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제대로 알자<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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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59>
  • 정거배
  • 승인 2016.05.0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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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황제 측천무후, 천하를 호령하며 태평성세를 꿈꾸다
▲ 2014년 중국에서 방영된 역사드라마 <무미랑 전기>에서 무미랑(측천무후)역을 맡은 배우 판빙빙, 변변치 못한 집안 출신이었던 측천무후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기득권 세력을 약화시키고,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사회를 공고히 하고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를 제고시켰다는 점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 정 거 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중국언어와 문화학 전공
당나라 제7대 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는 중국 역사상 정통성을 가진 유일한 여자황제였다. 물론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의 부인 여태후(BC 241~180)도 고황후로서 황제를 대신해 국가권력을 휘어잡았지만 나중에 시호가 박탈됐다. 측천무후는 당나라 2대 황제인 태종 때 궁궐에 입궁했다. 그의 나이 14살이었다. 당 태종 이세민은 초대 황제 이연의 아들로 현무문을 정변을 일으켜 형과 동생을 죽이고 부친의 권좌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사리분별이 투철하고 능력도 뛰어난 황제로 재임기간에는 당나라 역사상 태평성대를 이뤄 정관의 치라고 이름붙일 정도로 국가운영을 잘했다.

측천무후는 원래 궁중 재인으로서 태종 가까이서 시중을 들었는데, 어느날 황제는 말 한필이 하도 난폭해 길들이기 위해 궁녀들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제안을 했다. “너희 중에서 누가 이 말을 길들일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황제 앞에서 감히 누구도 자신 있게 나서는 궁녀들이 없었다. 그때 측천무후는 당돌하게 나서서 “폐하 제가 할 수 있습니다.”말했다. 그러면서 “철사로 만든 채찍과 쇠망치, 비수”를 달라고 했다. 난폭한 말을 길들이는데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 황제가 듣기에는 유치한 수준이었지만 용감한 궁녀로 기억될 수 있었다.  그녀가 26세 때 태종 이세민이 세상을 뜨자 황실의 규정에 따라 암자에 들어가 비구니로 살아야 했다.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 하다는 법도에 따라 머리를 깎고 감업사라는 절에 들어갔다. 이어 아들 이치가 황제 자리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당 고종이다. 고종은 아버지와는 달리 무능했다. 그러다보니 국가 대사를 외숙부이자 재상인 장손무기라는 사람에게 떠맡겼다.

비구니에서 황후로 봉하다

고종은 부친 재위시절부터 궁녀 측천무후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황제에 오른 뒤 2년이 흐른 뒤 고종은 그녀를 암자에서 데리고 나와 궁궐로 입궁시킨다. 기존의 황후를 폐위시키고 황후로 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정 대신들과 재상 왕손무기를 결사반대를 했다. 황실의 법도를 어긴다는 것이었다.
이때 측천무후는 배후에서 막후작업을 통해 조정의 대신들을 매수해 황궁 안의 여론의 흐름을 바꿨다. 그녀는 고종에게 “이 일은 국사가 아닌 폐하의 집안일이기에 다른 사람이 관여할 수 없다”는 논리로 설득해 자신이 왕후로 등극했다. 그녀의 나이 32세였다.

왕후로 오른 측천무후는 자신을 반대했던 조정 원로대신들을 유배 보내는 등 숙청하고 재상 장손무기는 스스로 자살하도록 했다. 결단력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녀는 고종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자 황제를 대신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서기 683년 고종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측천무후는 두 아들 이현(중종)과 이단(예종)을 황제자리에 앉혔으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중종을 폐위시킨데 이어 예종은 연금하고 측천무후가 태후의 자격으로 집정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나이는 60세였다. 서기 690년 9월, 67세의 측천무후는 대신들의 간청을 수락하는 형식으로 황제자리가 오른다.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하게 황제자리에 오른 그녀는 스스로를 성신황제라고 칭하고 국호도 주(周)로 바꾸었다. 수도도 낙양으로 하고 3년 간 거기에 있다가 다시 장안(시안)으로 돌아온다.

여성 지위 격상시켜

측천무후는 재임기간 중 개혁적인 정책을 폈다. 남존여비 남성위주의 봉건사회였던 당시 여성지위를 향상시키는데 적극적이었다. 여성의 이혼이나 재가를 보편화시켰다. 궁중에서부터 여성들의 복식문화를 일대 혁신했다. 개방적인 스타일인 그녀는 궁녀들의 의복부터 변화를 줬다. 측천무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처형됐던 고종 때 재상 상관의라는 사람이 있었다. 가족이 몰살 당했는데 어린 아이인 손녀 상관완아(664~710)만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재능이 뛰어나 측천무후가 황제로 재임하던 시기에 조정의 실무를 담당했다. 측천무후가 직접 발탁한 여걸이었다.   어느 날 측천무후가 상관완아를 불러 “아버지와 할아버지 등 가족을 죽인 나를 미워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역사기록에는 남아 있다.

“원망하면 불충(不忠)이고, 그러하지 아니하면 불효(不孝)가 됩니다”
상관완아는 그러나 측천무후가 죽고 난 뒤 궁궐 내 권력투쟁 와중에서 양귀비와 사랑으로 잘 알려진 이융기(현종)에 의해 살해당한다.  측천무후는 황제로 등극하자 마자 씨족지를 수정해 성씨록을 개편함으로써 자신이 황제가 된 것에 대해 역사적인 정통성을 확보했다. 무(武)씨인 그녀의 성씨가 드디어 씨족지에 기록됐다. 자신을 반대하던 사대부 귀족과 관료집단을 무력화시켰다. 대신 신흥세력과 평민출신들을 영입해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평민출신의 관료들이 득세함으로써 귀족출신의 관료들의 특권을 제거했다.     
 
개방적인 인턴공무원 제도 도입

그녀가 통치하는 15년 동안 당나라는 인재등용과 정사처리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정치적 능력을 발휘했다. 인재를 고를 때 측천무후는 “광활한 천하를 어떻게 나 혼자 다스릴 수 있으리오.”라고 하면서 인재등용의 문을 개방했다.  출신성분과 자격을 따지지 않고 능력에 따라 채용했다. 수나라 때 시작한 과거제도를 개편했다. 오늘날 인턴사원제와 비슷한 원외관(員外官)을 설립했다. 원외관은 관리 편제의 정원 외에 임시로 채용했는데, 추천을 받거나 조정에서 시범적으로 등용해 관리자격을 시험해 본 뒤 황제가 나중에 승인했다.

최초로 무과제도를 도입해 인재발굴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자신의 지지기반을 공고히 했다.
측천무후는 또 농업생산도 매우 중시했는데, ‘건국의 근본은 농업에 있다“며 양식이 많은 지역의 지방관은 승격시킬 정도로 농업부흥 정책 추진에 치중했다. 반대로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스려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는 사례가 많을 경우 해당 지방관에 대해서는 직위를 강등시키거나 심지어는 해임시키도록 했다.
따라서 집권초기 당나라 전체 가구는 380만호에 불과했으나 집권말기에는 615만호까지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악명 높은 여황제

외교정책은 지금의 티벳족인 토번과 전쟁도 여러 차례 했다. 토번이 차지하고 있던 서북지역을 평정함으로써 막혀 있던 실크로드를 다시 개통시켰다. 변방에는 둔전이나 군전제도를 실시함으로써 군량미를 충분하게 확보했다. 장기간에 걸쳐 변방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런 제도는 지역개발과 농민의 부역 경감 등 국경선을 튼튼히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측천무후는 이처럼 긍정적은 평가도 받지만 중국 역사상 3대 악녀로 불릴 정도로 부정적인 평가 역시 만만치 않았다. 3대 악녀란 한나라 유방 고조의 부인 여태후와 청말 서태후를 포함한다.  그녀는 폭정을 일삼는 관리를 자신에게 충성한다는 이유로 중용했다. 자신에게 밀고를 하는 자들에게도 큰 상을 내렸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탐관오리들이 판을 쳤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역모죄로 죽어간 관리들도 부지기수였다. 측천무후 재임기간 인재등용을 한다면서 신규관리들을 많이 채용하다보니 관료사회가 비대해졌고 백성들의 세금부담은 그만큼 늘어났다. 강력한 중앙집권제로 국가 안정과 경제발전은 이뤄냈지만 그에 따른 반대급부였다.

변변치 못한 집안 출신이었던 측천무후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기득권 세력을 약화시키고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사회를 공고히 하고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를 제고시켰다는 점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67세에 황제로 등극해 서기 705년 12월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니, 중국 역사상 진시황제 이후 200여명에 달하는 황제 중에서 장수한 인물로 꼽힌다.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의 황제 칭호를 없앨 것과 황후, 그러니까 먼저 세상을 떠난 고종의 왕후로 기록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남편 고종과 합장돼 현재 시안의 외곽 건릉에 묻혀 있다. 측천무후의 기념 비석 역시 훗날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을 바라며 글자 없는 무자비(無字碑)만 세워졌다. 황제의 자리는 측천무후의 셋째 아들 이현 중종이 다시 이어갔다. 이어서 그녀의 손자 이융기(현종)가 이어 받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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