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제대로 알자<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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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55>
  • 정거배
  • 승인 2016.04.0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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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상징 만리장성은 언제부터 축조됐을까?
▲ 만리장성의 동쪽 끝 발해만에 세워져 있는 산해관. 만주쪽에서 중원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군사요새였다. 만주에서 발흥한 청나라 군대를 명나라 수도 베이징을 진입하기 위해 몇 차례 공략했지만 난공불락이었다. 그러나 산해관 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명나라 장수 오삼계는 산해관 문을 열어 청나라 군대가 베이징으로 무혈 입성할 수 있게 했다.

▲ 인터넷전남뉴스 기자/중국언어와 문화학전공
만리장성은 중국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와 같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은 중국인들에게는 오늘날 중화민족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중국인들은 우리처럼 만리장성이라 부르지 않고 장성(長城)이라고 부른다. 많은 이들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 이후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만리장성의 축조역사는 지금으로부터 2700년 전인 서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주시대란 우리의 고조선이 생기기 전인 하나라에 이어 은(상나라)을 거쳐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기 전인 기원전 8세기 이전의 시대다.본격적으로 축조된 것은 주나라가 제후들을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가던 춘추전국시대 때 각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면서 부터였다.

2700년 전 제후국들 축성 시작

각 제후국들은 모두 방어를 위해 성벽과 전쟁 상황을 알리는 봉화대를 갖추기 시작했다. 장강(양자강)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초(楚)나라는 기원전 7세기 경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위(魏)나라 등의 공격에 대비해 방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제후국들은 모두 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산둥성 일대의 제(齊)나라는 또 초나라와 월(越)나라의 공격에 대비해 성을 쌓았다.  위나라는 서북쪽에 있는 진(秦)나라이 대비해 성을 축조했다. 이밖에 지금의 베이징 부군의 연(燕)나라, 조(曺)나라 등도 흉노 등도 북방의 유목민족의 남침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다.  그런데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나머지 6국을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하자 제후국 간 방어목적의 성은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오직 북쪽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성벽들만 제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통일제국은 진나라에게는 북방의 흉노족 등 오랑캐(?)들이 늘 위협적인 존재였다. 당시 진나라 백성들 사이에는 ‘진나라는 북방 오랑캐에 의해 망할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퍼질 정도였다.
이에 따라 진나라 조정은 몽염 장군으로 하여금 민간인을 징발해 장성을 건축하도록 명령했다. 흉노족을 저지하기 위해 전국시대 지어진 기존의 북쪽 성벽을 골격으로 해서 보수작업과 증축공사를 했다. 또 새로운 성벽도 건축했다.  이를 모두 연결하자 드디어 만리장성이 탄생했다. 당시 진나라 장성은 서쪽 감숙성 동부에서 시작해 영하, 섬서, 산서, 내몽공, 하북, 요녕성 등을 지나 조선의 압록강까지 총길이는 5000㎞가 넘었다. 진나라에 이어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 때도 장성 축조공사는 계속됐는데, 서쪽 신장위구르 일대까지 국경선이 확장되면서 길이도 늘어났다. 장성의 총 길이가 1만㎞에 달했다고 하며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

부강했던 당나라, 장성축조 안해

그 뒤 위진 남북조시대와 수나라 때도 장성 축조공사는 계속됐고, 부강했던 당나라 때는 장성은 축조하지 않았다. 12세기 금나라 때도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 동부를 중심으로 장성을 지었졌다. 북방의 몽고족이 남침해 한족을 제압하고 세운 원나라 때는 당연히 장성을 축조할 필요가 없었다. 1368년 주원장이 주도해 지배세력인 몽고족을 북쪽 초원지대로 몰아내고 세운 명나라는 장성축조에 적극적이었다.  명 왕조는 200년에 걸쳐 북방으로 밀려난 몽고족의 남진을 막기 위해 장성축조에 매달렸다. 동쪽의 압록강에서부터 서쪽 기련산에 이르는 7300㎞에 이르는 구간이었다. 현재 우리가 중 국여행을 하면서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이 명나라 때 축조된 성벽이다. 베이징에서 60㎞ 떨어진 팔달령 장성은 가욕관이라는 관문으로, 명나라 때 보수돼 지금까지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1644년 다시 한족을 제압하고 들어선 만주족의 청나라는 장성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북방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자신들이 장성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청군, 산해관 전투없이 통과

발해만과 접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이라는 관문이 있다. 허베이성 친황다오시에 속하며  베이징과 300km 떨어져 있다. 산해관은 천혜의 요새다. 명나라 후기 만주에서 발흥한 여진족 후금은 산해관을 넘어야 베이징과 중원을 접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해관의 지리적 특성상 한쪽 면은 바다이기 때문에 해군력이 없으면 돌파가 불가능했다. 명나라 수도인 베이징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할 군사요충지였다. 청나라의 누르하치는 몇 번이나 산해관을 공격했지만 홍이포로 무장한 명나라 장수 원숭환에게 저지당했다. 결국 원숭환이 명나라 조정의 암투 등으로 처형된 후 산해관은 오삼계라는 장수가 수비를 담당하게 된다.

1644년 봄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은 남쪽에서 봉기한 이자성의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다.
그 당시 오삼계는 자신의 애첩이자 기생이었던 베이징에 있던 진원원이 이자성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명나라 멸망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오삼계는 산해관 문을 청나라 군대가 베이징으로 진격하도록 문을 열어 주고 만다. 산해관을 전투없이 통과한 청군은 반란군 이자성을 군대를 남쪽으로 몰아내고 베이징을 접수한다. 이로써 명나라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장성은 백성들의 피와 땀

장성축조 공사는 동원된 백성들의 피와 땀의 상징이기도 하다. 엄청난 양의 석재와 토사가 사용됐다. 중국 역사문헌 등에 따르면 진나라 시대 장성 축조공사에 징발된 인력은 30만 명에서 50만 명에 달했다.  
남북조시대 북제는 180만 명을 동원해 장성을 축조했다. 수나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장성 축조는 북방의 유목민족의 남침을 저지함으로써 백성과 농경지를 보호했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방대한 공사는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켰고 고통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막중한 부역과 세금 등으로 결국 조정에 반기를 들고 봉기했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지 15년도 못 채우고 단명한 직접적인 원인도 장성축조였다.

훗날 장성 축조와 관련 이런 시가 전해지고 있다.

영정(진시황)이 천하를 다스리게 된 뒤
북방에 만리장성을 쌓았네
백성의 절반이 흙이 되었고
백골이 사방에 가득하구나

기원전 209년 일어난 진승·오광의 난은 진나라 멸망을 촉발시켰다. 평민이었던 진승은 조정에 의해 징발된 900명의 인부들과 함께 장성축조공사를 위해 지금의 베이징 근처인 어양까지 시일 내에 도착해야 했다. 그러나 비가 많이 내려 일정이 지체됐다. 당시 규정에 따르면 정해 진 기일 내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으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소집명령에 따르지 않아도 죽고, 기일 내에 도착하지 못해도 죽어야 할 판이었다. 진승은 그래서 “왕(王), 후(侯), 장(將), 상(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인가"라며 봉기를 주도했다. 진승·오광의 난을 계기로 전국에서는 백성들의 크고 작은 봉기가 계속됐고, 3년 뒤인 기원전 206년 항우를 제압하고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도 이때 가세했다.

진나라, 무리한 징발이 백성봉기 촉발

장성은 축조하면서는 재료는 주로 석재였지만 지역에 따라 흙만 사용하기도 했다. 서북쪽 황토고원 지대에는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재료로 사용했다. 장성 130m마다 보루를 설치해 감시초소를 뒀고 각 요새에는 봉화대를 설치해 적의 움직임이 포착되면 경보를 울릴 수 있도록 했다. 낮에는 늑대의 배설물을 섞은 마른 풀을 태워 짙은 연기가 피어오를 수 있도록 했다. 밤에는 유황을 섞은 건초를 태워 불빛이 멀리에서도 보일 수 있도록 했다. 중국 역대 왕조들이 쌓은 만리장성을 두고 여러 가지 엇갈린 평가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 중국인들은 방어의 목적이고 백성과 농경지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주장한다. 또 일부 중국학자들은 실크로드와 동서 문화교류와 소통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한다. 반대로 만리장성의 수축은 중화사상에 입각한 중심과 변두리를 구분하는 중국인들의 사유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라 평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리장성은 중국인들의 능력과 지혜, 뛰어난 창의성을 보여주는 위대한 건축물임은 틀림없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중화민족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자리매김해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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