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후 목포 노인복지·유달산 녹화·청소년 건강에 여생 바쳐
아내 김사라와 목포 교회 설립 주도…의술‧신앙으로 사랑 실천
■역사에세이스트 배종덕 작가의 ‘항도의 닻별들’
목포시민신문은 목포항 개항 130주년을 앞두고 역사에세이스트 배종덕 작가의 기획연재 ‘항도의 닻별들’을 연중 게재한다. ‘닻별’은 밤바다에서 항해의 방향을 알려주는 별처럼 목포의 미래를 비추는 인물을 뜻한다. 이번 연재는 언론·정치·의료·영화·문학·미술·산업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 목포 인물 12명의 삶과 업적을 총 3부로 나눠 조명한다.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 시대적 한계와 도전, 좌절과 성취를 살피며 개방성과 창조성, 문화예술성으로 이어진 ‘목포정신’의 뿌리를 찾아간다. 목포 출신인 배 작가는 목포중.고등학교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하고 MBC PD와 제일기획(삼성그룹) 기획국장 등을 지냈으며, 저서 『나는 일하고 싶다』와 『매향노라 불러온 사람』을 펴냈다. 본지에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을 35회 연재한 그는 이번 연재를 통해 잘못 알려진 기록을 바로잡고 잊힌 인물들의 삶을 오늘의 시민과 미래 세대에게 전할 예정이다.<편집자주>
<글 게재 순서>
■제1부 시대의 길을 연 사람들
❶김철진(1900~1971)
❷차남수(1903~1990)
①고별 인사와 유년기
②의사로 첫발
③목포 의료 파수꾼
④남수의 마지막
❸이남규(1901~1976)
❹최병우(1924~1958)
■제2부 문화의 항로를 연 사람들
■제3부 생활과 문명을 바꾼 사람들
제2차 공공의료 활동(1960~1967)
1960년, 장남 우균이 “차남수 외과의원”의 원장으로 취임했다. 차제에 남수는 아쉽게 중도에 그만두었던 공공의료의 길로 다시 들어서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한센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설립된 소록도의 나병원 원장으로 새롭게 출발한다.
이 당시 소록도의 나병원에는 약 6천여명의 나환자가 있었다. 한센병은 남수의 전공 진료 과목인 외과 하고는 동떨어진 피부과 진료 과목이었다. 그럼에도 남수가 소록도의 나병원을 선택하게 된 동기는 규슈대학 의학부 교수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김진수, 목포복음교회 40년사, p.84) 남수가 원장으로 부임할 당시 소록도 나병원은 정부의 관리 아래 있었다. 관리자들인 공무원과 환자들 간에는 종교적인 갈등을 비롯해 많은 문제들이 상존했다. 원장에 취임한 남수는 밝고 명랑한 병원이 되기 위해서는 병원 운영을 환자들이 스스로 운영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환자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주선했다. 운영위원회가 구성되자 자신은 가급적 전면에 나서지 않은채 오직 그리스도인의 자세로 병원을 이끄는데 주력했다. 얼마후, 남수의 병원 운영방식에 감동한 정부가 새로운 제안을 제시했다.
말썽 많은 부산의 동래재활원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정부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치지 못한 남수는 짧은 소록도 나병원 원장직을 사임한다. 곧바로 상이군인과 지체부자유인들이 수용되어 있는 동래재활원의 원장으로 부임한다. 원장에 취임한 남수는 소록도 병원장의 경험을 살려 매사를 사랑과 기도로 대처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 더 온 정성을 다해서 재활원을 운영해 나갔다. 말썽이 끊이지 않던 재활원이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직원들과 환자들 모두가 남수의 운영방식에 공감한 결과였다. 누군가 세월을 시위를 떠난 화살 같다고 했다. 남수의 제2차공공의료 활동도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7년이라는 세월이 화살이 되어 흘렀다.
목포인 차남수
1967년, 남수는 7년간의 제2차 공공의료 활동을 마치고 꿈에도 잊지 못할 사랑하는 고향 목포로 귀향한다. 차남수 외과의원은 장남 우균(후에 종석으로 개명)이 잘 운영하고 있었다. 환갑이 지난 남수는 이제 남은 여생을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고향 목포를 위한 일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목포로 돌아온 남수는 노인복지를 위한 일, 유달산 녹화 사업, 청소년 건강을 위한 일에 전념하기로 목표를 세웠다. 귀향 1년째가 되는 1968년에는 첫 번째 목표로 세웠던 노인들의 생명과 인격의 존엄성을 높이는 활동을 위해 목포시 노인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두 번째 목표로 세운 유달산 녹화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시민들을 상대로 홍보활동 전개와 나무심기 운동을 실시하였다. 이 당시의 심정을 그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유달산도, 삼학도도, 밤마다 시름시름 앓으며 흘러온 영산강도, 이제는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는, 그리하여 목포가 명실상부한 서남해안 지대의 주역으로 떳떳이 자임할 수 있는 그런 날을 보게 된다면 여한이 없을 것이다.”
남수의 활동과 글을 눈여겨보면 남수는 단순한 애향주의자가 아니라 당시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노인들의 복지문제와 환경문제를 머지 않은 장래에 도래할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개선에 앞장선 선견자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남수가 노인 문제와 환경 문제 못지 않게 관심을 보인 문제가 세번째 목표로 설정한 청소년 건강 분야였다.
남수는 청소년들의 건강을 보살피기 위해 목포중학교를 비롯한 목포 시내의 각급 학교의 교의를 자청했다. 교의사가 된 후에는 정기적으로 학교들을 순방하면서 청소년들의 위생과 보건 문제의 상담을 포함한 건강 전분야를 보살폈다. 물론 무보수의 봉사였다. 남수의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높이 산 목포시는 1980년 남수에게 시민의 상(사회, 문화 부문)을 수여했다.
그리스도인 차남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사도행전 1장 8절 -
목포복음교회 원로 장로 차남수. 그리스도인 차남수의 교회에서의 마지막 직분이다. 남수가 언제 기독교인이 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이나 증언을 들을 수 없다. 굳이 시기를 추정한다면 아 내 김사라와 결혼한 1925년경이 아닐까 한다. 일본 유학 시절에 접한 YMCA 활동을 통해서 피상적으로나마 기독교를 접하긴 했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의 길에 들어선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아내 김사라와의 결혼 이후부터라 하겠다. 기독교인이 된 이후 남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사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교회설립에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남수와 사라 부부는 교회 세 곳(혹은 네 곳)을 설립하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 목포 남부교회(1946년 3월), 목포제일교회(1953년), 그리고 목포복음교회(1955년 9월)가 남수와 사라 부부가 주도해서 설립된 교회들이다. 이상의 교회들은 목포지역에서 역사나 교세 면에서 타 교회들에 전혀 뒤지지 않는 괄목할만한 교회로 성장했다. 이 부부는 어떻게 이러한 교회들을 설립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한곳이 아닌 세 곳씩이나. 각각의 사연과 배경이 있겠지만 쉽게 말한다면 아내 사라는 앞에서 끌고 남수는 뒤에서 밀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사는 빼놓을 수 없는 가장 큰 힘이었다.
여기서 목포제일교회와 목포복음교회의 설립 배경과 과정에 대해 알아보자. 까마득한 72년 전의 일이다. 1953년 한국교계는 교리 문제로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했다. 그 여파가 한반도 남단의 목포에까지 미쳤다.
남부교회의 집사로 재직하던 남수, 사라 부부는 남부 교회가 기독교 장로회 편에 서자 이에 반대하고 남부 교회를 떠난다.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몇몇 교인과 함께 제일교회를 설립한
다. 그러나 제일교회는 아직 정식 예배당이 없는 상태였다. 이에 남수 부부는 해군 통신대에서 사용하고 있던 무안동 소재의적산 가옥 니시혼간지(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사용하던사찰 건물)를 예배당 건물로 지목하고 소유권자인 국가로부터 불하 받기 위해 준비에 착수한다. 하여, 국회 국방위원장 김상돈 의원(김사라의 형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얼마후, 김상돈(김상돈(1901.6.9. ~ 1986.4.30. 제1,3,4,5대 국회의원, 제11대 서울특별시장) 위원장의 영향력이 작용되었는지 불하가 성사가 되었다.
제일교회 예배당이 생긴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사찰이었던 건물이 예배당으로 변모했다. 예배당이 생기자 제일교회의 신도수는 급격하게 늘어났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교장로회측의 중심 교회로까지 성장한다. 교회가 자리 잡고 3년이 지난 1956년 3월 5일, 남수는 제일교회의 초대장로로 피택된다.
장로로 피택된 남수는 성직자 못지 않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였으며, 아내 김사라의 신앙의 동지이자 조력자로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이상이 남수, 사라 부부가 제일교회를 설립하게 된 배경과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목포복음교회 설립에 관한 배경과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제일교회를 제 몸처럼 아끼며 섬기던 남수, 사라 부부에게 약간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난다. 신앙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던 아내 김사라 집사가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몇몇 뜻이 맞는 신도들과 함께 새로운 교회 설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남수는 반신반의 했지만 아내 김사라의 의지는 확고부동했다.
이로 인해서 부부는 잠시 남수는 제일교회, 김사라는 준비 중에 있는 새로운 교회, 각각 따로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기이한 현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남수는 아내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원 내의 안집을 개조해서 예배처소로 사용토록 한다. 이때가 1955년 9월 20일이었다. 비로소 부부가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며 이때 드린 예배가 부부가 주도해서 세번째로 설립한 목포복음교회의 시작이다.
이후 남교동(107-2번지)에 본당을 신축하고 예배를 드리기까지 지면에 상세하게 기록할 수 없을 만큼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참 후의 일이다. 1964년 1월 18일, 김사라는 권사에 취임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른 12년 후인 1976년 7월 18일에는 남수가 목포복음교회 원로장로로 추대된다. 남수가 그리스도인이 된지 51년만의 일이며 목포제일교회에서 처음 장로로 피택된지 20년만의 일이다.(1956년 3월 15일 피택 받음) 진정한 악시오스(부르심에 합당한 –에베소서 4장 1절) 맨 남수의 이때 나이는 7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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