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광장-김경완 시민기자] 인재의 섬 신안 도초도 교육 산증인 고석만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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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광장-김경완 시민기자] 인재의 섬 신안 도초도 교육 산증인 고석만 스승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0.05.1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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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그대로인데 인재는 간 데 없더라..."


[목포시민신문=김경완 시민전문기자] 육지에서 섬으로 유학 가는 고등학교. 신안군 도초고의 명실상부한 위상을 보여주는 말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개학과 등교가 늦어지는 상황에도 도초고는 새로운 활력이 넘쳐나고 있었다. 지난 3월 김장홍 교장이 부임하면서, ‘민주시민교육을 통해 삶과 역량이 함께 이루어지는 교육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김교장이 도초도 출신이라 기대도 크다.

고석만(좌), 김익수 전 도초면장은 한마을 친구로 막역지우다

428일 김교장은 가장 오래되고 큰 마을인 고란리에서 도초중학교 재학시절의 고석만(82) 선생님을 만났다. 그의 삶을 통해 인재의 섬 도초의 교육을 돌아보았다.

도초고 교장의 스승, 고석만

고석만은 1939년 도초도 고란리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수항리에 있는 도초중앙국민학교에 다녔는데, 3학년 때 부모님께 졸라 목포로 유학 갔다. 당시 작은아버지가 유달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어 함께 관사에 살았다. 그 후 목포제2중학교(목포유달중학교의 전신)와 목포공고를 졸업했다. 이 학교들은 당시 목포역 맞은편 한국은행과 목포세무서 인근에 인접해 있었다.

도초도의 중등교육은 19534월 개교한 도초고등공민학교가 시작이었다. 문맹퇴치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때라 학생들은 대부분 성인이었다. 1956년 무안군(신안군의 전신)교육청 관내에만 3,175명의 미취학 아동이 있을 정도였으니 짐작이 된다. 수항리에 문을 연 공민학교는 1957년 현 도초고등학교 자리로 옮겼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 섬 주민들이 도초방조제를 직접 조성해 그 안에 염전과 학교부지를 만들어 기부했기 때문이다. 고석만도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섬에 오면 아버지 대신 그 방조제공사 현장에 나가 직접 돌을 나르기도 했다.

고등공민학교 교사로 출발

고석만은 1958년 졸업했지만 가난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대신 곧바로 고향의 공민학교 교사가 됐다. 신설된 학교라 어려운 점들이 많았지만, 결국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내고 학교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고등공민학교부터 교사를 했어. 군대 갔다 65년 제대하고 시온중학교라고 시온재단에서 설립한 학교로 갔지. 나중에 도초중학교에도 있었고. 그때 선생들은 월급을 줘도 좋고 안줘도 좋고.. 학생들하고 지내는 것만 즐거워했지. 너무나 물정을 몰랐어.”(고석만)

교사들의 처우는 열악했다. 특히 외지에서 온 교사들은 더 막막한 삶을 살았다. 실제 1967년 한 해 동안 무안군교육청에서 사퇴한 교사가 89명이었다. 이중 55%가 섬에 부임된 교사들이었고, 사퇴원인은 임지에 대한 불만이 75%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고석만이 고향을 지키고 지역 인재들을 키웠던 것은 더욱 의미가 컸다.

고등공민학교는 1964년 도초중학교(사립)로 통합되었다. 1969년 무안군에서 신안군이 분군된 해 가을 고석만은 시온중을 떠나 도초중학교로 옮겨갔다. 도초중학교는 19771월 공립으로 전환됐고, 이때까지 13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해 2월 고석만은 14년간의 교사생활을 접고 학교를 떠났다.

다음해인 19783월 도초고등학교가 개교했고, 1999년에는 도초중·고등학교가 통합되었다. 이후, 20173월 도초중이 폐교되고, 인근 비금중학교와 통합되었다. 반대로 비금고는 도초고로 통합되면서 폐교되었다. 두 섬이 각각 하나씩 주고받은 셈이다.

염전의 이익으로 미래인재 키워

도초도 고란리를 대표하는 문화재, 고란석장승의 모습이 해학적이다.

문제는 주민들이 도초중학교에 기부한 염전과 땅의 가치가 수십억이 넘게 평가된다는 점이다. 주민들은 자식교육에 써달라고 재산을 기부했는데, 폐교로 기부 목적이 사라지는 만큼 교육청은 기부재산을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이런 요구를 한 단체가 도초중학교지킴이였고, 고석만이 회장을 맡았다.

주민들이 울력으로 원을 막았지. 그렇게 고생해서 염전을 만들고 학교에 기부했는디... 중학교가 비금으로 가부렀잖아. 그래서 염전 환원투쟁을 할라고 했는디... 못해 부렀제. (그것 때문에) 아들한테 지천(꾸중) 듣고... 그래도 (교육청에) 그냥 줄 수가 없다고... 이제 (우리들이 고생한 것이) 역사 속으로 묻혀 부렀어.”(고석만)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깝지만 법적으로 패소하면서 끝난 사건이 되었다. 주민들이 기부된 땅은 현재 도초고가 공유재산으로 관리하며 장학금과 학교발전기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역의 교육자이자 어른으로서 고석만은 그것으로 만족한다. 여전히 농사에 전념하며 가끔 찾아오는 제자들을 만나 옛일을 추억하는 것으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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