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와 ‘사의 찬미’
상태바
 ‘봉선화’와 ‘사의 찬미’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9.09.25 10: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대중 칼럼니스트
김대중 칼럼니스트

목포시는 지난 9월 20일 ‘목포문화재야행’ 페스티벌을 열었다. 이 행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개화기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야간 행사의 낭만을 담은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과 특히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마련한 독립운동 관련 콘텐츠도 있어 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이 참여했다. 필자도 가족과 함께 여러 콘텐츠 공간을 돌면서 시민들 속에서 진한 감동과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그런데 일제 수탈의 상징인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앞에서 열린 「사의 찬미」를 각색한 개막공연은 어쩐지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경동성당 앞마당에서 열린 ‘해설이 있는 음악회’에서 윤심덕과 김우진의 스토리 소개와 함께 가곡 「봉선화」와 「사의찬미」를 들으면서, 필자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이 떠올라 깊은 감흥에 젖게 되었다.

목포 출신 김우진은 일본에서 함께 유학하고 있던 홍난파, 윤심덕, 조명희, 홍해성, 방정환, 윤극영, 김형준, 채동선, 안익태 등 문화예술에 뛰어난 인재들과 예술단체를 만들고 교류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무단통치에 항거한 3.1운동으로 인해 하세가와 총독이 일본으로 송환되고 사이또 총독이 부임하였다. 사이또는 위장된 자치론과 지식인들의 변절을 유도하는 문화통치 계략으로 조선 지배전략을 전환하였다. 그리고 1920년 5월 조선총독부는 사이또 총독 취임 축하 공연을 경복궁 앞마당에서 열기로 하고, 홍난파 등 유명 문화예술인들을 초청하였다. 홍난파, 김형준, 김우진, 윤심덕 등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조선인의 처절한 삶을 담은 노래를 지어 공연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곡이 김형준 시에 홍난파가 작곡한 가곡 「봉선화」이다. 이 곡을 우리나라 최초의 성악가 소프라노 윤심덕이 불렀는데, 이 공연에서 조선인 참석자 다수가 눈물을 보여 총독부측을 당황하게 했으며, 홍난파가 윤심덕에게 이 곡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윤심덕이 부른 이 「봉선화」는 당시 경성 방송국을 통해 2차례 방송되었는데, 100일도 안되어 조선 국민의 애환을 달래는 유일한 곡으로 전 국민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윤심덕은 조선총독부 행사 참여 요청을 스스로 거부하여 큰 무대에는 서지 못하고 작은 공연에만 전전해야 했다.

김우진과 애인 관계로 여겨졌던 윤심덕은 1926년 일본에 가서 외국곡인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를 취입하고, 그해 8월 김우진과 함께 관부연락선을 타고 귀국 중 실종되었다. 당시 이 두 사람의 실종을 모든 언론은 사랑 때문에 바다에 투신해 동반 자살한 것으로 보도했지만 목격자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런데 윤심덕 실종 후 「사의 찬미」 음반이 10만 장이 발매되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행에 /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 눈물로 된 이 세상에 / 나 죽으면 고만일까 / 행복 찾는 인생들아 / 너 찾는 것 허무』

다분히 염세적이고 퇴폐적인 이 노래가 전 국민의 애창곡이 되었다.

이 후 「봉선화」는 1940년에 가수 김천애에 의해 녹음되고 무대에 발표되었지만, 반일사상을 드러내는 노래라 하여 일제에 의해 가창 금지되었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 네 형체가 없어져도 /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 화창스런 봄바람에 / 환생키를 바라노라』 라고 「봉선화」 3절은 노래한다. 

비록 겨울이 닥쳐와도 모진 눈바람에 형체없이 없어진다 할지라도 그 혼백만은 결코 죽지 않고 길이 남아서 찾아온 새봄에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다는 민족의 염원을 애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윤심덕이 부른 이 「봉선화」는 「사의 찬미」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는 1936년 독립운동 단체 흥사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모진 고문 끝에 친일로 전향하고, 사망하기까지 4년 동안 친일활동을 해서 친일파로 낙인되었다. 윤심덕도 퇴폐적인 곡 「사의 찬미」를 마지막으로 사망하게 되어 매우 안타깝고 슬픈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윤심덕이 「사의 찬미」를 부른 가수가 아니라 「봉선화」를 부른 가수로 생을 마감했더라면 지금의 평가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리고 김우진의 평가도 민족독립의 편에 있었던 아버지 김성규와 함께 마찬가지일 것이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실종으로 퇴폐적인 「사의 찬미」가 조선 국민 애창곡이 되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일제의 문화통치에는 큰 성과였다고 생각한다. 홍난파가 예견했던 것처럼 윤심덕, 김우진이 관부연락선에서 일제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