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제대로 알자<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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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54>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6.03.29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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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210년, 진시황이 지방순시 도중 사망했다. 그러자 무능한 그의 아들 호혜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신하들은 2세 황제를 이용해 권력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싸웠다. 계속 이어진 폭정에 민심은 이탈했다.진시황 사후 1년 뒤인 BC 209년 진승과 오광이 주도해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진나라 왕조 타도의 깃발을 세운 진승은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어 BC206년 진나라는 유방과 항우군대에 의해 수도 함양이 함락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첫 통일제국 진나라 멸망원인은 ‘소통의 부재’
분서갱유 등 폭압정치, 백성봉기로 15년 만에 붕괴

정 거 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중국언어와 문화학 전공>

[목포시민신문]중국 역사상 춘추전국시대(BC770~BC221)는 백가쟁명이라는 사상부흥의 시기였다. 물론 세계사적으로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등이 모두 공자, 노자와 같은 시대 인물들이다.
하나라와 은나라에 이어 주나라 시대 중반까지는 제후국들을 거느리는 봉건시대가 유지됐다.
그러나 주나라 말기에는 분봉국인 제후국들이 주나라 왕실에 반기를 듦으로써, 군웅이 할거하는 춘추전국시대를 맞게 된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전국시대(BC403~BC221)를 끝냈다. 그래서 중국역사는 춘추전국시대를 진나라 통일이전의 시대라는 뜻에서 선진시대(先秦時代)라고 부른다.
진시황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여 전제주의적 중앙집권제를 실시한 최초의 황제이다. 그러나
강성대국 진(秦)나라가 15년도 채우지 못하고 멸망한 원인을 놓고 지금까지도 분석은 다양하다.

멸망 첫째 원인은 분서갱유 사건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멸망 원인 중의 하나는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이다.
진나라 몰락의 원인을 보기 위해서는 앞선 시대인 춘추전국시대, 당대 상황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전쟁이 빈발했던 전국시대는 역설적으로 사상과 문화적인 면에서 황금기였다. 각종 사상과 학설이 쏟아져 나왔다. 유가를 비롯해 법가, 도가, 묵가, 음양가, 병가, 잡가, 농가 등 수많은 학파가 형성됐다.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역사상 이른바 백가쟁명의 시대였다.
이같은 시대적인 연속성 속에서 진나라가 나머지 6국을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한다. 이때가 진시황 집권 26년째 해인 BC221년이었다. 전제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한 진시황의 통일정권은 곧바로 문화사상분야에 대해 통제를 한 것은 아니었다.
진시황은 천하 통일 후 8년이 지난 BC213년까지 6국의 궁궐과 민간이 갖고 있는 고대문헌을 수집했다. 70명의 학자를 등용해 박사라는 관직까지 내렸다. 이어 2천명의 학생들을 모집해 박사 밑에 연구생을 두었다. 진시황은 이들을 통해 고대 문헌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전제정치를 하는데 불리한 서적들은 금서로 정했다. 반대로 진왕조에 유리한 서적들은 보급시켰다. 책을 불태운 분서사건은 BC213년에 발생한다.

농업과 의학서적 남기고 소각

여기에 초나라 출신인 승상 이사(李斯)가 있었다. 그는 진나라 정책을 담당한 권력자이자 법가사상을 중시하는 정치가였다. 그는 진시황에게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백가쟁명의 풍조를 바로 잡아야 한다”며 “고대의 것은 천하를 혼란에 빠뜨리게 될 것이고, 통일을 지속시켜 나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제후들이 서로 작당하여 복고를 주장하며 작금의 안정을 해하려 할 것이요. 군주를 칭송한다는 명분으로 남다른 특별한 학설을 펴서 자신을 높이고, 군중을 선동하여 유언비어가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승상 이사가 건의한 말에 진시황은 공감하고 분서를 강행하게 된다. 이 때 진나라 왕조의 역사서를 제외하고 나머지 역사서를 비롯해 백가의 학설을 담은 모든 서적들은 불태워지게 된다.
그런데 업무상 참고해야 할 도서와 농사와 관련한 서적, 의학과 관련 서적 그리고 점술서를 제외하고 각 지방에서 소장하고 있는 모든 서적은 현지 관청에 제출해 불사르도록 했다. 분서 명령이 하달된 이후 30일 내에 불사르지 않는 자는 노역형에 처하도록 했다. 또 명령이 하달된 뒤에서 시서(詩書)를 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과거의 사상을 근거로 현실을 비판하는 자는 일가족 전체를 사형에 처하고, 관리들 중에서 분서대상인 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것을 알고도 처벌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했다.
30일이 넘지 않아 진나라의 모든 지역에서는 서적을 불사르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결국 진나라 왕조 이전의 고문서들은 모두 재로 변했다. 역사적인 큰 손실이었다. 중국 역사상 귀중한 역사자료와 문헌들이 사라졌다.

비판하는 유생들을 생매장

분서가 있는 지 1년 만에 이제 유생들은 생매장하는 갱유(坑儒)사건이 발생한다. 서적은 불태워버렸지만 사람의 사상은 없애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BC212년 후생과 노생이라는 인물들이 진시황을 위해 불로장생의 약초를 구하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약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발각될까봐 그들은 두려워하면서 결국 도망가기에 이른다. 이런 소식을 들은 유생들이 진시황을 비난했다. 진시황은 진노하며 어사들을 통해 자신을 비방한 유생들을 잡아 심문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심문과정에서 유생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밀고하는, 서로가 서로를 밀고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연루된 유생이 460명이 됐다. 이들을 모두 수도 함양으로 붙잡아 와서 생매장함으로써 일벌백계의 의지를 보여줬다.
이런 방식으로 갱유사건은 1차에서 끝나지 않고 2차, 3차까지 발생했다. 기록에 따르면 수도 함양 근처 여산에 겨울인데도 과일을 심어 익을 것을 유생들이 직접 와서 보도록 했다. 전국에서 모여든 유생 700명을 생매장했다.
진시황의 이같은 철권통치는 결국 당대 지식인들과 백성들의 민심이 정권을 떠나게 했다. 진시황은 폭정을 통해 사상의 통일을 이루려고 했지만 민심은 정반대였다.
BC 210년, 진시황이 지방순시 도중 사망했다. 그러자 무능한 그의 아들 호혜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신하들은 2세 황제를 이용해 권력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싸웠다. 계속 이어진 폭정에 민심은 이탈했다.

군주가 덕정을 펴지 못했다

진시황 사후 1년 뒤인 BC 209년 진승과 오광이 주도해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진나라 왕조 타도의 깃발을 세운 진승은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어 BC206년 진나라는 유방과 항우군대에 의해 수도 함양이 함락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그 뒤 한나라 때 인물 사마천은 역사서 사기(史記)를 통해 진나라 멸망 원인을 우선 군주가 덕정(德政)을 펴지 못한 것은 가장 큰 이유로 지적했다. 사마천은 진시황에 대해 “천성이 고집불통으로 남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고 평했다.
사마천이 말한 진 멸망은 정보와 소통의 문제로 보았다. 위아래의 언로가 막히면 나라를 망친다는 이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위의 뜻이 아래로 전달되지 못하고 아래의 감정이 위로 전달되지 못한 채 서로 감추고 숨기면 나라의 혈관이 막혀 몰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의 <진시황 본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충성을 다하여 황제의 잘못을 막지 못했던 이유는 진나라에 꺼리고 피해야 할 습속이 많아 충성 어린 충고를 하는 사람은 말도 끝내기 전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천하의 뜻있는 지식인들은 듣기만 하고, 두 다리를 모은 채 입을 다물었다. 이 때문에 임금이 바른 도리를 잃었는데도 신하들은 솔직하게 충고하지 못했다. 지혜롭다는 지식인들은 묘책을 내지 못했다. 천하가 어지러워진 다음에도 황제(2대 황제 호혜)는 이런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지금으로부터 2100년 사마천은 국가를 멸망으로 이끄는 망국의 요인들 가운데 하나를 소통의 문제를 들었다. 지도자는 마음의 귀를 열어 놓지 않으면 처참하게 실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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