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 30]조선 불교의 쇠퇴와 삼교합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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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 30]조선 불교의 쇠퇴와 삼교합일론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10.17 19:35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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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억불숭유책에 따라 불교 은둔 도피하며 쇠퇴
원천석의 삼교일리론, 휴정의 삼교통합론 등 출현 유·불·도 삼교 조화 노력

[목포시민신문] 유교불교도교의 세 종교 사상은 모두 외래 종교 사상이면서 한국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일찍이 우리나라에 토착화되었다. 이들 세 종교 사상은 상당한 갈등 관계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삼교회통(三敎會通)과 삼교협력(三敎協力)을 이루었으며, 또한 삼교합일론(三敎合一論)이 대두되었다. 특히 대부분의 한국 신종교(新宗敎)에서는 삼교(三敎)를 융섭(融攝) 활용하는 사상적 특징이 발견된다.

유교지상주의의 사회에서 불교가 위축할 수밖에 없는 것은 물론이다. 태조는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의 증가를 방지하고 사원의 남설을 금했다. , 기존의 불교 세력은 승인하되 그 이상의 확대를 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가혹한 탄압을 가하여 전국에 242()만을 남겨 두고 그 이외의 사원을 폐지하였으며, 동시에 거기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를 관()에 몰수하였다. 이것은 불교계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큰 타격을 가한 것이었다.

태종의 강압 이래로 기를 펴지 못하던 불교는 세종과 세조의 개인적 신앙을 얻게 되었다. 세종은 유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궁내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기도 하였다. 또 세조는 원각사(탑골공원)를 지었고, 간경도감을 두어 불경의 언해를 간행하였다. 이러한 결과 불교는 다시 활기를 띠어 사찰의 재흥과 승려의 증가도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성종은 또다시 강력한 억제책을 써서 도첩제를 전폐하고 출가(出家)를 일절 금하였으며, 더욱이 중종은 승과(僧科)마저 폐지하였다. 이것은 불교와 국가와의 공적인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명종 때에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명승(名僧) 보우(普雨)를 중용하여 불교를 장려하였으므로 불교계는 일시 생기를 띠게 되었다. 이때 봉은사를 선종의 본산, 봉선사를 교종의 본산으로 삼아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두고, 이어 승과를 다시 설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죽음으로써 불교는 다시 탄압을 받아 주로 부녀자의 신앙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왕조 초기 불교억제책의 시행으로 종래의 불교 사원의 세력 기반과 불교의 교세가 크게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한 연구 또한 쇠미하게 되었다.

자초(自超溪月軒 無學)과 기화(己和涵虛 得通) 등 명승이 있었으나, 특히 후자에 있어서는 유학자의 배불론에 대하여 불교가 유교의 교리와 배치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도덕적 이상의 실현에 있어서 유·불은 서로 일치되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하게 되었다.

승과 제도의 폐지는 승려에 대한 국가적인 관심과 보장을 전적으로 거부한 것을 의미하며, 일반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저락하게 마련이었다. 불교는 위신을 잃고 승려는 흔히 요역에 징발되는 수가 많아서 특히 하급 승려는 사회에서 천시하게까지 되었다. 한편 양반 사류(士類)들은 승도(僧徒)를 학대하고 사찰을 분략(焚掠)하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유학자의 학대의 그늘에서 승려가 유불합일론(儒佛合一論)을 내세우게 되었으며, 그것이 다시 확대되어 유··도 삼교의 합일론이 대두된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 휴정·사명대사 유정과 같은 승려가 승군을 조직하여 항전함으로써 공훈을 세워서 승도들의 위신을 일시 높인 것도 사실이었으나, 휴정은 유··도 삼교가 그 교의의 궁극적 목표는 서로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불교는 신라와 고려 일천여 년을 통하여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인심(人心)을 장악하고 지도하였던 만큼 그 근저도 깊고 세력도 커서 마땅히 그 저항도 크고 반향도 컸을 것으로 상상되나, 고려 말의 불교는 자체 내의 부패와 타락이 심하여 비록 외부의 압력을 빌지 않고서라도 마치 냉시사회(冷屍死灰)와 같이 하등의 생기와 반발력을 가지지 못하였으며, 또 조선 초의 불교계에는 학덕이 있고 명망이 있는 명승 고납(高衲)이 마치 없는 것 같아서 일언반구의 저항운동도 일으키지 못하고 오직 굴종퇴둔(屈從退遁)의 길을 취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저 무학(無學)과 같은 법승도 쓸데없이 풍수설의 이용을 받아 한갓 태조의 우롱을 당하였을 뿐이고, 법문의 대수난에 대하여는 하등의 보효(報效)를 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유도 삼교는 일찍부터 합일론과 조화론이 크게 대두되었다. 고구려 말 연개소문은 왕에게 당나라에서 도교의 수입을 건의하면서 삼교는 비유하자면 정족(鼎足)과 같으므로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함께 번성하나 도교는 아직 성하지 못하니 천하의 도술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신을 당에 보내어 도교를 구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하소서라고 한 것에서도 삼교합일의 조화사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신라말 최치원이 난랑비서문에서 풍류도(風流道)에 대해 밝힌 바와 같이, 도 이전의 우리 고유의 ()사상속에 삼교의 종지가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민족에게는 삼교(三敎)를 융합 일치시켜 보려는 사상이 자연스럽게 대두된 것 같다.

삼교합일론은 원천석의 삼교일리론, 함허 기화의 현정론에 나타나는 삼교일치사상, 서산 휴정의 삼가귀감에 나타나는 삼교동근(三敎同根)과 삼교일치사상, 무경 자수의 삼교화융 등을 들 수 있다.

검여(劍如) 유희강 선생의 대부귀(大富貴)ㅡ큰 재물과 높은 지위.

이후 수운(水雲최제우)의 동학(東學) 이래 우리나라에서 창립된 대부분의 신종교 사상 속에는 삼교합일은 물론 우리의 민속무속 그리고 서양 종교인 기독교의 사상까지 융섭 활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제우는 유도는 이미 죽은 종교요 선천(先天)의 종교라 진단하고, 자기의 천도(天道)는 원래 유()도 아니요, ()도 아니며, ()도 아닌, 선 삼합(三合)이라 하였다.

증산(甑山강일순) 역시 유선을 낡은 종교, 선천의 종교로 보면서도 삼교의 진액(眞液)을 거두어 모으고 정수를 뽑아 통일신단(統一神團)을 형성, 후천선경(後天仙境)을 건설한다고 하였다.

소태산대종사는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우주만유의 근원으로 보고 유가에서는 이를 일러 태극 또는 무극이라 하고, 선가에서는 이를 일러 자연 또는 도라 하고, 불가에서는 이를 일러 청정법신불이라 했으나, 원리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일원(一圓)의 진리라고 하였다.
한편 유학자 사이에 있어서도 혹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자가 없지는 않았다. 유학자였던 김시습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했을 때, 유서(儒書)를 버리고 승려가 되어 한동안 방랑 생활을 했으나, 한때 세조의 불경번역사업을 돕기도 하여, ·불 양교에 이해가 깊었던 것이다. 유명한 유학자인 이이도 한때 사원에 들어가 선학을 익힌 일이 있어 불교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에서의 도교와 유교는 불교에 대한 갈등 속에서도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도교는 불교를 받아들여 더욱 심오한 교리와 사상을 형성했고, 신유학(新儒學)은 선진유학(先秦儒學)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리기론과 심성론을 발전시켜 형이상학적 면모를 갖추는데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교가 회통하여 조화를 이루기도 하며 서로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고려 말에 성리학이 유입되면서부터 배불론(排佛論)이 대두되었고, 조선 왕조에서의 억불숭유책(抑佛崇儒策)에 따라 배척과 억압 속에 불교는 산간 벽처에 은둔(隱遁) 도피(逃避)하여 쇠퇴의 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원천석의 삼교일리론(三敎一理論), 기화의 유석질의론, 휴정의 삼가귀감과 삼교통합론, 무경자수(無竟子秀)의 삼교설 등이 출현하여 유··도 삼교를 조화시키고자 하였으나 쇠퇴의 교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다. 한마디로 한국 불교사상에 있어서 조선 시대는 불교의 수난시대이며 쇠퇴시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31번째 이야기로, '조선 후기 유학의 개관'이 연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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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10-18 09:18:35
숭배]에서, 한국 고조선의 기자조선으로 始原유교유입, 기자조선(始原유교) 마지막왕 기준의 후손이 삼한건설, 삼한(始原유교)의 영토에서 백제(마한).가야(변한).신라(진한)가 성립됨.@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

윤진한 2021-10-18 09:18:02
서씨,한씨사용,三韓유교祭天의식. 국사에서 고려는 치국의道유교,수신의道불교.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http://blog.daum.net/macmaca/3057

@무속은 은.주시대 始原유교의 하늘숭배,산천숭배,조상숭배, 주역(점)등에서 파생된 유교의 지류.

역사적 순서로 보면 황하문명에서 은.주시대의 시원유교[始原유교:공자님 이전 하느님(天)과 여러 神明을 숭배

윤진한 2021-10-18 09:17:07
니다. 유교는 하느님(天), 五帝, 地神, 山川神, 부엌신(火관련)숭배등 수천년 다신교 전통이 있어왔습니다.

@한국은 세계사의 정설로,한나라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국으로 수천년 이어진 나라임.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외래종교 형태로 단순 포교되어, 줄곧 정규교육기관도 없이, 주변부 일부 신앙으로 이어지며 유교 밑에서 도교.불교가 혼합되어 이어짐. 단군신화는 고려 후기 중 일연이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인 삼국사기(유교사관)를 모방하여, 개인적으로 불교설화 형식으로 창작한 야사라는게 정설입니다.

유교,공자.은,주시대始原유교때 하느님.조상신숭배.세계사로보면 한나라때 공자님도제사,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성립,수천년전승.한국은殷후손 기자조선 기준왕의

윤진한 2021-10-18 09:16:28
@일부 지역에서 굿이나 푸닥거리라는 명칭으로 신령숭배 전통이 나타나도, 이를 무속신앙이라 하지는 마십시오. 불교라고도 하지 마십시오. 유교 경전 논어 팔일(八佾)에서는 공자님이전부터 섬겨온 아랫목 신(안방신), 부엌신등을 섬기는 전통도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통적인 신명 섬기기에 대해서, 공자님도 오래된 관습으로, 논어 "향당(鄕黨)"편에서, 관습을 존중하는 예를 표하셨습니다. 신명(神明:천지의 신령)모시기 전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상을 섬기는 제사는 유교가 공식적이고, 유교 경전에 그 절차와 예법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유교경전 예기에는 상고시대 조상신의 위치에서 그 혼이 하늘로 승천하시어 인간을 창조하신 최고신이신 하느님[天(하느님, 하늘(하느님)]하위신의 형태로 계절을 주관하시는 五帝가 계십니

윤진한 2021-10-18 09:15:42
한나라때 동아시아 세계종교로 성립된 공자님의 유교가 있기전에는, 은나라 왕족 후손 기자조선 기자가 들여온 시원(始原)유교가 있었음. 그 이전에는 종교라고 할수 있는게 없었음. 외래종교라면, 고구려 소수림왕때 단순 소개된 인도발 불교가 외래종교에 해당될것. @동아시아는 수천년 유교사회입니다. 공자님 이전의 始原유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 이전의 구약성서 시대에 해당됩니다. 하느님(天).神明,조상신 숭배가 유교의 큰 뿌리입니다. 유교는 국교로, 주변부 사상으로는 도가나, 음양가, 묵가사상등이 형성되었고, 법가사상은 이와는 다른 현실적인 사상이며,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방법이었습니다(진나라때 강성하고, 유교나 도교와 달리, 한나라때 율령이 반포되어 이후 동아시아에 유교와 별도의 성격으로 국가통치에 활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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