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영국이 중국에서 157년 만에 철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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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영국이 중국에서 157년 만에 철수하다
  • 정거배
  • 승인 2016.04.22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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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57>
▲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됐지만 특별행정구로, 별도 자율자치권을 행사하는 행정정부가 들어서고 행정장관이 이끌고 있다. 중국은 세계에서 없는 1국가 2체제 국가이다. 홍콩인들은 1세기 넘게 식민지를 경험했고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중국 본토인들과는 달리 정체성이 모호하다. 법치와 자유라는 영국의 식민경험이 있는 그들이 조국인 중국에 대한 생각은 본토인과는 다르다. 중국인이라기보다는 홍콩인이라고 대답한다.

▲ 인터넷전남뉴스기자/중국언어와 문화학 전공
아편전쟁은 중국 역사상 전환점이 됐던 사건이다. 중국인들은 아편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천자의 나라이자 상국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하면서 그들의 세계관도 변하기 시작했다. 중화민족의 자부심도 혼란해지기 시작됐다. 서양을 배워 서양을 물리치자는 자강운동도 이어졌다. 중국인들은 1840년 있었던 아편전쟁을 중국역사의 전환점이자 근대사의 시작이라고 간주한다.
 영국이 아편전쟁 전리품으로 차지했던 홍콩이 1997년 7월 1일 중국으로 반환됐다. 19세기에 중국 대륙을 점령했던 제국주의 국가 중에서 영국이 가장 늦게 철수한 셈이다.

157년 전인 1841년 영국이 차지할 당시 홍콩 섬 인구는 5,650명에 불과했다. 영국이 점령하고 있던 초기 홍콩은 중국본토와 왕래가 자유로웠다.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다’는 정책 때문이었다. 1941년 대륙에서는 일본군과 국민당·공산당 간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때였다. 영국 점령 100년 만에 홍콩인구는 160만 명을 넘었다. 대륙에서 전란을 피해 들어오는 이들이 많았다. 1949년 지금의 신중국 탄생한 이후 대륙에서 입경하는 이들에게 홍콩정부는 엄격히 제한하기 시작했다. 홍콩인이라는 신분증을 만들고 주민등록을 의무화했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대륙의 신중국정부는 제국주의 영국이 홍콩을 점령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했다. 홍콩을 영국의 식민지가 아니라 중국 영토의 일부로 간주했다. 그래서 중국정부는 자유왕래를 고집했다. 홍콩정부는 홍콩으로 불법 진입하는 대륙인에 대해서 일정한 절차를 거쳐 홍콩인으로서의 신분을 인정해 줬다. 그러다가 마오쩌둥 사망에 이어 1979년 개혁개방정책이 시작되자 대륙에서 홍콩으로 이주하는 이들이 다시 크게 늘었다. 이에 대해 홍콩정부는 불법으로 들어온 대륙인에 대해 잡히면 무조건 체포해 다시 중국으로 강제 송환했다. 지금도 불법 입경자에 대해서는 강제 송환제를 적용하고 있다. 한 국가의 일부지만 비자발급 등 행정절차를 통해 왕래해야 한다. 지금 홍콩의 인구는 600만명을 넘는다. 대부분 대륙에서 들어왔다.

아편전쟁, 반식민지 시대 서막

다시 19세기에 되돌아가 보면 1840년 청나라가 영국과 벌인 아편전쟁은 나라가 반식민지로 상태로 전락하는 출발점이 됐다.  아편은 사실 당나라 때인 8세기 무렵부터 아랍인들에 의해 중국에 들어왔다. 그때는 약재로만 사용됐다. 비로소 16세기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아편을 담배처럼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때 바다의 주도권을 쥐고 식민지를 확장하기 시작한 포르투갈은 세계 최대의 마약 생산국이자 판매국이었다. 17세기말 영국이 인도를 점령했다. 영국은 동인도회사에 아편 전매권을 줬다.  일본이 조선을 약탈할 때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같은 역할을 했던 동인도회사는 중국에 대량의 아편을 유입하기 시작했다. 대신 영국은 중국에서 차와 생사 등을 수입해 갔다. 물론 영국만 중국에 아편을 판매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도 아편을 중국에 팔았다. 러시아도 중앙아시아에서 생산된 아편을 중국에 팔았다.

당시 아편 가격은 1킬로그램 당 은 5량 정도였다고 한다. 1840년 아편전쟁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아편을 피우는 중국인들은 귀족관료와 지주 뿐 아니라 농민들까지 급속도로 확산됐다. 1838년 중국의 아편 흡연인구는 200만 명을 넘어섰다는 기록이 있다.  청 조정에 상소가 이어졌고, 1838년 청 도광황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아편단속에 본격 나서기 시작했다. 임명장을 받은 임칙서는 1839년 1월 베이징을 출발해 남쪽 광동으로 향했다. 광동에 도착한 임칙서는 아편 거래 현황 등에 대해 치밀하게 조사했다.
그해 3월 광동 일대에 있는 외국상인들에게 갖고 있는 아편을 3일 안에 모두 내놓을 것을 명령한다. 이와 함께 앞으로 아편소지 금지와 이를 위반할 경우 모든 아편을 몰수하고 위반자는 처벌하겠다고 발표한다. 영국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아편에 대한 몰수와 소각이 이뤄진다. 은 800만량에 해당하는 아편이 수거됐다.

신식무기와 재래식 무기의 차이

청나라의 아편금지 조치에 대해 영국에서는 전쟁을 하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중국에 아편을 팔아 이익을 챙기던 영국인들은 정부를 압박했다. 1840년 6월 영국군 총사령관 블레머는 40여 척의 함대에 4,000명의 군사를 싣고 중국으로 향했다. 제1차 아편전쟁이 시작됐다. 이 전쟁에서 광동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5만 명의 청나라 군은 수적으로 10분의 1에 불과한 영국군에게 대패했다. 재래식 무기를 갖고 있던 청나라군은 함포 등 신식무기로 무장한 영국해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당시 영국의 군함은 대형 함정은 길이가 110미터에 너비가 20미터로 3층으로 건조됐는데, 72문의 함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또 소형 함정은 길이가 90미터에 30문의 함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장착된 함포의 유효 사거리는 5킬로미터로 청나라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깜짝 놀란 청나라 조정은 협상을 했는데, 굴욕적인 내용이었다. 영국은 아편을 단속한 임칙서 처벌을 요구했고, 청 정부는 임칙서를 면직처리하고 지금의 신장위구르 지역으로 유배를 보냈다.
1841년 1월 영국군은 배상금 등 무리한 요구를 청나라가 들어주지 않자 다시 전쟁을 시작해 홍콩과 대만에 이어 지금의 저장성 닝보 그리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와 남경까지 점령하기에 이른다.  결국 1842년 난징조약으로 영국은 홍콩 섬을 차지했고 광저우(廣州), 샤먼(廈門),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상하이(上海) 등 다섯 개 항구를 강제적으로 개항시켰다. 사실 홍콩은 영국이 오래전부터 중국 연해지역을 차지하려고 했던 야심을 성사시킨 것이다. 홍콩이 지리적으로 안전하고 방대한 정박항을 건설할 수 있는 적지였다.

반환이후 홍콩인들의 정체성 혼란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됐지만 특별행정구로, 별도 자율자치권을 행사하는 행정정부가 들어서고 행정장관이 이끌고 있다. 중국은 세계에서 없는 1국가 2체제 국가이다. 홍콩인들은 1세기 넘게 식민지를 경험했고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중국 본토인들과는 달리 정체성이 모호하다. 법치와 자유라는 영국의 식민경험이 있는 그들이 조국인 중국에 대한 생각은 본토인과는 다르다. 중국인이라기보다는 홍콩인이라고 대답한다. 중국정부는 홍콩을 반환받으면서 인민해방군이 영국군을 대신해 들어왔지만 모든 법률과 제도를 앞으로 50년 간 그대로 존속시키기로 했었다. 홍콩의 반환은 덩샤오핑이 내건 일국양제를 제안했기 때문에 성사됐다는 분석도 있다. 영국은 반환 기한이 다가오자 가능하면 홍콩을 계속 차지하고 있고 싶어 했다. 영국은 세계의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인 홍콩이 사회주의 중국으로 넘어가면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며 영토는 반환하되 홍콩에 대한 관리는 영국이 계속 맡겠다는 중재안을 내기도 했다.

영국 대처수상과 자오쯔양 중국 총리는 홍콩 반환 13년을 앞둔 지난 1984년 12월 1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반환협정에 정식 서명했다. 이날 체결된 협정은 영국이 홍콩을 예정대로 중국에 반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대신에 중국은 홍콩을 특별행정구로 지정해 자치를 허용해주기로 했다.
영국과 반환협상을 지켜본 덩샤오핑은 13년 뒤 홍콩을 직접 볼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협정에 따라 1997년 7월 1일 예정대로 이뤄졌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홍콩 반환을 5개월 앞둔 1997년 2월 세상을 떠났다.
홍콩에 대한 1국가 2체제 실험이 성사되면서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마카오도 1999년 중국으로 반환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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