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제대로 알자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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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 <48>
  • 정거배
  • 승인 2016.02.1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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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중국 현대사 중심에 섰던 3명의 여인들, 돈을 사랑하고, 권력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다
▲ 왼쪽부터 장제스의 부인이 된 쑹메이링, 훗날 사람들은 쑹메이링이 권력을 사랑했다고 평가했다. 부자 쿵샹시와 결혼한 큰딸 쑹아이링은 돈을 사랑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쑨원과 결혼한 쑹칭링은 조국을 사랑한 이로 평가되고 있다. 이들 세 자매는 20세기 초반 격동의 중국대륙에서 각자 다른 길을 걸었다. 지금의 신중국 탄생에 기여를 한 사람은 쑨원의 부인 쑹칭링이었다.

1997년 개봉됐던 중국영화 송가황조(宋家皇朝)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주 오래 전 중국에는 세 자매가 있었다. 한 사람은 돈을 사랑했고, 한 사람은 권력을 사랑했고, 한 사람은 조국을 사랑했다.” 돈을 사랑했던 여인은 쑹자수(宋嘉樹, 찰리송)의 큰딸 쑹아이링(宋?齡)으로, 20세기 초 금융업을 통해 중국 부자가 된 쿵샹시(孔祥熙)와 결혼했다. 쿵샹시는 처음에는 쑨원(孫文)을 도와줬고, 쑨원이 1925년 죽자 후계자 장제스를 금전적으로 도왔다. 그래서 1911년 신해혁명으로 탄생한 중화민국 초기 상무장관과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까지 맡았었다. 부패혐의자로 몰리기도 했지만 끝까지 장제스를 돕다가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쫓겨나자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

송가황조 영화자막에서 ‘권력을 사랑했다’고 하는 여인은 바로 장제스의 부인이 된 쑹메이링(宋美齡)을 말한다. 쑹메이링도 원래 미국 유학시절 약혼자 류지원이 있었으나 중국으로 돌아와 부인이 있던 장제스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게 된다.

‘조국을 사랑한 여인’은 쑹칭링(宋慶齡)으로, 아버지가 후원했던 친구이자 동지로 자신보다 27살이나 많은 쑨원과 결혼했다. 쑹칭링은 남편 쑨원이 1925년 4월 54세로 세상을 떠난 뒤 동생 쑹메이링이 장제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쑹칭링은 정치적인 입장 차로 장제스와는 늘 대립했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을 위해 많은 역할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959년부터 1975년까지 제3대 부주석을 역임했다. 1981년 노환으로 베이징에서 세상을 뜨기 직전에는 명예주석에 추대되기도 했다.

거부 쑹자수는 쑨원의 후원자

쑹씨 세 자매의 아버지 쑹자수는 1864년 대륙 남쪽 하이난도(海南島)에서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원래 한(韓)씨였으나 친척 집안 양자로 들어가면서 쑹(宋)씨로 바꿨다. 어린 시절 양아버지를 따라 미국 보스턴으로 건너가 장사를 했다. 당시 미국에는 청 정부에서 파견한 같은 또래의 국비 유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은 보고 자신도 다른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우연히 만나게 된 미국인 배 선장과 인연으로 기독교 신자가 됐다. 교회에서 후원해 준 덕분에 신학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 찰리 쑹이라는 세례명도 받았다.

1986년 미국 성서공회는 쑹자수를 중국 선교사로 상하이에 파견했다. 쑹자수는 미국 감리교 교단이 중국에 파견한 최초의 중국인 선교사였다. 1892년 쑹자수 선교사는 상하이에서 쑨원을 만나게 된다. 자주 만나게 되면서 쑨원이 주창하는 혁명사상에 심취하게 됐다. 쑹자수는 사업에도 수완이 좋아 인쇄소를 운영하며 중국어판 성경을 발행했다. 출판 사업이 번성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밀가루 공장도 운영하고 미국산 기계대리점까지 하면서 부자가 됐다.

거부 쑹자수는 선교사 일은 집어 치우다가시피 하고 친구이자 동지인 쑨원의 돈줄 역할을 부지런히 했다. 부자 쑹자수는 또 3남 3녀 모두를 어려서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큰딸 쑹아이링은 나중에 은행가 쿵샹시를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잠깐 쑨원의 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

둘째 딸 쑹칭링은 14살 때 미국으로 유학 갔는데, 6년 만인 1913년 8월 귀국하기 위해 아버지 쑹자수가 머물고 있던 일본을 들리게 된다. 쑹자수가 일본에 와 있었던 것은 2년 전 신해혁명을 주도한 쑨원이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딸 칭링을 데리고 쑨원한테 갔다. 아버지의 친구인 혁명가 쑨원은 칭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인을 중국에 두고 있으면서 일본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쑨원에게는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그 뒤 중국으로 돌아왔지만 일본에 있던 쑨원은 칭링에게 영문 담당 비서를 부탁했다. 아버지 쑹자수는 딸 칭링을 일본으로 보냈다. 무려 27살이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열애에 빠졌다.

쑹칭링, 27세 연상 쑨원과 결혼

1915년 6월 아버지의 친구이자 동지인 혁명가 쑨원의 나이 49세, 쑹칭링은 22세였다.
쑹칭링은 부모의 동의를 얻기 위해 상하이로 왔다. 귀국한 딸의 말을 듣는 순간 쑹자수 부부를 기절할 판이었다. 엄마는 “결혼까지 하고 첩도 있는 늙은 놈하고 절대로 안된다”며 대노했다. 아버지 쑹자수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을 위해 쑨원에게 돈을 갖다 바친 것도 몇 년 인데, 어린 딸에 눈독을 드렸다며 분노했다. 쑹자수 부부는 딸이 일본 쑨원한테 다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골방에 감금시켰다.       

시간이 흘렀다. 쑨원은 마카오에 있는 부인 루무전을 일본으로 불러 이혼절차를 끝냈다. 주위에서 반대하자 쑨원은 “쑹칭링과 결혼만 할 수 있다면 다음날 새벽에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다. 나는 당신들과 천하대사를 의논했지 사사로운 가정문제는 의논하고 싶지 않다.“  상하이 집에서 골방에 갇혀있던 쑹칭링은 1915년 10월 하녀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해 일본으로 돌아왔다.

변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쑨원과 쑹칭링은 결혼서약을 하고 조촐한 약식 결혼식을 치렀다. 쑨원의 후원자 아버지 쑹자수는 동경으로 입에 거품을 물고 쫓아왔지만 이미 쌀이 밥이 되어버린 뒤였다. 혁명의 동지이자 후원자였던 쑹자수와 쑨원은 절교했다. 아버지 쑹자수는 칭링과 쑨원이 결혼하고 3년 뒤인 1918년 5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쑨원은 중국으로 돌아와 혁명운동을 주도하면서 5·4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중국국민당을 결성하게 된다. 그는 1924년 국민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 간 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 그러나 1925년 4월 간암으로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쑨원은 현재 중국과 타이완에서 혁명선구자이자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특히 당시 중국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던 조선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활동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나중에 한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쑨원 사후인 1927년 4월 장제스가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국공합작이 와해됐다. 쑹칭링과 장제스는 본격 대립하기 시작했다. 쑹칭링은 “쑨원의 국공합작을 파괴한 장본인”이라며 장제스를 비난했다.

1935년 10월 국민당의 추격을 받으며 50000여명에 불과한 마오쩌둥의 홍군은 기진맥진 한 채 산시성 북쪽 바오안에 도착했다. 2만 5,000리의 대장정에 홍군은 고사 직전이었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산시성 북쪽을 봉쇄했다. 장제스의 말대로 ‘비적들은 소탕하는 일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마오의 홍군은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포위망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오쩌둥은 중국인민들을 향해, 세계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자신과 동지들이 걸어 온 길을 역사에 남기고 싶었다. 홍군이 주창하는 항일 근거지와 통일전선 구축이라는 혁명의 목표를 외부에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1936년 초반 상하이 지하조직을 통해 쑹칭링에 “믿을 만한 외국기자와 외국인 의사 한명을 바오안을 방문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쑹칭링은 평소 친분이 있는 미국 기자 에드거 스노와 외과의사 조지 하템을 봉쇄된 산시성 홍군지역으로 보냈다, 그들은 장제스측에서 비적의 두목이라고 선전하던 마오쩌둥을 만났다. 또 간쑤성, 닝샤 일대를 방문해 홍군을 만나 취재했다.

그들은 그해 7월초부터 4개월 동안 머물면서 마오쩌둥과는 긴 시간 인터뷰를 했다. 1936년 10월 베이징으로 돌아온 스노는 미국 영사관 강당에서 서북기행을 발표한 날. 이곳에는 대학생 등이 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참석자들은 기자 스노가 16밀리 필름에 담아 온 마오쩌둥 등 비적들의 생생한 영상과 진면목을 보고 열광했다. 홍군을 비적으로 몰아 부치던 장제스의 국민당은 비상이 걸렸다. 전국 곳곳에서 내전을 중지하고 침략자 일본제국주의 대항해 항일전쟁을 하자는 시위와 여론이 들끓었다. 

쑹칭링, 마오의 홍군을 돕다 

2개월 뒤인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이 시안에 온 장제스를 감금하고 내전중지와 항일전쟁을 요구하는 시안사변이 발생했다. 마오쩌둥의 홍군은 기사회생했다. 그 뒤 스노 기자는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책을 출판해 전 세계에 마오가 이끄는 중국혁명이 성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암시했다.  쑹칭링은 1981년 5월 88세로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부주석과 명예주석 등 신중국에서 대우를 받았다.

쑹자수의 셋째 딸 쑹메이링은 미국 유학시절 오빠 소개로 알게 된 하버드 대학에 재학 중인 류지원과 약혼까지 했었다. 미국으로 유학 간지 10년 만에 귀국했다. 1922년 12월 오빠 쑹즈원 집에서 기독교 모임이 있었는데, 여기서 군인 장제스를 처음 만났다. 쑨원의 처제 쑹메이링은 26세로 장제스보다 14살이나 어렸다. 장제스는 쑨원에게 중매를 부탁했다. 5년이 흐른 뒤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이제 남은 것은 쑹의 엄마 니구이전이었다.

1927년 상하이 쿠데타로 생전의 쑨원이 실현시켰던 1차 국공합작을 무력화시킨 장제스는 그해 8월 들끓는 비난여론을 잠재우고 쑹메이링과의 결혼을 성사시킬 겸해서 난징정부의 총사령관 사퇴를 비롯 2선으로 후퇴한다. 본부인과 이혼절차를 마무리하고 상하이에 있는 또 다른 여자는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장제스와 결혼을 반대하던 쑹메이링의 어머니는 일본 나가사키에 가 있었다. 장제스는 일본으로 건너가 장차 장모가 될 사람을 만났다. 장제스는 쑹의 엄마 니구이전 앞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하고 결혼 승낙을 받았다. 

장제스가 쑹메이링에게 구애를 하는데 5년 이란 시간이 걸렸다. 1927년 12월 1일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상하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훗날 타이완으로 밀려난 장제스는 계엄령 등 철권통치를 하다가 1975년 4월 87세로 세상을 떴다. 쑹메이링은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뉴욕에서 2003년 10월 106세로 삶을 마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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