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목포의 아픈역사 기억하기⑤]“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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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목포의 아픈역사 기억하기⑤]“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진다”
  • 김영준
  • 승인 2023.06.22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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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아픈 역사 기억하기 기획보도

본지는 해방 전후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목포에서 발생했으나 묻혀진 과거사를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관한 숙제를 지역에 던지고자 기획보도한다목포를 흔히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부른다. 일제강점기를 관통한 근대의 역사적 경험과 유산이 지금 목포의 강점이다. 하지만 근대 일제강점기의 건물과 흔적에만 집중돼 있지, 이후 근현대의 아픈 역사나 숨기고 싶은 사건은 조명받지 못한 채 사건의 실체는 심지어 묻혀 있는 것도 있다. 너무 적은 기록 그리고 묻힌 채 사라지는 과거사를 발굴 정리해, 지금 어떻게 기억할지 방법론을 찾는 후속 작업의 토대로 삼는다<편집자 주>

<글게재 순서>

사라지는 그날의 현장1 : 묻힌 목포 민간학살

사라지는 그날의 현장2 : 살고자 탈옥한다. 목포형무소에 수감된 제주4.3

사라지는 그날의 현장3 : 행방불명된 감화원 목포학원 소년범들

사라지는 그날의 현장4 : 잊혀진, 물로 배 채운 부두노동자파업 흔적 찾기

왜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걸어야 하나? : 목포의 다크투어 필요성과 현 주소

또 하나의 다크투어, 9년째 고하도 세월호 지키는 사람들이 말하는 기억하기

아픈 역사 기억하기, 그 방법부터 배우자1- 제주43 평화공원과 평화재단

아픈 역사 기억하기, 그 방법부터 배우자2- 두 번째 홀로코스트 추모비 건립한 비엔나

[목포시민신문] 왜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걸어야 하나? 어두운 우리의 아픔도 결코 잊어서는 안됨을 강조하며, 단순히 즐기는 여행을 넘어설 수 있는 다크투어(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 목포의 다크투어 필요성과 현주소에 대해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2과 신기철 팀장과 목포대 사학과 최성환 교수, 전남도의회 조옥현 도의원에게 묻고 들었다.

이들은 다시는 이념과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학살은 기록되고 진상규명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잊히지 않고, 반복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풀지 못한 과거사 산적학살 현장 슬픔과 고통 기록해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 위원회 신기철 팀장

국가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가족을 잃고 평생토록 가슴에 한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을 우리는 기록해야 한다.”

학살 현장의 슬픔과 고통을 기록하고 있는 신기철 팀장의 일성이다. 신기철 팀장은 1기 과거사위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목포 등 전남지역 민간학살에 대해 조사했고 지금은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21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신기철 팀장은 목포 관련 4건의 민간인 학살 사건은 국방부와 경찰 등 정부문서를 조사해 정리한 것일 뿐 당시 사건과 관계된 이들에 대한 조사는 일부만 이뤄졌다조사 시간과 인력 등 물리적 한계가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지자체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조사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학살을 기록하는 작업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신 팀장은 기록으로 남겨야 잊히지 않는다. 특별히 교훈 같은 것을 덧붙이지 않아도 된다. 순수한 기록이 기억되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신 팀장은 한국전쟁 동안 국가가 자행했던 범죄는 정권에 의해 조직적으로 은폐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 밝혀내기 어렵다며 민간인 학살사건을 밝혀내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한국전쟁 전후 국가에 의해 가족을 잃었던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들에게 과거는 트라우마.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들은 빨갱이의 자식이란 이유로 연좌제에 시달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50년간 빨갱이몰이를 당해 왔으니 쉽사리 자신이 피해자의 유가족이란 사실을 떳떳이 밝히기 어려웠다좌절을 겪은 유족에게 과거사위원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개인의 힘으로 50년 전 국가 범죄를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지자체가 나서야 한다고 당부했다.

1기 과거사위에서 조사관으로 근무했던 신기철 팀장은 과거사위 활동 당시에 다 규명 못 한 피해자만 4000명이 넘는다현재 확인 가능한 추가 희생자만 해도 8000명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인명 피해 규모가 컸던 보도연맹 사건은 정확한 희생자 집계 자체가 힘들 정도다. 최소 10만에서 최대 30만 명은 될 것이라는 추정만 있을 뿐이다.

신기철 팀장은 1983년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1990~1997년 서울 남부금속 노동조합,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에서 활동했다.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고하도 감화원터
목포대학교 사학과 최성환 교수

감화원은 일제가 한국을 어떻게 통치했는지 그 실상을 보여주는 역사의 증거이다. 아픈 역사의 현장을 탐방하는 다크투어리즘의 장소로 활용가치도 있다. 고하도 감화원 터가 일제의 잘못된 통치정책과 해방 후 비민주적 시대에 있었던 비인권적 상황에 대해 추모하는 공간이자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재탄생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고하도 감화원은 일제강점기 감화원 가운데 두 번째로 생긴 곳이고, 남한 지역으로만 보면 감화원 중에 사장 빨리 생긴 곳이다. 고하도 감화원 터는 일제 강점기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현장, 섬이 지닌 격리와 고립성이 극대화된 현장으로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최성환 교수는 최소 1938년부터 1967년까지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고하도에 그러한 시설들이 유지되었고, 누군가는 외부 세계와 격리된 채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우리에게는 그 흔적을 보존하고 기록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재 고하도 감화원 터에는 안내문 하나조차 세워져 있지 않다사유지이기 때문에 행정에서 독자적으로 뭔가를 추진하기에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고 지속적인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이유를 들었다.

안산의 선감도와 관련해서는 그 지역의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작은 기념관과 추모비가 세워져 있고, 관련 학술행사도 지속되고 있다. 현대시기에 억울하게 선감도 감화원에 갇혀있었던 분들에 대한 명예 회복을 위한 노력도 병행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목포 감화원의 경우는 그 존재 사실조차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실정이다. 지난 2019년 세계 마당페스티벌 기간에 이곳에서 공식적인 첫 추모행사가 열렸다. 감화원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고 감춰져 있는 아픈 역사를 되새겨 보기 위한 자리였다.

최 교수는 이러한 뜻깊은 행사가 일회성으로 끝나면 안 될 것이라며 목포 감화원에 대한 보다 많은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고, 묻혀있는 목포부두노동자동맹파업에 대해서도 기념공원 조성 같은 후속작업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성환 교수는 국립목포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섬 전문 연구소인 도서문화연구원에서 활동하고 있다. 목포 남교동 큰 시장에서 태어나 자랐다. 지금도 목포 원도심에 살면서 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그 가치를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목포와 관련해 목포의 해항성과 개항장 형성과정의 특징’, ‘목포 고하도 일제강점기 역사유적의 내력과 그 성격에 대한 고찰’, ‘1919년 목포 4·8독립만세운동의 전개과정과 주요인물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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