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제대로 알자<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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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53>
  • 정거배
  • 승인 2016.03.23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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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거 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중국언어와 문화학 전공>
▲ 상앙은 중국대륙 서북부에 있는 변방국가 진나라가 강성대국이 될 수 있도록 변법을 통해 나라의 분위기 뿐 만 아니라 제도와 법률을 바꿨다. 당시에는 반발도 많았지만 변법을 통해 진나라는 어지러운 춘추전국시대를 끝낼 수 있는 국력을 갖게 됐다. 변법을 추진한 상앙은 그러나 나중에는 반역죄로 몰려 처참하게 죽었다.

[목포시민신문]중국의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각 나라 간 패권 다툼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각 국에는 인재를 확보하는 일을 주력했다. 인재를 얻는 것이 천하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앙(BC390~338)은 원래 위(魏)나라 사람이었다. 중원에 자리 잡은 위나라는 전국시대 중반까지 진나라를 압도하는 강대국이었다. 그는 위나라의 재상 공숙좌라는 사람의 가신으로, 작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이 때 위나라 왕은 혜왕이었다. 공숙좌는 그동안 자신을 보필해 온 상앙이 시대를 바꿀 범상치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공숙좌가 늙고 병들어 죽게 됐을 때 위혜왕이 문병을 왔다. 왕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대의 병이 회복될 길이 없다면 장차 이 나라 사직을 어떻게 해야겠소?” 이때 병상에 누운 공숙좌는 정색을 하면서 왕에게 공손앙(상앙)을 추천하며 간언했다. “공손앙이 비록 나이는 적지만 특출한 재능을 가졌으니 이 나라의 큰일을 그에게 위임하시오.”

그러나 위혜왕은 죽음이 임박한 공숙좌가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하는 빈말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했다. 그러자 공숙좌는 주위 사람들을 밖으로 나가게 하고 위혜왕에게 귓속말로 재차 공손앙을 천거했다. “대왕께서 만약 공손앙을 기용하지 않으신다면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합니다. 공손앙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위혜왕의 결정적인 판단 착오

하지만 위혜왕은 임종을 앞둔 노인의 헛소리 정도로 취급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대목은 결국 위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사적 사건이 됐다.  위혜왕이 돌아가고 병상의 공숙좌는 공손앙을 불러 말했다. “오늘 대왕께서 재상이 될 만한 이를 추천해 달라고 하기에 너를 추천했다. 그러나 대왕은 거절했다. 그래서 너를 만약 천거하지 않으려면 죽여 버리라고 했다. 그러니 하루 속히 여기를 떠나거라.”
그러자 공손앙은 대답했다. “대왕께서는 당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나를 기용하지 않는데, 어떻게 당신의 말대로 나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중국 역사를 바꿀 공손앙은 결국은 도망하지 않았다. 위혜왕 역시 공손앙을 죽이지 않았다. 위혜왕은 나중에 궁궐로 돌아와 신하들에게 말하길 “공숙좌가 병이 위중하여 슬프구나! 과인으로 하여금 나라를 공손앙 같은 별 볼일 없는 이에게 맡겨야 한다고 천거하니, 어찌 제정신이겠는가!”

공손앙은 드디어 진나라 효공(BC 361~338 재위)이 전국에 포고령을 내려 인재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나라 국경을 넘어 진나라로 갔다. 진효공과 첫 면담에서 공손앙은 열변을 토했으나 효공은 졸고만 있었다. 삼황오제 시대의 '성인의 도'를 설파했으나 단기간에 강대국 반열에 올라가기를 원했던 효공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닷새 후에 2차 면담이 이루어졌는데, 그때 공손앙은 천자의 도를 말했지만 효공은 1차 면담 때와 마찬가지로 흥미가 없어 졸기만 할 뿐 이었다. 효공은 옛날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 일 뿐 이라며 실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공손앙은 자신을 기용하겠다는 귀뜸도 받지 못한 채 아무런 소득도 없이 2차 면담도 그렇게 끝났다. 3차 면담도 별 마찬가지였다.

상앙, 전쟁을 통해 전쟁을 없애자

그러나 공손앙은 포기하지 않고 우여곡절 끝에 4차 면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드디어 진효공과 공손앙은 몇날 며칠 간을 열정적인 대화를 하게 된다. 패자(覇者)의 도를 설파한 것이다.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史記)에는 효공과 공손앙 두 사람의 무릎이 점점 앞으로 다가가는 것도 서로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담론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전쟁을 없애는 길은 오로지 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역설하자 드디어 효공은 무릎을 치며 상앙(공손앙)의 주장에 탄복했다. 진효공은 그를 좌서장이라는 직책으로 기용했다. 

상앙은 두차례 변법을 통해 진나나를 강성대국으로 만들었다. 그의 사상과 신념이 녹아든 변법은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그는 백성이 법을 무시하는 이유는 기득권층이 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법을 어기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처벌했다. 심지어 태자가 법을 어기자 혹독하게 처벌했다. 이 태자가 나중에 효공의 뒤를 이어 즉위한 혜문왕이었다.

부임한 초기에 우선 상앙은 법에 대한 공신력을 제고차원에서 성읍 남문에 나무를 심어 놓고 이 나무를 옮기는 자에게 금 50근의 포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광고에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러자 포상금을 100근으로 올렸다. 어떤 사람이 반신반의하면서 나무를 옮기자 즉시 그에게 약속한 상을 내렸다. 이후에 다시 한번 같은 포고를 내리자 사람들이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기득권세력의 특혜를 폐지

그는 1차 변법에서 십오법(什伍法)을 제정했다. 열 집을 십(什)으로, 다섯집을 오(伍)라는 주민자치단위로 묶었다. 이렇게 조직한 이유는 범법을 했을 때 신고하지 않으면 연대책임이 주어지는 연좌제였다. 하지만 지금의 주민등록 작업이라고 보면 된다. 서로 돕고 상을 받아도 공동으로 받는 긍정적 기능도 있었다.
두 번째는 분가제를 시행해 한 집에 성인 남자가 두 사람 이상 있으면서 분가하지 않으면 세금을 두 배로 물렸다.

셋째는 전쟁에서 세운 공은 적의 머리수로 결정했다. 적의 목을 베서 자신의 공을 입증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머리를 운반하기 불편해 코를 베어서 갖고 가 전공을 입증했다.  네 번째는 백성들 간 개인적인 싸움을 금지시켰다. 진나라 사람들은 본래 성격이 거칠어 개인적인 일로 싸움을 많이 했다고 한다. 개인적인 대립과 갈등이 결국 국력을 약화시킨다고 판단한 것이다. 상앙은 일체의 이런 싸움질을 금지시키고 어길 경우 경중에 따라 엄한 형벌을 내렸다. 

다섯 번째 생산을 장려했는데,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베를 짰다. 곡식을 많이 수확하는 사람은 부역과 세금을 면제받았다. 반대로 떠돌아 다니면서 상업에 종사하는 자나 게을러서 가난한 자는 전부 체포해 관청의 노비로 삼았다. 여섯 번째 귀족들에게는 특권을 철폐했다. 귀족이라 할지라도 전쟁에서 공이 없으면 나라의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의 공이 없으면 높은 직위를 받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제도는 일반 백성들이나 병사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전장터에 나가 싸울 때 투쟁의지를 촉발시켰다.

상앙의 이같은 변법은 전 사회적으로 파장이 컸지만 수년 안에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우선 군대가 강해졌다. 전쟁터에 나간 군대마다 승리했다. 심지어 상앙은 진나라의 동쪽에 있는 자신의 고국 위나라를 치기 위해 직접 출병해 승리를 거뒀다. 서북 변방에 있던 진나라가 동진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진나라와 전쟁에서 지고 퇴각하던 위나라 혜왕은 자신이 공숙좌의 말대로 죽이지 않아 상앙이 국경을 넘어 진나라 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정권이 교체되자 반역자로 몰려

진나라는 이제 어지러운 천하를 통일할 수 강성대국이 됐다. 그렇지만 상앙은 자신의 후원자이자 지지자였던 진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처지가 달라졌다. 전부터 공손앙에게 증오를 품고 있던 태자, 혜문왕이 즉위했다. 혜문왕은 공손앙의 변법에 반대를 해 온 진나라의 주요 원로 보수 세력을 규합했다. 역모 혐의로 체포령이 떨어졌다. 도망자가 된 상앙은 일단 자신의 고국 위(魏)나라로 망명을 하기로 했다.

당시 진나라 국경이었던 함곡관을 밤에 몰래 넘으려고 했다. 그러나 "새벽 첫닭이 울 때까지", 즉 어두워질 때부터 날이 샐 때까지 관문을 여는 게 금지되어 있는 게 진나라의 법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날은 여관에 유숙하기로 했다. 그러나 여행증이 없는 사람은 유숙시킬 수 없다는 것도 진나라의 법이었기에 그는 거절당하고 만다. 여관 주인은 “상군(상앙)의 법에 따르면 여행증이 없는 자는 투숙시킬 수 없습니다. 법을 어기면 저희가 처벌받습니다.”라며 상앙의 투숙을 거절했다. 바로 상앙 자신이 만든 법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위나라로 갔지만 위나라 사람들은 전쟁에서 위나라 백성들은 그가 패배를 안겨준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몸을 피해 위나라와 전쟁에서 이겨 봉지로 받았던 상나라 땅으로 가서 군대를 모았다. 그러나 추격해 온 진나라 군대에 그는 사로잡혔다. 진나라 수도 함양(지금의 시안근처)으로 끌려가 자신의 만든 형벌, 사지가 찢겨지는 거열형에 처해진 다음 시체는 경계 목적으로 각 지방에 보내졌고 그의 삼족도 연좌로 몰살당했다. 그러나 상앙의 변법은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마친 뒤 117년이 지나, 진나라가 나머지 6국을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강성대국의 기반이 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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