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제대로 알자<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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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60>
  • 정거배
  • 승인 2016.05.1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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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거 배<인터넷전남뉴스 기자/중국언어와 문화학 전공>
▲ 산시성 시안 근처에 있는 온천휴양지인 화청지, 1300여 년 전 현종과 양귀비의 열정적인 사랑을 형상화한 구조물이 입구에 서 있다. 이곳은 1936년 12월 12일 동북군 사령관이자 중화민국의 2인자였던 장쉐량이 공산당과 내전중지와 항일전쟁을 요구하며 장제스를 감금했던 시안사변의 현장이다. 시안사변을 중국현대사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인 사건이다.

▲ 정거배인터넷전남뉴스기자중국언어와 문화학 전공
중국 역사상 미인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양귀비가 등장하는 시기가 바로 당나라 시대다. 당 6대 황제 현종(이융기, 685~762) 집권 시기인데, 무려 45년 동안이나 황제자리에 있었던 이융기는 측천무후의 손자다.여걸 측천무후는 말년에 권력승계 문제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아들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주면 무씨 집안의 혈통은 끊어지게 될 것이고, 자신이 만들었던 주 왕조는 소멸되기 때문이었다. 측천무후는 본래 아들이 앉아 있던 황제 자리를 자신이 차지한 인물이다. 조카에게 계승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측천무후는 서기 699년 유폐되어 있던 이현(중종)을 다시 태자에 봉했다.

6년이 지난 705년 노년의 측천무후는 몸이 쇠약해 졌다. 이 틈을 이용 재상 장간지는 이현을 중종으로 복위시키고 군대를 동원해 측천무후를 황태후가 살아야 하는 상양궁으로 보냈다. 일종의 쿠데타였다. 그 해 11월 측천무후는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뜬다.  연호는 당 왕조로 14년 만에 복원됐다. 그런데 다시 황제에 오른 중종은 자신의 부친(고종)과 마찬가지로 유약하고 무능했다. 중종의 부인 위 황후는 시어머니 측천무후와 같은 야심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황제와 함께 조정의 일을 보고받는 등 국정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황궁 내 권력 투쟁의 끝

시어머니 집안의 무씨 사람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었다. 반대로 당 왕조로 복벽을 성사시킨 재상 장간지 등은 역모를 꾸민 혐의로 처형됐다. 위 황후는 자신의 친인척들을 권력의 전면에 등장시켰다. 여기에다 딸 안락공주까지 어머니와 함께 권세를 행사했다. 시어머니처럼 여황제를 꿈꾸던 위 황후는 딸 안락공주와 함께 황제 중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권력을 잡기 위해 부부간의 정도, 부녀지간의 사랑도 필요 없었다. 서기 710년 6월 2일 중종이 즐겨먹는 음식인 고기를 넣어 만든 떡에 독을 넣었다. 재위 6년 만에 중종은 아내와 딸에 의해 독살됐다. 위 황후는 친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남편 이현과 희첩사이에 태어난 16세의 아들 이중무(상제)를 황제로 앉히고 자신이 집정했다. 그러나 19일 천하가 됐다.
 
조카 이융기, 큰어머니를 처단하다

조카 이융기(현종)가 황실 호위군대인 금위군을 데리고 황궁으로 들이닥쳤다. 측천무후의 딸이자 자신에게는 고모인 태평공주와 합동으로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융기는 큰어머니 위 황후를 처형했다. 27살의 안락공주도 궁궐 내 자신의 방에서 화장을 하고 있다가 들이닥친 군사의 칼날에 목과 거울이 동시 떨어졌다. 남편과 아버지를 죽이고 권력을 잡고자 했던 모녀는 이렇게 최후를 맞았다. 이융기의 아버지 이단(예종)은 독살 당한 중종의 친동생이다. 전에 어머니 측천무후에 의해 7년 동안 실권 없는 황제자리에 앉아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권력에는 욕심이 없던 인물이다.

아들 이융기가 정변을 일으킨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미 상황이 끝난 뒤에 알게 됐다. 이중무가 황제자리에서 내려오고 이단이 다시 황제가 됐다. 하지만 권력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2년 만인 서기 712년 6월 아들 이융기에게 권좌를 넘겨줬다. 현종은 즉위했지만 큰어머니 위 황후 세력을 제거할 때 함께 정변을 주도했던 고모 태평공주가 여간 신경 쓰였다. 태평공주는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야심만만한 여걸이었다. 태평공주와 조카 현종사이에 금이 가고 현종을 폐위시킬 음모가 진행됐다. 이를 미리 알아차린 현종은 713년 수도 시안에 계엄령을 발동하고 쿠데타 세력을 체포하는 등 제거작전에 돌입했다.

현종, 세계제국과 교류 강화

역모가 발각된 사실을 알게 된 태평공주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측천무후 말년부터 9년 간 계속된 궁중 내 권력투쟁은 종결됐다. 정국은 안정을 되찾고 현종은 자신의 연호인 개원(開元)의 태평성세를 열게 됐다.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에 이어 당나라 국력인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는 시대가 계속됐다.
현종은 수나라 때 시작된 과거제도를 개혁해 능력 있는 인재들을 등용했다. 중앙과 지방 관리 간 순환근무를 하도록 해 중앙과 지방의 소통을 도모했다. 지방에 전문 탐방원을 파견해 관리들의 업무태도를 감독하고 심사했다. 개방형 인재영입제도를 채택해 외국인들도 관리로 채용했다. 신라의 최치원도 12살 때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21살 때 진사에 급제해 장수성 양주에서 관리를 지냈다. 일본인 유학생들도 과거시험에 합격해 관리로 등용됐다.

현종은 또 예술에 특별한 관심과 재능을 가진 황제였다. 비파 등 악기연주에도 타고난 재능을 갖고 있었고 예술창작과 연극도 직접 만들었다. 궁중에 한림원이라는 직제를 두어 시와 문학 등을 전문적으로 창작하게 했다. 황실예술위원회와 같은 기구였다. 리원이라는 황실 내 예술학교를 두고 전국적으로 문화예술분야 재능이 있는 인재 수천 명을 모았다. 당시 역사기록에는 악대와 악사 등도 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8세기 당나라 현종 때 문화예술의 활성화는 15세기 유럽의 르네상스를 능가했다. 이 시기 유명한 시인 이백과 두보가 활동했다.

일본과 아랍, 유럽에서 사절단이 국제도시 장안(시안)을 찾았다. 서기 717년 일본 9차 사절단  557명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방문했다. 여기에는 일본 정부 관리 뿐 아니라 유학생들도 있었다. 일본은 당 현종 시대 15차례 사절단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인구 5천만 명의 당나라와 교역을 했던 나라는 동로마 제국 등 200여 국가에 이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같은 시기 유럽은 한 나라 인구는 300만 명을 넘지 못했던 시기였다.

양귀비의 본명은 양옥환으로, 16살 때 현종의 아들 이모와 결혼했다. 57살의 현종은 처음으로 며느리를 보고 반했다. 시안 근처 화산으로 도교사원으로 출가시킨 뒤 궁궐로 불러들였다. 서기 745년 귀비로 책봉됐다. 현종의 나이 60살이었고 양옥환은 27살이었다. 당대에 이런 일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현종의 할머니 측천무후도 증조 할아버지 태종 이세민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태종이 죽자 아들 고종의 여자가 됐다. 양귀비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현종으로 하여금 넋을 잃게 했다. 음악과 시가에도 능통해 비파연주 등이 전문가 수준이었다. 춤도 수준급이었다. 현종은 예술창작에 몰두하면서 집권 초기에 쏟았던 국정운영에 대한 열정이 식어갔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치에 실증이 났다. 30년 넘게 지속된 태평성세는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양국충의 전횡과 안사의 난

당 왕조의 멸망의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양귀비의 사촌오빠 양국충이 재상으로 앉아 권력의 핵심을 장악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진리가 들어맞고 있었다. 현종은 절세미인 양귀비를 총애하며 향락에 빠졌고, 양국충은 환관정치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부정부패의 핵심에 서게 됐다.  이제 당나라는 현종 집권초기 개혁적인 정책은 동력을 잃었고 토지 겸병에 따른 빈부격차와 정치, 경제, 사회 등 전 분야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심은 동요했다. 지금의 베이징 부근 변경 방어를 맡고 있던 안녹산은 양국충 제거를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안사의 난이라고 하는데 서기 755년부터 763년까지 계속된 반란이다. 주동자 안녹산과 사사명의 이름을 따서 ‘안사의 난’이라고 부른다.

변방사령관 안녹산은 성격도 교활하고 아첨에 능해 양귀비의 양자가 되기까지 했다. 755년 11월 그는 사사명과 함께 1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양국충을 토벌한다며 반란을 일으킨다. 당나라 도읍 시안에 가까운 낙양까지 밀고 들어온다. 이때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이 반군 진압에 나서지만 실패한다. 고선지 장군은 낙양전투 과정에서 모함을 받아 결국 756년 처형된다. 낙양을 점령한 안녹산은 스스로 대연황제라고 칭하고 당나라 수도 시안을 향해 진격한다. 그러자 현종은 사천성쪽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시안을 막 빠져나와 지금의 산시성 흥평현(마외파)에 이르자 황실을 호위하는 금위군이 주도해 황제에게 양국충 제거를 촉구하며 반발한다.

권세를 누리며 안사의 난을 초래한 양국충과 그의 세력을 전부 죽였다. 그리고 보복을 방지하기 위해 황제에게 양귀비를 처치할 것을 요구했다. 양귀비는 목이 졸려 죽었다.
난리 속에서 여전히 황제자리에 연연한 아버지의 모습을 본 아들 이형이 황제즉위를 선포하고 사천 성도로 피신한 현종을 태상황으로 밀어냈다. 당 왕조가 쇠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안사의 난은 9년 만인 763년 조정군대에 진압되면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낙양과 시안 등 도읍을 중심으로 한 모든 지역은 폐허로 변했다. 가옥과 재물은 잿더미가 됐고 백성들은 전에 없던 환란을 겪으면서 생존을 위협받게 됐다. 안사의 난은 결국 중국 역사상 큰 전환점이었다. 군벌들이 할거하면서 당 왕조의 국력은 갈수록 쇠락하고 결국 왕조 멸망으로 이어졌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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