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과 천주교 문제
상태바
다산과 천주교 문제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7.08.30 15: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01년 초봄의 신유옥사(辛酉獄事)는 가공할 비극이자 참극이었습니다. 어떤 기록에는 무려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때 정약전·정약종·정약용 3형제가 함께 투옥되어 국청에서 국문을 받는 불행에 처해있었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정약종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는데, 정약종이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중(仲:약전), 계(季:약용)가 함께 천주교를 믿지 않음이 한스럽다(仲季之恨不同學)”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와 기필코 죽이려던 약전·약용은 죽이지 못하고 유배형을 내렸습니다.

그해 가을 ‘황사영백서’사건이 터지자 다산의 반대파들은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다시 신지도에서 약전을, 포항 곁의 장기에서 약용을 다시 압송하여 이번에는 반드시 정약용을 죽이려고 했지만, 황사영백서에 관여한 증거가 전혀 없어 귀양지만 바꿔 일을 종결했습니다. 이때 반대파 박장설은 대사간이었는데 홍희운이라는 사람이 박의 집에 찾아와 “천 사람을 죽이더라도 약용을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과 같다(殺千人 不殺鏞 不如無殺)”라고 말하며 반드시 정약용을 죽게 해야 한다고 큰소리쳤다는 내용에서, 봄의 옥사나 가을의 옥사 모두 그 근본 뜻은 정약용 한 사람을 반드시 죽여야 하는 옥사였음을 알게 해줍니다. 천 명의 목숨을 끊어도 정약용 한 사람 목숨을 끊지 못하면 의미 없는 옥사였다니, 그 당시 다산의 비중을 잘 알게 해주는 역사의 대목입니다.

신자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죽음을 면한 다산은 유배지에서 학문적 대업(大業)을 성취하여 민족 최고의 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임금을 속일 수 없다면서 국청의 국문에서 끝까지 신자 아님을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36세에 천주교와 관계된 모든 문제를 상세히 올려바친 「변방사동부승지소」라는 상소에서 주장한 내용이 정조의 인가를 받았고, 신해사옥(진산사건) 이후로는 제사문제와 나라에서 강력히 금지하는 이유 때문에 “마침내 천주교와는 절연하였다(遂絶意)”라는 자신의 설명이외에 어떤 자료나 기록에서 다산이 신자였다는 사실은 찾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조선에 와본 적도 없으며, 오직 조선에서 보낸 불확실한 자료나 구전의 이야기만으로 저술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라는 외국인의 책에서 유배가 끝난 뒤에는 배교를 반성하고 철저한 신자가 되었다느니, 죽음에 임해 종부성사를 받았다는 등의 근거 없는 내용으로 다산이 천주교 신자였다는 천주교 측의 주장은 이제는 사실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번의 다산 묘소 십자가 파동에서 보여준 대로 명확한 근거 없는 어떤 내용도 이제는 세상에 돌아다니지 않게 해야 합니다.

500여 권이 넘는 방대한 다산의 저술은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주를 이루고, 경세학에 대한 연구는 모두 유교 경전의 연구결과로 얻어진 국가개혁 이론이자 정책의 방향입니다. 특히 다산이 살았던 그때의 천주교 신자는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없고 폐제를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산의 저서 중 상례(喪禮)나 제례(祭禮)에 대한 책이 수십 권인 점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다산이 신자였을 가능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있는 천주교측은 현재 남겨져 있는 그의 방대한 저서와 사료를 바탕으로 다산과 천주교 관계에 대한 좀더 정확하고 정리된 주장을 발표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