 구제역사건으로 가축을 '무작위'로 살처분, 생매장하는 것과 너무 유사한 양상이다.

과거 6·25전쟁 당시 남북의 극심한 대립과 혼란한 정세 속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됐다. 하지만 민간인 집단학살의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유가족들은 지금도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나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1기 진실화해위에서 활동한 신기철 전 조사관이 발굴한 목포지역사건은 다음과 같다.

# 전쟁 전 피해= 목포에서는 1948125일 목포경찰서에 끌려갔던 백경조 등 6명의 주민들이 목포대학교 운동장에서 총살당했다.

# 미군폭격 피해= 국군과 경찰이 후퇴한 직후인 1950724일 오전 정찰기의 선회 후 미 공군 49폭격전대가 조선내화 인근 목포수력발전소를 폭격해 수력발전소 근무자 1명이 사망했다. 광주가 723일 인민군에게 점령당했으므로 폭격 당시 목포에는 인민군이 진주하기 이전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근처에 해군기지가 있었으므로 이를 폭격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목포에서는 후퇴하던 인민군 측에 의해 주민들이 희생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1950928일 목포형무소에 있던 주민 120여 명이 트럭에 실려 목포수원지 근처에서 집단희생 당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7월 말경에 인민군이 목포를 장악했다.

# 부역혐의 피해= 목포지역은 해군에 의해 수복되었으며, 곧 해병대가 주둔하여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을 색출했다. 이 과정에서도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국군 해병 2대대는 19501019일 목포부두에 도착해 산정국민학교에 대대본부를 설치했다. 해군의 백부대(백남표 소령의 부대)로부터 목포시의 치안과 경비임무를 정식 인수하고 1020일에 해남부근 산악지대, 월출산과 국사봉 토벌작전을 결정했다. 이 시기에 양동과 서산동에 살던 허한수 등 4명이 목포경찰서로 연행되어 어디선가 희생당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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